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Chapter 2. 다시 첫 회진(2)
병실을 다 돌고 난 뒤 치료팀은 다시 회의실에 모였다.
“액팅 아웃(acting out, 부정적인 감정을 폭력적인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이 있었군요. 그 환자는 치료 전략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네, 과장님. 약물 변경 고려하겠습니다.”
“어떤 약으로?”
“Risperidone을 Amisulpride로 교체하겠습니다.”
김석용의 대답에 아주 잠깐 이광섭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별로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광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일단은 그렇게 해봅시다.”
비록 원하는 답이 아닐지라도 담당 레지던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
그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다들 안전에 특히 유의하세요. 치료팀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치프는 신규 1년차 선생님들 특히 잘 챙겨주고.”
“네, 과장님.”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그렇게 첫 번째 회진이 마무리되었다.
병동 간호사들도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레지던트들끼리의 디스커션이 이어졌다.
“날마다 이런 건 아니니까 안심해. 절대로 도망가면 안 된다.”
치프 김민홍이 1년차 두 사람을 보며 웃어 보였다.
“첫날부터 이런 모습이나 보이고 뭐하는 거야?”
“…….”
훈훈한 분위기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었다.
“석용아, 환자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아? 입원한 지 2주가 넘었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으면 되겠어?”
역시나 김민홍의 동기, 4년차 최지훈이었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제 2년차잖냐. 환자 대충 보지 말고 진짜로 열심히 좀 해. 나 때는 환자가 이 지경에 되면 집에도 못 가고…….”
계속되는 질책에 김석용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걸 또 봐야 하나.’
풀이 죽어있는 그의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환자를 대충 본다고?
천만에.
삼아대병원을 통틀어 김석용만큼 성실한 레지던트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환자가 빨리 좋아지지 않는 것도 증상이 심해서일 뿐 담당의 탓으로 보기 어렵고.
‘선생님도 여전하시네요.’
시현은 싸늘한 시선으로 최지훈을 바라보았다.
책임감 운운하면서 주니어들을 공격하면 본인의 권위도 살고 패널티랍시고 일도 내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 믿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듣고 있는데 최지훈이 돌연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천시현 선생.”
“네?”
뜬금없이 무게를 잡는 말투에 시현이 되물었다.
“도대체 개념이 있어? 난폭한 환자는 여럿이서 같이 안전하게 제압하는 게 원칙이야. 자기 보호가 기본인데, 그렇게 혼자서 무작정 나섰다가 다치면 되겠어?”
“…….”
이건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인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걱정되면 환자 강박할 때 팔 한쪽이라도 잡아주던가.’
막상 여럿이서 낑낑거리며 환자를 옮길 때는 병실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만 보던 그였다.
- 환자가 간호사를 찌르는데 1년차라는 것들이 바로 옆에서 구경만 해? 임산부라 약도 제대로 못 쓴다는데 얼마나 아프겠어? 공감 능력이 없는 거 아냐?
회귀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어느 쪽이든 결국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지.’
뭘 몰랐을 때야 저런 말들에 죄책감도 느끼고 상처도 입었겠지만 지나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그저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딴 식이라는 걸.
특히나 김석용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지훈아, 살살 해. 1년 차들 주눅 들겠어. 다친 사람 없으니까 괜찮아.”
보다 못한 김민홍이 최지훈을 만류했다.
“민홍아. 맨날 너는 좋은 말만 하고 악역은 내가 맡으니까 나만 맨날 나쁜 사람 되잖아? 그래도 어떡하겠어? 나라도 이런 말을 해야 의국에 기강이…….”
최지훈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악역은 무슨.
그냥 악당이지.
‘이번엔 좀 다를 겁니다.’
시현은 그를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1년차들은 아직 환자 없어서 심심할 수도 있는데, 내일부터 새로 입원하는 환자들 중에서 환자 배정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요. 병동에 자리는 있나?”
“두 분 퇴원 예정입니다. 외래에서 입원 대기 중인 분들이 내일 입원할 예정입니다.”
김석용이 대답했다.
“마침 잘 됐다. 누가 먼저 볼래?”
“제가 먼저 보겠습니다.”
시현이 선뜻 손을 들었다.
‘순서만큼은 예전과 같아야 해.’
병동이나 응급실에서 환자가 입원하면 1년 차 두 사람이 교대로 환자를 받는다.
만약 첫 단추부터 어긋난다면?
앞으로 시현과 황진호가 보게 될 환자들이 과거와 정반대로 바뀔 수 있었다.
“좋아. 아주 의욕적인데? 그럼 다음 환자를 진호가 보자.”
“네, 알겠습니다.”
아까부터 황진호는 꽤나 긴장한 기색이었다.
인턴 때도 환자들은 많이 보긴 했지만, 담당의로서 환자를 받는 것은 책임감이 달랐다.
“황진호 선생,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초반에는 내가 환자 오더랑 다 봐줄 테니까 열심히만 하면 돼.”
“네, 감사합니다.”
김민홍이 황진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보통 이 기간에는 4년차 레지던트가 1년차들의 입원 환자에 대해 보고받고 슈퍼비전을 해준다.
임상 경험이 부족한 1년 차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시니어 레지던트가 가르치고 도와주는 것.
“천시현 선생은 최지훈 선생님이 봐줄 거야.”
이번에도 치프 김민홍이 황진호, 최지훈이 시현을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김민홍과 함께 환자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이라면 저 최지훈에게 호락호락 당하고만 살지는 않을 테니.
“내가 딱히 봐줄 게 있을까? 아까 보니까 아는 것도 많고 혼자서도 아주 잘~할 것 같던데.”
최지훈이 이죽거렸다.
‘건방진 놈. 그래 봐야 1년 차지.’
임상 경험.
실제 환자를 보며 쌓은 경험은 의과대학 공부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1년차라도 그저 그런 2년차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이쪽 세계의 상식이었다.
지금이야 글로 배운 지식에 심취해서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있을 뿐.
머지않아 무릎 꿇고 울면서 조언을 구할 시현의 모습을 상상하며 최지훈이 입꼬리를 올렸다.
‘혼자서도 잘 할 테니 방해나 안 했으면 좋겠네요.’
레지던트 4년 차라고 해봐야 전문의 시험공부를 모두 마친 시현의 수준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게다가 시현은 앞으로 몇 년간 발표될 최신 지견들까지 모두 섭렵한 상태.
그 차이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잔뜩 벼르고 있나 본데. 그래 봐야 레지던트 수준이지.’
그런 최지훈을 보며 시현 또한 웃어 보였다.
* * *
다음 날 오후.
김석용이 말한 대로 2명의 환자가 새로 입원했다.
시현은 자신의 첫 번째 담당 환자 차트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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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여/22세 담당의 R1 천시현 / 담당 교수 Prof. 진철영]
주된 문제
1. 감소된 수면 욕구
2. 소비 증가
3. 과민한 기분
(onset : 3주 전)
상기 환자는 정신과적 과거력 없는 분으로 환자 및 보호자에 의하면 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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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외래진료에서 입원 처방을 받은 환자였다.
시현은 환자가 외래에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병동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모든 기록을 샅샅이 살폈다.
초진 차트에 적힌 내용들을 보니 환자는 그가 4년 전 진료했던 그 상태 그대로였다.
‘심한 바이폴라(Bipolar disorder, 양극성 장애) 환자였었지.’
양극성 장애.
흔히 조울증으로 알려진 이 병은 우울한 기간과 들뜬 기간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질병이다.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에게 조울증 있냐는 말을 농담처럼 하지만 의학적인 조울증은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몇 주 이상 지속되는 기분 변화를 보이기도 하며 심하면 입원 치료가 필요할 정도.
특히나 급성 조증 시기에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말하고 다닌다거나 감당할 수 없는 지출을 하기도 하고 잠을 자지 않고 돌아다니는 등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시현의 첫 환자, 김수영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심한 조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였다.
“선생님, 보호자가 잠깐 뵙자고 하시는데요. 지금 병동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네, 알겠습니다.”
환자 먼저 면담하고 보호자를 나중에 보는 것이 원칙이지만, 환자와 면담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보호자들로부터 정보를 얻기도 한다.
- 요즘 돈 씀씀이가 감당이 안 돼요. 마이너스 통장을 거의 한도까지 다 쓰고… 기획사 연습생이 무슨 돈을 번다고…….
- 밤에 자지도 않고 새로운 안무 동작이 떠오른다고 밤새 춤을 췄어요.
- 데뷔만 하면 다 갚을 수 있다고 덜컥 방송국 근처에 집을 계약했다는데 이거 어떻게 취소 안 될까요?
불현듯 보호자들의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김수영님 보호자 되십니까?”
“아, 선생님이시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병동을 나서자 익숙한 두 사람이 시현을 맞았다.
“우리 수영이 괜찮을까요? 평소랑 완전히 딴판이 되어가지고…… 그렇게 착한 애가 갑자기 왜…….”
완전히 달라진 환자의 모습에 보호자들이 받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은 안심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상황.
하지만 병원에서 금세 좋아질 거란 말을 듣기란 쉽지 않다.
너무 낙관적으로 이야기했다가 상태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비난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
그래서 환자의 경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늘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시현의 대답은 다른 의사들과는 조금 달랐다.
“조증 삽화 동안 보이는 증상은 ‘일시적’이니까요. 김수영님의 경우에는 6~8주 정도가 걸릴 겁니다. 최대한 단축해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분명 나아질 거라는 확신마저 느껴지는 태도였다.
첫 환자였던 만큼 김수영의 경과는 유독 기억에 남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조울증은 유지치료가 중요한 질환입니다. 퇴원 후에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보호자님도 힘을 내셔야 합니다. 입원 치료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오늘은 푹 쉬세요.”
시현의 설명에 걱정으로 울먹이던 환자 어머니의 표정이 누그러지는 듯했다.
‘환자 어머니도 우울증이 있었어.’
딸의 경과에 따라 보호자의 우울증도 재발을 반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따지고 보면 환자가 둘인 셈.
보호자들을 돌려보낸 뒤 시현은 병동으로 돌아왔다.
일단 최대한 안심할 수 있도록 설명하긴 했지만, 김수영이 결코 쉬운 환자는 아니었다.
사실 어려운 편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일단 병동에서의 행동 문제가 심했다.
기분 좋게 웃다가도 매일같이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고 다른 환자들과 다투다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약물 반응도 좋지 않았지.’
진정효과가 강한 약물들을 최대용량까지 쓰고 그걸로도 모자라 수차례 안정제를 주사했다.
그런데도 조증이 한풀 꺾이기까지만 4주가 걸렸다.
환자를 만나기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 * *
병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수영은 환자복도 거부한 채 밖에서 입던 옷차림 그대로 침상에 걸터앉아있었다.
다소 큰 키에 마른 체형.
짙은 핑크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
큰 눈에 새하얀 피부.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귀여운 인상.
정신상태검사(Mental status examination)의 일반적 기술에 적힐 법한 내용들이었다.
‘예전 그대로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마치 바비인형 같은 외모랄까.
하지만 여리여리한 인상과는 다르게 결코 만만치 않은 환자였다.
시현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안녕하세요? 병동 담당의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병동? 엄마 아빠 당장 불러! 저녁에 기획사 미팅 잡힌 게 몇 갠 줄 알아? 그리고 의사는 상태가 왜 이래? 여긴 직원 얼굴 안 보고 뽑나봐?”
“…….”
인형이 말을…… 아니 욕을 해요.
상담도 약물치료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던.
첫 담당 환자가 세상 아니꼬운 얼굴로 그를 맞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