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Chapter 1. 회귀물의 주인공(3)
“여기 좀 누워있어.”
병동에 도착하자 김석용이 시현을 안정실로 밀어 넣었다.
“저는 괜찮…….”
여전히 어리둥절했으나 여기서 자신이 4년 후의 미래에서 왔고 어제까지 호텔방에서 전문의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가는 정말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 같아 꾹 참았다.
폐쇄병동에 들어온 김에 그대로 입원하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고.
“일단 수액 맞으면서 좀 쉬고 있어. 회진 때까지 시간 있으니까.”
그는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미안. Brain CT 하나만 봐줘. 급한 환자냐고? 환자는 아니고 그게…… 아니, 환자 맞나? 아무튼…….”
보아하니 영상의학과 동기에게 판독을 부탁하는 모양이었다.
시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결같이 성실하고 우직한 사람이었다.
어제 사고를 당한 것도 아마 새로 맡은 환자, 정문수를 면담하느라 늦게까지 병동에 남아 있어서였을 것이고.
현실에서 화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 환자는…… 대체 뭐였을까?’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액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병동 식구들…… 다른 환자들도 무사해야 할 텐데.’
확실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의식이고 뭐고 간에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해. 그런데 어떻게…….’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날카로운 물건을 꽉 쥐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현실로 돌아가기도 하던데.
안타깝게도 여기는 그런 위협들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 폐쇄 병동 안정실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후두둑.
시현은 팔에 감긴 반창고와 수액 라인을 한 번에 잡아 뜯었다.
뚝- 뚝-.
수액과 혈액이 섞인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지혈부터 했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곧 이곳을 벗어나게 될 테니까.
필요한 것은 깊은 무의식에서 깨어날 만큼의 강한 충격뿐이었다.
‘해보자!’
시현은 눈을 질끈 감고 안정실 문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내던졌다.
* * *
철푸덕.
“시현아! 무슨 일이야!”
“괜, 괜찮으세요? 이게 무슨…….”
스테이션에 있던 김석용과 병동 간호사들이 안정실로 우루루 몰려왔다.
“선생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주저앉아 있는 시현을 향해 간호사가 물었다.
아프다.
몸보다 마음이.
아무리 꿈이라지만, 너무도 생생한 쪽팔림이었다.
“…….”
이제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소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게… 저, 그러니까…….”
“정식 근무 첫날인데 마냥 쉬기 불편했겠죠. 그래서 회진 준비하려고 급하게 나오다가 수액줄에 걸려서 넘어진 거 같은데요?”
바닥에 내팽개쳐진 수액 세트를 보며 김석용이 말했다.
“아, 그래서…….”
간호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이렇게 포장이 되네.
그래 봐야 그냥 미친놈과 성실하게 미친놈 정도의 차이겠지만.
후자가 그래도 낫지 않을까.
아주 조금은.
“잠깐 누워있었더니 많이 나아졌습니다. 회진 준비하겠습니다.”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충분히…… 는 아니지만 나름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다.
“이거 붙여드릴게요.”
간호사가 수액이 빠진 자리에 알코올 솜과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차갑다.
부딪친 오른쪽 어깨 부위가 묵직하게 아파 왔다.
병동에서 인계를 주고받는 간호사들과 아침 뉴스를 보고 있는 환자들의 모습이 더 없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감각이었다.
‘설마 이거……’
트럭에 치이고 몇 년 전 시점에서 눈을 떴으면 바로 눈치를 챘어야지.
어디선가 그걸 이제야 알았냐고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 *
‘내가 회귀를 했다고?’
회귀.
사건을 한 번 겪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단 1화 만에 잘도 받아들이던데 시현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직업이 의사, 그것도 정신과 의사였다.
천상 이과 체질에 성인이 된 이래 의학 공부만 열심히 해오던 그가 이런 상황에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꿈을 꾸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자신이 깊은 무의식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고.
결과는 참담했다.
쪽팔림이 극에 달하면 수치사도 가능하겠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질병을 의심했다.
조현병이나 망상장애.
아니면 기질성 뇌질환에 의한 환각.
삼아대병원 정도면 국내에서 온갖 희귀한 케이스들을 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시현이 알고 있는 어떤 질환으로도 지금 겪는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이것이 이해의 영역인가 싶지만, 일단 두 가지 가설을 생각했다.
첫 번째, 1년차 천시현이 앞으로 4년간 일어날 모든 일들을 꿈속에서 미리 경험했다.(예지몽 가설)
두 번째, 4년차 천시현이 그간 획득한 모든 경험과 정보를 1년 차 천시현에게 전달했다.(지식전이 가설)
‘오! 이렇게 생각하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룻밤 사이에 앞으로 4년간의 모든 일을 예측하여 경험하는 것은 인간의 연산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게다가 뇌에서 뇌로 지식을 직접 전달하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특히 이 경우는 시공간을 넘어야 전송해야 하는 난제가 있다.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자.’
한참의 생각 끝에 시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평소 즐겨보던 웹소설에 지겹도록 등장하는 설정이 아니던가.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는 건 그냥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소설의 장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시현이 살았던 이전의 삶을 원작이라고 한다면 너무도 현실적인 메디컬 소설쯤 될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금은 4년 전으로 돌아온 상황이니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이야기의 기본 장르는 판타지가 될 것이다.
그것도 회귀물.
이왕 이렇게 된 거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특성 파악이 먼저인가?’
회귀물의 주인공들이 단기간에 폭풍 성장을 하는 이유.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과 자신의 장점을 절묘하게 활용하여 초반부터 스노우볼을 굴리기 때문이었다.
가령 좋은 기억력이 장점인 주인공이 숨겨진 아이템들을 확보하여 미리 광속 렙업을 해두고 얼마 후 발생하는 극상 난이도 퀘스트에 대비하는 식.
이전 회차에서 모은 돈을 그대로 계승하여 처음부터 999,999,999 골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한다던가 지금은 별 볼 일 없지만, 나중에 거물이 되는 인물과 미리 연을 맺어두는 것도 흔한 전개였다.
‘내 특성은…….’
시현은 가운 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던 수첩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일단 회귀자로서 자신의 특성을 적어보기로 했다.
강점과 약점 그리고 위험과 기회.
일종의 캐릭터 분석이었다.
[강점]
- 앞으로 4년간 진료하게 될 환자들에 대한 정보
첫 줄부터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만으로도 큰 시행착오 없이 레지던트 과정을 무사히 수료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설마 이게 끝?’
한참을 생각했으나, 시현의 기대와는 다르게 막상 적으려니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발등에 붙은 불을 끄며 열심히 병원 생활을 한 것 말고는.
‘강점은 차차 생각하고 우선은 주의할 점, 약점부터…….’
[약점]
- 병원 내 의사들 가운데 가장 낮은 서열
- 병원 업무 외 세상 물정에 어두움
- 병원 직원 외 별다른 인맥 없음
- 환자 진료 외 특수 능력 없음
[위험]
- 수면 부족
- 만성피로
- 저질 체력
[기회]
- ???
강점은 꼴랑 한 줄에 안 좋은 점들은 찾자니 끝이 없었다.
시현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져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동 벽에 붙어있는 레지던트 당직표가 눈에 들어왔다.
‘이걸…… 내가 어떻게 했지?’
최소 주당 100시간 이상.
그것도 보수적으로 잡았을 때 이야기다.
뭣 모르던 시절에나 가능했지 전문의 시험 목전까지 갔던 시현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1년차를 또 해야 하다니.
전역을 이틀 앞둔 말년 병장이 신병교육대에서 눈을 떴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 정도면 사기캐가 아니고 사기를 당한 것 같은데.’
시현이 새로 만들어갈 이야기는 일반적인 회귀물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망연자실한 시현을 향해 김석용이 말을 걸어왔다.
“아, 아닙니다.”
“CT 판독 확인해봤는데 별 이상은 없어 보이더라. 지금까지 나온 혈액검사 결과도 괜찮고.”
결론적으로 어떤 이상 소견도 관찰되지 않았다.
뇌혈관은 깨끗했고 급성 뇌출혈이나 감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우선은 괜찮긴 한데…… 혹시 머리 아프거나 어지러우면 이야기 바로 해줘.”
“지금은 좀 나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일단 일일 환자 명단부터 만들자. 최근에 진단명이 바뀐 환자들 있으면 명단에 반영해야 해.”
김석용이 차근차근 할 일을 설명해주었다.
“혹시 힘들면 이야기해. 오늘은 내가 할 테니까.”
“아닙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시현은 빠르게 현실감을 찾아갔다.
상황이야 어쨌든 레지던트 일이라는 게 그렇다.
내가 아니면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꿈이건 생시건 선배인 김석용에게 또는 동기인 황진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곧바로 입원 환자들의 차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타다닥- 타다다닥-
동시에 엑셀 파일을 열어 입원 환자 명부를 작성하고 전날 내원했던 응급 환자들의 진단명을 채워 넣었다.
어디서 많이 해본 듯한 솜씨였다.
“여기 있습니다.”
“벌써? 대충 한 건 아니지?”
명단을 건네자 김석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최근 기록 확인해서 진단명 수정했습니다. 903호 김갑숙 환자분 최근에 부신 종양 발견되어서 발견 되어서 R/O Anxiety Disorder Due to Pheochromocytoma로 변경했고 905호 김기수 환자는 순환기 내과 컨설트 확인해서……”
시현의 설명에 김석용의 눈이 커졌다.
‘짧은 시간에 이걸 다?’
정신과 진단에는 일종의 문법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정신의학회에서 편찬한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SM).
진단명과 함께 증상의 심각도, 원인 그리고 경과에 대한 부분까지 포함되기에 능숙하게 사용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제법 일이 익숙해진 2년차 김석용 또한 차트 내용에 맞춰 진단명을 제대로 쓰려면 진단 분류 책자를 따로 봐야만 했다.
김석용은 환자 차트와 시현이 입력한 진단명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Schizophrenia, Paranoid type, Episodic With No Interepisode Residual Symptoms]
몇 번 재발하기는 했어도 중간에는 아주 잘 지냈던 조현병 환자.
[Bipolar I Disorder, Most Recent Episode Manic Severe Without Psychotic Features]
심한 조증으로 입원했지만 정신병적 증상은 없는 조울증 환자.
[Alcohol-Induced Sleep Disorder With Onset During Withdrawal]
그리고 음주와 관련된 수면 문제를 주로 호소하던 환자.
‘지적할 게…… 없어?’
되려 기존에 잘못 기술된 부분까지 말끔하게 고쳐져 있었다.
“혹시 추가하실 부분이 있을까요?”
사실 시현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문의 시험 직전이라 정신과 진단체계를 달달 외우고 있었기 때문.
차트를 쭉 훑어본 것만으로도 진단명 입력은 금세 끝났다.
“아, 아냐. 명단은 이대로 나가면 되겠다. 교수님들 오시기 전에 치프 선생님이랑 병동환자 리뷰 먼저 할 거야. 아직 담당 환자 없어도 다른 선생님 환자들 약물 들어가는 거 한번 살펴봐.”
“네. 902호 환자분 소화 불량 호소하셔서 담당 선생님께 연락드리고 오늘부터 fluoxetine 감량하고 mosapride 5mg TID 추가했습니다.”
‘이 녀석 뭐지?’
아침부터 엉뚱한 소리를 해대서 걱정했는데 의외로 일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잘하는 축에 들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김석용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었다.
“그래. 천시현 일 잘하네. 아침엔 왜 그랬던 거야?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일이 있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죽었다가 깨어났으니까.
김석용의 손에 이끌려 급하게 응급실부터 가느라 미처 어제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던 트럭과 마지막 환자가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자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 환자가 했던 말들…… 정말 망상이 아니었던 걸까?’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환자가 아닌 인간 정문수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얼마나 답답한 의사였을 지도.
‘비슷한 상황이 또 찾아온다면…… 그때는 잘 할 수 있을까.’
때가 되어 전문의 시험 직전까지 갔을 뿐, 한편으론 환자를 보는 눈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별일 없었습니다. 첫날이라 그런지 꿈자리가 좀 사나웠던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시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김석용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오늘은 회진 준비 빨리 끝나서 여유가 좀 있네. 나 잠깐 환자 좀 보고 올게. 이따가 회의실에서 보자.”
“저, 선생님.”
시현이 병실을 향하는 김석용을 불러 세웠다.
“응? 왜?”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김석용은 ‘이번에도’라는 말에 살짝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앞으로 잘해보자.”
김석용의 말에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물론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
“참, 회진 끝나고 같이 해야 할 일들이 좀 있는데. 4년차 선생님들 연구 설문지 엑셀 입력이랑 외래 환자 통계 작성하고 그리고…….”
“…….”
소설 속 회귀자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앞으로 또 다른 4년을 헤쳐 나갈 일이 막막했지만,
일단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묘한 위안을 얻은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