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Chapter 3. 이번엔 다르게 (1)
“빨리 보호자 부르라고! 내 말 안 들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 뒤로 퇴원 무렵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 그때 정말 죄송했어요. 내가 미쳤지 정말…… 앞으로 어떡하죠? 부끄러워서 밖을 못 나가겠어요.
대부분의 조증 환자들이 그렇듯 그녀 또한 입원 전후로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후회하며 우울해했다.
‘흑역사는 적을수록 좋겠지.’
조증 기간은 최대한 줄이고 퇴원은 빠르게.
이번 회차에서 시현이 잡은 목표였다.
가수가 꿈인 환자인 만큼 지금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 좋을 일은 없었다.
“외래 선생님께 듣기로 최근에 기분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은 어떠세요?”
“나 내보내 달라고! 지금 당장! 이거 불법 감금이야!”
제대로 면담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김수영은 고래고래 소리부터 질렀다.
“지금은 입원 치료가 꼭 필요합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빨리 좋아지실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무슨 정신병자야? 좋아지긴 뭐가 좋아지는데? 내가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래?”
그녀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과거에는 이 실랑이가 길어지자 병동에 있던 최지훈이 김수영을 안정실로 옮겨 강박하도록 한다.
‘불려가서 야단 깨나 맞았었는데. 급성기 환자 그렇게 보는 거 아니라고.’
아니나 다를까 최지훈이 벌써 병실 문 밖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 그때 저 너무 무서웠어요. 원래 좁은 곳에 들어가면 숨이 막히는데……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당장은 편한 방법일지 모르지만, 폐소 공포증이 있었던 그녀에게는 트라우마가 됐던 일이었다.
‘다른 방법이…….’
명백한 급성 조증 상태.
면담의 달인이 온다 해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당장!”
흥분한 김수영이 시현을 향해 핸드백을 던지며 소리쳤다.
소지품들이 열심히 바닥을 굴렀다.
“천 선생! 지금 뭐 하는 거야? 환자 당장 안정실로…….”
결국 최지훈이 시현을 나무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여기까지.
회귀 전과 정확히 일치하는 전개.
시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도 별수 없나?’
썩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과거 최지훈이 했던 대로 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또르르르.
툭.
바닥을 구르던 무언가가 시현의 발끝에 와 닿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비타민 병.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시현의 뇌리를 스쳤다.
‘혹시 이거…….’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약병을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예요? 그, 그거 이리 내요!”
다음 순간, 김수영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빙고.
“이런 건 보관을 잘하셨어야죠.”
시현이 약병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자 환자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제가 한번 맞혀볼까요? 왠지 구하기 힘든 ‘귀한 약’이 들어있을 것 같은데.”
“…….”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것으로 알겠습니다. 병동 면담실에서 뵙죠.”
시현이 매서운 눈빛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바로 옆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환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전까지 고성을 지르던 사람이 맞나 싶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
그 모습에 최지훈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안정제 주사하고 restrain(강박) 해야 할 환자인데… 어떻게?’
병실에서의 짧은 면담만으로 조증 환자를 진정시키다니.
그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같은 병실에 있던 간호사들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천시현 선생, 방금 환자한테 뭐라고…….”
“별말 안 했습니다. 잠시 후에 상담실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혹시 뭐가 잘못됐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그럼 저는 면담하러 가보겠습니다.”
병실 복도를 가로질러 면담실로 향하는 시현의 뒷모습을 최지훈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 *
잠시 후 면담실.
시현은 김수영의 외래 차트를 열고 추가 처방을 입력했다.
[Naltrexon 25mg HS]
날트랙손.
항갈망제의 일종으로 알코올 및 마약류 의존 치료제였다.
- 예전 회사에서 데뷔 준비할 때 압박감이 너무 심했어요. 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다이어트 약은 꼭 챙겨 먹도록 했었다니까요? 사람을 말려 죽이려는 건지…….
외래에서 2년에 걸친 유지 치료를 종결하면서 그녀가 했던 말들이었다.
‘다이어트 약이라면…….’
대부분이 각성제에 가까운 약물들.
덕분에 배고픔도 잊고 늦은 시간까지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조증이 악화되어서 결국 입원까지 하게 됐으니까.’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수영은 데뷔 전 펜터민, 플루옥세틴, 토피라메이트 그리고 해외 직구로 어렵게 구한 암페타민 계열의 다이어트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나마 펜터민이나 토피라메이트는 처방전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약물인 반면, 암페타민 계열의 경우 법적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벌컥.
“어떻게 안 거예요?”
면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김수영이 다짜고짜 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지금 이 순간만을 놓고 본다면 조증이 아니라 불안장애 환자 같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시현이 짐짓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래에서 당신이 말해줬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시현의 반응을 본 김수영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 돼. 절대로! 혹시라도 누군가 알게 되는 날에는…….’
아무리 급성 조증 상태라고 해도 그녀는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데뷔 전부터 마약 사범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이대로 무너져버리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시현의 태도였다.
약병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
신고도 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자신을 따로 부른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원하는 게 뭐예요? 혹시 돈인가요?”
김수영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시현은 모니터만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일단 다이어트약은 복용하지 못하도록 하면 될 것 같고. 금단 증상을 최소화하려면 처방은…… 담당 교수님께 보고는…….’
사실은 입원 중에 약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느라 잠시 말을 놓친 거였지만, 영문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초조하게 시현의 반응을 살폈다.
‘약병도 빨리 찾고 운이 좋았어.’
환자는 더 빠르게 회복할 것이며, 앞으로의 경과도 더 좋아질 것이다.
이번만큼은 첫 환자로 인해 마음고생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래에 환자와 나눴던 대화 몇 마디가 상황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
시현은 이내 미소 띤 얼굴로 환자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을 살피던 환자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뭐, 뭐야? 원하는 게 돈이 아니라면…….’
음흉하다 못해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 저 표정.
‘서, 설마 원하는 게 내…….’
김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앞섶을 여미며 몸을 웅크렸다.
“저, 환자분 어디 불편하세요?”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뭐지?
피해망상인가?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자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한 시현이었다.
* * *
‘어떡하지.’
면담실을 나온 김수영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입원하게 된 것만으로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지고 있던 약까지 빼앗겨 버렸다.
그것도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약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병동에 들어와서는 약을 먹은 적도 없다. 실수로 흘리거나 한 것도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 네? 제가 원하는 거요? 뭐…… 처방해드린 약 꾸준히 잘 드시고 병동 규칙을 잘 지켜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원하는 게 없냐고 재차 물었을 때 담당 의사의 반응.
일단 돈을 원하는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
자신에게 흑심을 품고 접근해 온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짓던 그 모습만큼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사람 속은 모르는 거니까.’
순진한 척 기회를 보다가 돌변해서 갖은 협박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확실한 건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기간만큼은 최대한 시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지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 * *
며칠 뒤, 9병동 회의실.
오늘 전체 회진 담당은 진철영 교수였다.
“다들 환자 잘 보고 있나?”
그가 회의실 테이블에 앉은 레지던트들의 면면을 살폈다.
“담당의들 얼굴이 좋은 걸 보니까 병동에 별일 없는 것 같다. 병실부터 돌자.”
그는 종종 레지던트들로부터 환자에 대해 보고받는 것을 생략하고 회진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형식적으로 교수가 얼굴만 비추는 회진이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길오씨는 이번 주에 퇴원하시나요? 불안이 많이 가라앉았으니 이제 괜찮을 겁니다. 외래에서 또 보십시다.”
증상이 호전되어 퇴원을 앞둔 환자에게는 격려를.
“삼태씨는 좀 더 입원하셔야 하겠네.”
“교수님, 저 많이 좋아졌어요.”
“알아요. 그래도 며칠 더 있어 봅시다. 그리 오래 안 걸릴 겁니다.”
며칠 전 행동문제가 있었던 환자에게는 단호한 메시지를.
“수영씨는 외래에서 봤을 때랑 완전 딴판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예상외로 크게 좋아진 환자에게는 의외라는 반응을.
사전 보고가 없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철영은 환자 상태를 정확히 짚어냈다.
그의 직관력은 다시 봐도 놀라운 경지였다.
‘괜히 진도사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회귀 전 1년차였을 때는 회진이 빨리 끝나 좋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어떻게 하면 저런 판단이 나오는지가 궁금해졌다.
“환자들은 다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902호 김수영 환자는 며칠 사이에 많이 좋아졌네?”
진철영이 시현을 보며 말했다.
“무슨 조화를 부린 건가? 비결이라도 있나?”
“환자분께서…….”
시현이 진철영의 질문에 대답하려는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우선 Depakote와 Zyprexa로 약물 시작했고 입원 당일부터 클로나제팜을 충분히 쓰도록 했습니다.”
4년차 최지훈이었다.
‘뭐? 쓰도록 해?’
시현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가 들으면 1년차 티칭을 세상 그 무엇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인 줄 알겠네.
“그래서 좋아진 게 맞을까…….”
진철영 교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 처방을 계속 유지할 생각인 건가?”
“물론입니다. 원칙적으로 기존에 효과가 있었던 약을 쓰는 것이…….”
최지훈이 자기 환자인 것마냥 대답을 이어가는데.
“담당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은데.”
진철영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현에게 직접 물어왔다.
“저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자 진철영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퇴원 전에 약물 변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현의 대답에 최지훈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