소설리스트

죽어서도 사는 존재들-280화 (279/281)

0280 / 0281 ----------------------------------------------

-3부-

얼마나 잤을까. 온 몸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고 내 옆에는 언제 들어와 자고 있는지 은혜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은혜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는 방을 나왔고 수송기를 나가 폐글루로 가니 경계를 서고 있는 재효와 규호의 모습이 보였다.

" 어?! 형 몸은 괜찮아?"

" 괜찮습니까?"

" 어.. 걱정 마. 그냥 피곤했을 뿐이야."

" 다행이네.."

" 그나저나 별 일은 없지?"

" 뭐... 몇 시간 사이에 별일이야 있겠어."

" 몇 시간이라.."

꽤 오래 잤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 아직 새벽4시야. 더 자. 오늘 경계는 우리가 서기로 했으니까."

" 그래.. 고생하고.."

" 응.."

" 안녕히 주무십시오."

" 수고해."

나는 다시 수송기로 들어가 물을 한 잔 마시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을 자는 은혜의 모습이 보였고 잠시 수송기 창문 쪽에 기대어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봤다. 폐기물 사이로 작게 보이는 검은 하늘을 보고는 잠시 멍하게 있었다.

" 일어났어요?"

" 어..? 나 때문에 깼어??"

" 아니에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웃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은혜 옆으로 가 누웠고 은혜에게 팔 배게를 해주고는 은혜의 몸을 가볍게 안고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어 밖으로 나갔다. 어제 나에게 당한 녀석들을 처리하러 나갔는데 흔적만 있고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 이미 다 처리했다."

" 그래?"

내가 왜 나왔는지 아는지 박 중사가 뒤에서 말을 했다.

" 나 잠깐 주변 좀 둘러보고 올게. 부탁해."

" 알았다."

나는 우선 군대가 주둔한 곳으로 천천히 달려갔고 그런 나의 모습을 박 중사가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 재원이가..."

" 많이 달라 졌죠?"

박 중사와 재효가 폐글루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아무래도...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몰라 자꾸 나한테 결정권을 주는 건가?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 아마도...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처럼 보이네요."

" 넌 재원이랑 꽤 오래 알았으니... 성격을 좀 알지 않냐?"

" 네.. 뭐 같이 일할 때 성격은 온순한데 위에다 할 말 다하고 밑에 사람에게

화나 잔소리도 거의 아니 아예 안했어요. 일 년에 한 두 번? "

" 그래..."

" 근데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 응?"

" 형은 중간에 이직을 해서 제가 있던 회사로 왔는데 그 전에 일하던

사람들 하고 곧잘 술을 먹었는데 들어보니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 뭔가 변환점이 있었구나.. 사람이 변하는 건 쉽지 않은데."

" 뭐 들을 이야기로는 연상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 누나가 형을 많이

바꿔놨다고 들었어요. 형 선배들 말로는 거의 조련 수준이라고 했는데."

" 그래?"

" 네. 저 몇 번 본적이 있는데 오랜 시간 본 게 아니라 잠깐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 정도로 봐서.."

" 그랬군."

" 그 때 느낀 건 진짜 형이 그 누나를 사랑했구나? 뭐 그런...

진짜 눈빛이 달랐다니까요. 둘 다."

" 은혜가 들으면 좋을 이야기는 아니군. 하하!"

박 중사는 작게 소리 내며 웃었다.

" 솔직히 말하면 은혜랑 이미지가 비슷해요."

" 그래? 역시..남자들이란 첫사랑과 비슷한 여자를 찾는다더니.."

" 하지만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은혜는 뭐랄까... 굉장히 순종적인 스타일

이지만 그 누나는 강약조절을 잘 했으니. 잠깐이지만 한 없이

순종적이다가 뭐 때문에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바로 표정이 변하면서

말을 하니까 형이 찍소리도 못하던데요."

" 재원이가 그런 면이 있구나.."

" 뭐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

둘이 한 참 이야기를 하다 뒤에서 느껴지는 눈초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뒤에는 무표정하게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은혜의 모습이 보였다.

" 어...언제부터...."

" 이직했을 때부터."

무미건조하게 대답을 하는 은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왠지 모를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는 은혜는 폐글루로 돌아갔고 등골이 서늘함을 느낀 둘이 한 숨을 내쉬었다.

" 죽었다..."

" 도대체 등 뒤에 올 때까지 왜 몰랐지?"

둘 다 감염체나 주변 생존자의 움직임은 잘 느끼면서 정작 대화를 절대 듣지 말아야할 인물은 놓치고 말았다.

" 그래서? 그 대화를 은혜가 다 들었다?"

" 응.."

" 그래서 은혜가 살기를 뚝뚝 흘리면서 들어갔구나."

" 봤구나.."

재효는 바로 미란이에게 가서 조금 전 상황을 말했다.

" 어쩌냐... 오빠한테 죽도록 맞겠지 너.."

" 하아... 튈까?"

" 잘 가."

단호하게 말하는 미란이의 표정을 보고 재효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 쥐며 말을 했다.

" 왜!! 왜!!! 둘이나 있으면서 다가오는 걸 몰랐지?"

"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미란이는 재효의 등을 두드리며 말을 했다.

" 뭐 별일이야 있겠어?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은혜도 이해하겠지."

" 둘이 여행도 엄청 다니고 결혼 이야기도 오갔다는 것도 들었는데?"

" 망했네. 오빠."

" 하아....아우!!!"

미란이의 대답에 재효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버둥 쳤다.

" 내가 가서 사태를 해결해야 하나? 은혜가 형한테 한 마디라도 하면

나 진짜 죽을지도 모르는데..."

" 그 정도야?"

" 형한테 그 누나 이야기는 금기야. 헤어지고 엄청 고생 했으니.."

" 많이 좋아했나보구나.."

" 아우..."

재효는 계속해서 어쩔 줄 몰라 괴로워했다.

" 응?"

나는 폐글루로 돌아와서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잠시 주춤거렸다. 누가 감시하거나 감염체가 온 것도 아닌데 살짝 긴장감이 돌았다.

" 뭐지..."

나는 천천히 걸어 폐글루로 돌아갔고 안에는 식사를 준비하는 미란이와 보미의 모습이 보였다.

" 다른 애들은?"

" 수송기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어."

" 그래.. 근데 뭔 일 있었어? 분위기가 별로네?"

" 아니.. 없었는데?"

내 말에 미란이가 대답을 했고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고 수송기로 들어가는 순간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 은혜가 물어보면 어떻게?"

" 몰라요. 재효 오빠만 죽겠죠."

둘의 대화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나는 다시 내려가 미란이에게 물었다.

" 무슨 소리야? 재효가 왜?"

" 어?? 어... 어..."

미란이는 크게 당황하며 말을 하지 못했고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며 재효를 찾았다.

" 하하...형..."

"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하하...."

웃고는 있지만 얼굴을 당장이라도 울 기세였고 재효는 내 손을 잡으며 말을 했다.

" 용서해 줘.."

" 뭘?"

재효는 내 전 여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박 중사와 하다 은혜가 들었다는 것을 말을 했다.

" 어디까지 들었어?"

" 전부.."

" 그 전부를 넌 박 중사한테 했고?"

" 으...응..."

" 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 살려줘..."

" 누가 죽인다냐?"

" 혀엉..."

" 됐다....."

나는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재효의 손을 놓고는 수송기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에는 오늘 먹을 식사의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 은혜와 희정이의 모습이 보였다.

" 바빠?"

" 아뇨."

" 희정아 잠깐 언니 좀 빌려갈게."

" 네."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희정이에게 나도 웃어보였고 묵묵히 나를 따라오는 은혜를 소파에 앉히고 말을 했다.

" 들었다며? 내 이야기?"

" 네."

" 그래서 그렇게 뚱한 표정으로 있는 거야?"

" ..... "

내 물음에 은혜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 뭐. 나도 나이가 있는데 당연한거 아닌가?"

" 알죠, 하지만 어렴풋이 아는 것과 자세하게 들어 아는 것은

다르다고요."

" 내가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 아뇨... 그냥...."

은혜의 말마따나 어렴풋이 아는 것과 들어 아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이해하나 가슴은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 그냥... 나한테 하지 않았던 것들과... 그 사람과 했던 이야기를 들으니.."

자신의 남자의 과거 여자이야기를 들었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이상했다.

" 뭐 전에도 이런 비슷한 대화를 한 걸로 기억하는데.."

" 질투심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 그래. 그래."

난 살짝 웃으며 은혜의 머리를 쓰다듬어줬지만 은혜는 머리를 흔들며 내 손길을 거부했다. 정말 싫어서 거부했다기보다 뭔가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내 눈에는 귀엽기만 했다.

" 조금 나아지면.. 그 때 이야기 할까?"

" 우선 식사 준비로 바쁘니까 마무리 하고요. 희정이 혼자 하기에는

양이 많아요."

" 알았어."

은혜는 희정이 핑계를 대며 나와의 대화를 거부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는 은혜의 뒷모습을 보고 재효를 잡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효는 이미 내 살기를 느끼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미란이가 내 옆에서 앉아 말을 했다.

" 나쁜 의미로 한 것도 아니고... 뭐 그냥 용서해 줘."

" 알아..."

" 표정이란 대답이랑 전혀 매치가 안 되는데?"

" 풋..."

" 뭐 여자라면... 아니 반대로 생각하면 오빠가 은혜의 전 남자 친구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지?"

" 그래서 이러고 있잖니."

" 그래도 그냥 두지 말고 가서 달래주고 해야지."

" 식사 준비로 바쁘시단다."

" 에휴..."

멀리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존재가 느껴졌고 나는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 거기서 계속 그렇게 듣고 있다간 정말 죽일지도 모른다."

" 하하..."

멋쩍게 웃으며 나오는 재효를 보고 한 숨을 쉬고 말을 했다.

" 너라면 알았을텐데..."

" 하하...미안..."

" 됐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 엎질러진 물인데."

" ..... "

" 뭐 생각해보면 딱히 네 잘못도 아닌 것  같고...."

" 그..그치 형?"

" 이라고 해도 완전히 용서한 건 아냐."

" 힝..."

내 말에 재효가 고개를 숙이며 칭얼거렸다.

" 그럼... 나는 다시 달래주러 올라가볼까."

" 잘해봐."

" 응원이냐?"

미란이는 응원의 말과 함께 웃었고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수송기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