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Chapter 4. 세상의 모든 차트 (1)
갑자기 떠오른 알림창.
스마트 글라스로 증강현실을 경험하면 이런 느낌일까?
마치 베젤이 없고 반투명한 태블릿 PC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첫 환자분 벌써 퇴원하셨어?”
병동에서 차트를 쓰고 있던 김석용이 물었다.
“네? 아, 방금 가셨습니다.”
“고생했어. 빨리 좋아진 것 같은데. 환자 열심히 봤나봐?”
김석용은 격려의 말을 건넬 뿐 알림창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역시나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생생한…… 환각.’
그중에서도 환시가 분명했다.
시현에게 알림창의 내용 따위를 살필 겨를은 없었다.
환시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이었기 때문.
‘조현병, 루이소체 치매, 섬망…… 그리고 뇌전증도 시각 피질에 영향을 주는 경우라면 환시가 있을 수 있겠지.’
며칠 전까지도 전문의 시험을 붙들고 있던 그였기에 환시를 일으킬 수 있는 진단명들이 자동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는 것은 힘도 되지만 병도 된다.
알림창이 떠오르기 전에 생전 처음 경험하는 두통도 있었다.
‘혹시 뇌졸중? 응급으로 MRI라도 찍어봐야 하는 거 아냐?’
뇌졸중(Stroke).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생기는 질환으로 치료가 지연될 경우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질환이었다.
‘잠깐만…… 뇌졸중치고는 너무 멀쩡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른 증상들은 전혀 없다.
의식도 명료했고 감각과 운동에 불편감도 전혀 없다.
어느 것 하나 진단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일단 침착하자.’
시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알림창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 * *
[system : 시스템 활성화에 성공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차트’ 로딩 중]
[차트 내용이 상당 부분 수정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N ]
천시현이 Y를 터치하자 김수영의 의무기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입원 기록(Admission note)은 시현이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
개인력(Personal history)이나 외래 초진 기록 또한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크게 다른 부분은 경과기록이었다.
- HD#30(입원 30일차) 병동에서 소리 지르며 타 환자와 말다툼.
- Quetiapine 600mg로 증량.
‘입원 30일?’
환자는 입원 2주 만에 퇴원한 상황.
다시 말해 지금으로서는 존재할 수 없는 처방이었다.
‘이거 예전 기록이잖아? ‘세상의 모든 차트’라는 게…… 설마?’
자세히 살펴보니 4년 전, 그러니까 회귀 이전의 시현이 작성한 의무기록이었다.
이런 기록들은 글자색이 연한 회색이고 취소선들이 쫙쫙 그어져 있었다.
반면 이번 입원에서 있었던 일들은 정상적인 검정색 글씨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감탄하며 의무기록을 살펴보는 사이 한 환자가 그 앞을 유유히 지나갔다.
‘방금 뭐였지?’
환자가 지나간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시현은 또다시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성규 남/56세 담당의 R2 김석용/ 담당 교수 Prof. 이광섭]
‘허공에 텍스트가?’
환자의 머리 위로 기본적인 인적사항과 담당 의사들의 이름이 떠 있었다.
텍스트 옆에 ‘▼더보기’ 를 터치하자 창이 아래로 확장되었다.
[Lexapro 15mg, Ativan 1mg, Trazodone 25mg HS HAM-D scale* 17점]
‘맙소사.’
이번에는 현재 복용 중인 약물과 우울증의 심각도를 평가하는 심리검사 점수가 보였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치료 진척도 67/100 퇴원까지 7일 2시간 10분 29초]
‘이건 뭐지?’
치료 진척도.
언뜻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항목이었다.
사실 복용 중인 약물과 우울증 심각도는 의무기록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환자가 어디까지 좋아질 수 있고 퇴원까지 앞으로 얼마가 남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의무기록실의 EMR(Electronic Medical Record, 전자의무기록) 서버를 불러온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 혹시 박성규 환자 언제쯤 퇴원하게 되나요.”
마침 환자의 담당의인 김석용이 병동 스테이션에 있었다.
“글쎄? 아직은 모르지. 전보다 좀 더 낫다고는 하시던데…… 혹시 타과에서 전과 오는 환자 있어? 병실 필요하대?”
심지어 담당의도 정확한 퇴원 일정을 모르고 있다.
정신과 질환들은 개인차가 크다.
똑같이 우울증을 진단받았다고 해도 일주일 만에 퇴원하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한 달 이상 입원하는 환자들도 종종 있다.
대략적인 입원 기간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일정을 심지어 분초 단위로 카운트 다운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저,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까 봤던 환자가 김석용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다음 주에 시간이 된다고 퇴원 수속 하러 온다고 합니다.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괜찮겠지요?”
“네. 담당 교수님께 상의 드리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드님께서 언제쯤 온다고 하던가요?”
“다음 주 수요일요. 퇴근하고 오니까 좀 늦을 수도 있겠네요.”
계산해보니 ‘치료 진척도’에 표기된 시간과 거의 같았다.
‘이거 정말 믿을 만한가?’
시현이 의아해하는 사이 또 다른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오늘도 무사히 - 첫 환자가 무사히 퇴원했습니다. 동료 의료진이 안도합니다. (보통 난이도, + 200P)]
[홍보 대사 - 환자가 정신과 치료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정신과에 대한 편견 감소에 기여하였습니다.(보통 난이도, + 300P)]
[고속 퇴원 - 환자의 입원 기간을 3주 이상 단축하였습니다. 높은 병상 회전률은 환자뿐 아니라 병원에도 좋습니다. (어려움 난이도, + 500P)]
[system : 가능한 3개의 업적을 모두 달성하여 포인트가 100% 추가 지급됩니다. (어려움 난이도, +1,000P)]
내용을 확인한 시현의 눈이 커졌다.
‘상태창에…… 보상?’
그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장르는 메디컬 게임 판타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 * *
업적 보상.
보통 게임에서 특정 조건을 충족하여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한다.
1년차로 돌아왔을 때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아보자고 결심한 시현이었지만 눈앞에 떠오른 광경들은 아득히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소설이라고 해봐야 천재 정신과 의사로 거듭나는 회귀물 정도만 생각했지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갔다.
‘애초에 4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인데 이쯤이야.’
그저 모든 것을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
회귀를 받아들이지 못해 안정실 문을 들이받는 실수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포인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세 가지 업적을 달성하여 2,000P를 획득하였는데 이걸 어떻게 쓰는 것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뭐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지.’
이제는 백발의 은둔 고수가 홀연히 나타나 무림비급을 전해주고 간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세상의 모든 차트’라는 시스템이 매우 마음에 들긴 했다.
환자 진료에 꽤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
‘환자 이름이랑 약물 헷갈리지 않아서 좋고 면담하면서 동시에 타이핑 안 해도 되니 좋고.’
편리한 정도가 아니라 가히 사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치료 진척도’나 퇴원까지 걸리는 시간에 대한 정보는 환자에게 시도하고 있는 현재의 치료를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정보였다.
‘치료에 대한 반응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
만약 치료를 잘하고 있다면 진척도는 빠르게 올라갈 것이고, 잘못하는 부분이나 놓치는 부분이 있다면 입원 기간이 연장될 것이었다.
원래라면 새로운 치료를 시작하고 반응을 보기까지 수 주가 걸릴 테지만 이제는 치료 반응평가를 거의 실시간으로 할 수 있게 되는 셈.
‘얼른 다음 환자 보고 싶다.’
새로 얻은 능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몸이 들썩였다.
과거의 4년을 포함하여 처음 경험하는 감정이었다.
때마침 병동 문이 열리고 황진호가 들어왔다.
“환자 벌써 퇴원했어? 좋겠다아…….”
황진호가 부럽다는 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모습이 담당 환자 치료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시현의 기억하기로 황진호의 첫 환자는 피해망상이 심한 조현병 환자였다.
‘먹는 걸 거부했던 환자였는데.’
그는 누군가 자신을 독살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심한 나머지 입원 전부터 음식을 일절 먹지 않았다.
입원 후로도 투약과 수액을 거부하고 있어서 치료할 길이 막막했다.
마침 환자가 스테이션을 지나 화장실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공호 남/29세 담당의 R1 황진호 / 주치의 Prof. 진철영]
환자 머리 위로 텍스트가 떠다니는 광경은 여전히 낯설다.
‘어디 한번 볼까.’
‘▼더보기’를 누르자 추가 정보가 떠올랐다.
원근감에 좀 더 적응해야 할 것 같지만 아무튼 의도대로 터치는 되었다.
[기저질환 :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Risperidone 5mg, Benztropine 1mg, Clonazepam 0.5mg]
[치료 진척도 13/100]
[퇴원까지 32일 23시간 10분 00초]
‘입원 기간은 한 달 정도.’
예전 기억과 일치한다.
입원 후 치료적인 개입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치료 진척도’가 13이나마 오른 것은 환자가 병동을 안전한 곳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자신을 해치려고 마음만 먹으면 자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졌을 터.
일주일 넘게 살아있는 것에 일단은 안심하고 있는 이공호였다.
다만 아직도 음식과 투약에 대해서는 불안이 컸다.
“일단 약이라도…… 아니, 식사라도 좀 하시면 좋을 텐데 방법이 없다.”
황진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철영 교수님은 뭐라고 하셔?”
문득 궁금해졌다.
그 진철영이라면 뭔가 참신한 접근법으로 환자에게 무언가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두고 보자고 하시던데? 때가 되면 먹지 않겠냐고.”
“그래?”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어. 저러다 dehydration(탈수) 오는 거 아닌지.”
“탈수라…….”
[오전 10 : 28 - 화장실 다녀감]
[오후 12 : 31 - 화장실 다녀감]
[오후 1 : 44 - 화장실 다녀감]
시현은 턱끝을 매만지며 시스템 창을 통해 환자의 간호기록을 살피고 있었다.
“당분간은 아닐 거야.”
그리고는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응? 왜?”
“아마 Urine Output(소변량)은 정상일 거야. 지금 화장실 가는 것만 봐도.”
“그냥 세수하러 가는 걸 수도 있잖아.”
“아냐. 저기 봐. 환자가 손에 들고 있는 거.”
황진호의 시선이 시현이 가리킨 곳을 향했다.
“아! 혹시 수돗물을 마시는 건가?”
황진호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아. 양치컵인데 칫솔이 없어.”
“그렇다는 건…….”
“환자가 투약을 거부하는 게 약 때문만은 아닐 거야. 어쩌면 병동에서 주는 식수를 꺼리는 걸 수도 있지.”
“맞아. 그러고 보니 투약을 매일 거부하는 건 아니었어.”
“지금 Risperidone 5mg까지 증량했지? 이틀 전부터 Benztropine 추가했고.”
‘다른 환자 투약 일정을 꿰고 있다고?’
황진호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근데 약을 뱉는 날도 있어서 실제로 5mg 효과는 아닐 것 같은데…….”
“일단 약물은 구강붕해정으로 가는 게 좋겠다.”
구강붕해정.
입에 들어가면 바로 녹아 물 없이도 복용이 가능한 제제였다.
“어? 나도 그 생각 했는데 구강붕해정 생산 중지 됐다고…….”
“국내 제약사 중에 아직 생산하는 곳이 한군데 있어. 약제과에 문의해봐.”
“어…… 그렇게 할게.”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전략이었다. 같은 1년 차인 시현이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약은 그렇다 하고 음식은 어떻게?’
시현은 여전히 근심 어린 시선으로 이공호를 바라보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병동 중앙 테이블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다른 환자들이 그에게 말을 붙이는 모습이 눈이 들어왔다.
그때였다.
딩동!
[system : 이공호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13/100 -> 15/100]
‘말을 건 것만으로…… 치료 진척도가 올랐어?’
새로운 알림창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동시에 회귀 전 환자의 모습들이 뇌리를 스쳤다.
‘환자가 병동에서 처음 먹었던 음식은 분명…….’
시현이 환자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약물 치료만 제대로 해도 망상이 좋아질까? 당뇨도 있는 환자인데 이러다 저혈당이 오는 건 아니겠지?”
반면 황진호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음식을 먹게 하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그런 황진호를 보며 시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 방법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건 일단 다 해봐야지!”
황진호가 반색하며 물었다.
동기인 시현의 환자가 빨리 좋아져 퇴원한 마당에 자신의 첫 환자가 굶어 죽게 둘 수는 없었다.
“괜찮겠어? 이게 돈이 좀 들 수 있는 방법인데.”
“그걸 말이라고! 새로 나온 비급여약(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고가의 약)이라도 있는 거야?"
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데? 말해봐.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당직 때 병동에 배달음식을 시켜봐. 아주 넉넉하게.”
응? 황진호는 뜻밖의 대답에 약간 당황한 듯 했다.
“치킨이 좋을 것 같다. 탄산음료도 잊지 말고.”
시현이 세상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