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Chapter 2. 다시 첫 회진(1)
철컥.
회의실 문이 열리고 선배 레지던트들이 들이닥쳤다.
“오, 1년차 선생님들 오늘 첫 출근인가? 감회가 새로운걸.”
치프 레지던트, 4년차 김민홍이 스테이션에 앉은 천시현과 황진호를 보며 말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황진호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90도로 인사를 했다.
시현도 얼떨결에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래. 환자 보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열심히만 하면 돼?”
누군가 불쑥 끼어들어 김민홍의 말허리를 잘랐다.
김민홍의 동기, 레지던트 4년차 최지훈이었다.
일견 후덕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입만 열면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인물이었다.
뭘 잘못 말했나?
황진호가 멍한 표정으로 최지훈을 바라보았다.
“열심히만 하지 말고 무조건 잘해. 알겠어?”
“네! 열심히…… 아니, 잘하겠습니다!”
‘저 사람이 있었지.’
그의 등장에 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뒤치다꺼리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야. 얘들 사고 치지 않게 석용이가 잘 봐줘.”
“잘 챙기겠습니다.”
잠재적 범죄자 취급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뒤치다꺼리는 무슨. 도움 준 적도 없으면서.’
하마터면 실소가 터질 뻔했다.
“밤새 병동에 별일 없었고?”
“네, 담당 환자분들 대체로 잘 주무셨고 약물 부작용 호소도 없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김석용이 대답했다.
최지훈의 스타일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일은 그렇게 시켜대면서 윗년차로서 책임질 일은 극도로 꺼렸다.
문제가 생기면 매번 나 몰라라 하기 일쑤.
본인 환자라도 열심히 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1, 2년차들에게 담당 환자 상태를 묻는다.
그걸로 회진 준비 끝이었다.
“그래. 아마 별일 없었을 거야. 어제 다 체크 했으니까.”
최지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얄밉다.
그간 그에게 당한 것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빠져 있던데요?”
“어? 방금 뭐라고 했어?”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그가 되물었다.
“담당 환자분 CBC(전혈구 검사) 오더가 하나 빠져있어서 아침에 추가했습니다.”
시현이 대답하자 모든 레지던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CBC? 어떤 환자 말하는 거야?”
“정영만 환자입니다. 최근에 clozapine 투여 시작한 분입니다.”
조현병 치료제 clozapine.
효과는 모든 항정신병약물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드물게 무과립구증이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생하는 약물이었다.
때문에 주기적인 혈액검사가 필요한 약이기도 했다.
“그 환자 이번 주에 검사했는데 피를 또 뽑았다고? 1년차 첫날부터 사고 칠래? 검사 가이드라인이나 알고 지껄이는 거야?”
최지훈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내가 불필요한 검사 싫어하는 거 몰라? 그건 환자분에 대한 실례…….”
“꼭 필요한 검사로 생각되어 추가했습니다.”
시현이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너 clozapine 시작할 때 혈액검사 스케쥴 한 번 읊어봐.”
“무과립구증 예방을 위해 첫 18주 동안은 매주 1회 그리고 그 이후로는 매월 1회 이상 CBC를 체크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시현의 말에 치프 김민홍을 비롯한 다른 레지던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방해본 적이 없을 텐데?’
기본적으로 난치성 조현병 환자들에게 제한적으로 투여되는 약물인 만큼 레지던트들도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잘 알면서! 그럼 대답해봐. 이 환자, 이번 주 검사는 이미 했는데 왜 또 나간 거야?”
“최근 검사에서 WBC가 3,500, ANC는 2,000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이 경우 투약을 중단할 필요는 없지만, 혈구 수치가 안정화되거나 증가할 때까지 매주 2회 검사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가이드라인을 따른다면 주 1회가 아닌 주 2회 검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막힘없는 대답에 다른 레지던트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바로 전날 밤까지 호텔 방에서 달달 외웠던 내용이니 그럴 수밖에.
“…….”
반면 최지훈은 말문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이, 이 자식이…….’
“혹시 불필요한 검사라고 생각되시면 지금이라도 취소하겠습니다. 환자분께도 사과드리고요.”
1년차에게, 그것도 사고 치지 말고 잘 좀 하라던 그 1년차에게 첫날부터 망신을 당해 버렸다.
분위기가 몹시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옆에서 은근히 미소를 짓고 있는 다른 레지던트들의 표정을 시현은 놓치지 않았다.
철컥.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 황급히 회의실로 들어왔다.
흰 셔츠에 단정한 넥타이 차림이 잘 어울리는 세련된 분위기의 중년 의사였다.
“과장님 오셨습니까?”
레지던트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를 맞았다.
“이런, 늦어서 미안합니다. 오다가 접촉사고가 있었지 뭐야.”
정신과 과장이자 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 이광섭이 이마에 땀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긁힌 정도라 뭐. 오늘은 환자 먼저 보고 나서 디스커션 합시다.”
“네, 과장님!”
“과장님, 여기 환자 명단 있습니다.”
김민홍이 손짓하자 인턴이 명단이 꽂힌 차트판을 이광섭에게 건넸다.
근무 첫날 회진 담당 교수의 지각.
후다닥 달려나가는 인턴의 뒷모습.
모든 것이 예전 기억과 같았다.
그렇게 첫 번째 회진이 시작되었다.
* * *
익숙한 모퉁이를 돌아 첫 번째 병실.
3월 초라 그런지 특히 더 어리바리한 인턴이 병실 문을 열어젖히며 앞장을 섰다.
‘가이드를 하는 건지 길막을 하는 건지.’
원활한 회진을 위해 인턴이 의료진을 가이드 해야 하는데…….
번번이 막아서는 인턴 때문에 이광섭은 아까부터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레지던트들의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으나 인턴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색한 동선을 이어나갔다.
‘저 인턴이 무슨 과를 했더라?’
레지던트로 병원에 남았으면 분명 기억이 날 텐데.
아닌 걸 보면 십중팔구 인턴 수료 후 군의관이 되었을……. 아니, 군대에 끌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주말에 집으로 외박 다녀오셨지요? 어떠셨나요?”
“네 아주 좋았습니다. 가족들도 좋아하고요. 오늘 퇴원 수속 하러 온다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네, 외래에서 뵙겠습니다.”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오늘 퇴원하는 모양이었다.
근무 첫날 퇴원하는 환자라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
이광섭은 환자와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다음 병실로 향했다.
“선생님, 저는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퇴원하면 안 되나요? 기분이 아주 차분해졌어요. 짜증도 전~혀 안 나요.”
상당히 들뜬 얼굴로 퇴원을 요구하는 환자.
이 환자는 몇 시간 뒤 점심시간에 옆 방 건장한 남자환자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역으로 쥐어 터지게 된다.
‘밥 먹다 말고 이 환자 때문에 병동으로 뛰어갔었지.’
당시에 못다 먹었던 돈가스 두 조각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시군요. 이따 치료진 회의 때 상의해보겠습니다.”
이광섭의 ‘상의’는 사실상 거절에 가까웠다.
아직 입원 치료가 더 필요하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도 있었으나 이광섭은 환자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돌려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1년차 초반에는 이런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실수로 환자를 퇴원시킬 뻔한 적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회진을 돌다 보니 익숙한 환자들도 제법 보였다.
퇴원 후에도 지속적으로 외래진료를 받는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경과가 좋아 재처방 위주로 나가는 환자들도 있었지만, 퇴원 후에도 증상이 수시로 재발하여 외래에서 애먹는 환자들도 보였다.
903호 병실 창가 쪽 병상에 걸터앉아있던 중년 남자환자가 그랬다.
[정삼태 남/53 담당의 R2 김석용/ 담당 교수 Prof. 이광섭]
‘이 사람 김석용 선생님 환자였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퀭한 눈.
수시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불안한 시선.
시현은 환자의 모습을 보며 가운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환자들은 식사를 마치고 침상에 앉아 있는 반면 정삼태는 아직도 수저를 달그락거리며 밥을 먹고 있었다.
“환자분, 회진 마치고 식사 마저 하시면 안 될까요?”
“지금 나더러 밥도 먹지 말라는 소리야?”
환자는 회진 전에 병상을 정리하려는 인턴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정삼태님, 오늘은 기분이 어떠세요?”
“교수님, 직원 관리를 좀 잘 하셔야겄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광섭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아가씨가 아까부터 계속 내 욕을 하고 다니는디 못 들으셨단 말이오?”
환자가 회진을 돌고 있는 의료진 사이에서 한 간호사를 지목하며 말했다.
“저는 못 들었는데 뭐라고 하던가요?”
“빌어먹을 놈의 x끼가 또 입원했다고 나가 죽으라고 합디다.”
환자의 주증상은 환청과 피해망상이었다.
“저런. 그렇게 들으셨군요. 회진 마치고 더 알아보지요.”
이광섭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차분히 환자의 말을 들어주었다.
다행히 환자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듯했고 이광섭 교수도 다음 환자의 병상으로 향했다.
와장창.
환자가 트레이를 바닥에 내던진 것은 그때였다.
“저 x이 아직도 내 욕을 해!”
환자는 순식간에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간호사의 목덜미를 잡았다.
“죽어!”
놀란 간호사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환자는 손에 든 젓가락으로 간호사의 어깻죽지를 내리찍었다.
아니, 내리찍을 뻔했다.
시현이 뒤편에서 환자의 손목을 낚아채지 않았더라면.
“이거 놔 이 새…….”
시현은 환자가 돌아볼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발을 뻗어 그의 오금을 찍어 눌렀다.
털썩.
순식간에 환자는 자신이 찌르려 했던 간호사 앞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보호사님! 인턴 선생님!”
환자의 담당의인 김석용이 외쳤다.
순식간에 인턴과 병동 보호사들이 환자에게 달라붙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환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저항했으나 이내 장정 네 사람의 손에 이끌려 안정실로 들어갔다.
“페리돌 한 앰플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시현이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내 김석용에게 건넸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
페리돌은 급성기에 환자 진정 목적으로 근육 주사하는 약물이었다.
방금까지 함께 환자를 붙들고 있던 녀석이 어느 틈에 앰플을 까서 주사기에 담아왔는지 의아했지만, 김석용은 일단 급한 대로 주사기를 넘겨받았다.
푸욱.
김석용이 근육 주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는 진정되어 코를 골기 시작했다.
* * *
“선생님, 고마워요.”
병실에서 환자에게 목덜미를 잡혔던 간호사가 시현에게 말했다.
“별말씀을요. 괜찮으세요?”
“네, 놀란 것만 빼고요.”
“다행이에요. 홑몸도 아니신데…….”
“어, 알고 계셨어요? 벌써 그렇게 티가 나요?”
간호사가 자신의 아랫배를 만지며 물었다.
‘아차.’
배만 보면 아직은 임산부로 보이지 않을 시기였다.
“아뇨. 전혀요. 아까 누가 말씀하신 것 같던데.”
분명 누군가에게 듣긴 들었다.
- 임신 중이라 항생제 먹기가 불안해서요.
정확히는 회귀 전 간호사 본인에게.
그녀는 오염된 젓가락에 찔리고도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염증으로 한참 동안 고생했었다.
“수선생님이 말씀하셨나?”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밝게 웃으며 환자와 이야기하는 간호사의 모습에서 어깨를 만지며 얼굴을 찡그리던 예전 모습이 서서히 지워져 갔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 원치 않은 장면을 보지 않을 권리(+)
시현은 수첩을 꺼내 자신의 강점에 한 줄을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