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Chapter 4. 세상의 모든 차트 (2)
“치킨이 좋을 것 같다. 탄산음료도 잊지 말고.”
시현이 세상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회귀 전.
이공호의 같은 병실 환자 보호자가 병동에 치킨을 사들고 온 적이 있었다.
- 어이 거기 총각도 한 조각 드세요.
여러 명이 둘러앉아 치킨을 먹는데 이공호가 너무 잘 먹었던 것이 기억났다.
“치킨? 병원 밥도 안 먹겠다고 하는 분인데 밖에서 가져온 걸 쳐다보기나 할까?”
황진호는 그건 아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혹시라도 안 드시면 병동에 야식 쏜 셈 치면 되지.”
“그, 그런가?”
시현의 말에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황진호는 이내 주변 치킨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9병동.
“배달 왔습니다.”
배달원의 양손에는 음식이 잔뜩 들려있었다.
“네? 저희는 시킨 적이 없는데.”
인터폰으로 배달원과 통화하던 간호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제가 시켰어요. 야식 드시고 하시라고요.”
“정말요? 고맙습니다!”
황진호의 말에 간호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침 잘됐다는 표정.
안 그래도 퇴근하고 어떤 야식을 시켜먹을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거 너무 많지 않나요?”
간호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브닝(오후 3시~11시) 근무 인원은 3명.
1년차 초반 ‘백일 당직’ 기간이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시현과 황진호를 포함하더라도 스테이션에는 5명 남짓이 있을 뿐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이거 1인 2닭을 해도 될 것 같은데요?”
“간호사 선생님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이것저것 주문했어요. 남을 것 같으면 홀에서 TV보고 계신 환자분들도 같이 드시죠 뭐.”
마침 병동 중앙 휴게실에 나와 있는 이공호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처럼 다른 환자들과 거리를 둔 채 신문을 뒤적거리는 모습이었다.
“제가 드리고 올게요.”
9병동 막내 간호사인 이선지였다.
이선지는 병동에서 쓰는 큰 쟁반에 알루미늄 호일을 깐 뒤 치킨을 옮겨 담았다.
종류별로 수북하게 쌓인 치킨이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오늘 당직 선생님이 사시는 거예요. 식기 전에 드세요. 이 집 치킨 정말 맛있어요.”
“치, 치킨이다!”
심심한 병원 밥에 질려있던 환자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이고 잘 먹을게요. 워매! 맛있네, 맛있어. 여기에 소맥 한 잔 딱 같이 먹으면 크!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 아주 그냥.”
중년 남자 환자가 치킨을 뜯으며 말했다.
“어제 교수님한테 술 끊는다 안 했는교? 다시는 입원 안 한다꼬.”
“내가 언제 그랬소? 자~알 조절하면서 적당히 마신다고 했제!”
알코올 의존이 심해 입원한 환자였는데 퇴원하려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았다.
“어이 거기 총각도 한 조각 잡수시오.”
중년 남자 환자는 민망했는지 구석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이공호에게 음식을 권했다.
“아, 네.”
이공호가 쭈뼛거리며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어떤 조각을 집을지 고민만 할 뿐 선뜻 먹지는 못했다.
“워매! 답답허요잉. 아무거나 드시요. 이제 얼마 안 남았구만.”
“아, 네네.”
중년 남자 환자가 재촉하자 이공호가 마지 못해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딩동!
[system : 이공호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15/100 -> 17/100]
‘역시.’
시현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병동에 입원한 이래 다른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옳지. 잘 드시는구만. 여기 콜라도 드시요잉. 어? 종이컵이 없네?”
“저… 저는 괜찮습…….”
“잔이 없응게 우선 여기다가 드시요.”
중년 남자 환자는 자신이 먹던 콜라를 단숨에 비운 뒤 잔을 이공호에게 건넸다.
흡사 신입사원에게 술을 권하는 부장님의 모습.
“고맙습니다.”
이공호가 중년 남자 환자가 주는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쭉 들이켰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황진호가 눈을 크게 떴다.
“시현아, 방금 봤지? 이공호님 음식 잘 드시는데?”
딩동!
[system : 이공호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17/100 -> 34/100]
팝업창 내용을 확인한 시현이 씩 웃었다.
‘이 환자 퇴원도 앞당길 수 있겠어.’
이공호 또한 과거와는 다른 경과를 보일 것이 분명해 보였다.
* * *
“환자보고 시작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회진.
레지던트들의 입원환자 경과보고가 한창이었다.
“902호 김수영 환자 조증 증상 호전되어 어제 퇴원했습니다. 퇴원처방은 Abilify 10mg, Lamictal 12.5mg Depakote 500mg, Rivotril 0.5mg HS 입니다.”
진철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보다 빨리 호전됐네. 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네. 2주 뒤 외래 진료 예정입니다.”
“그래. 외래에서 천천히 약 바꿔서 쓰면 되겠네. 천선생이 지난번에 라모트리진으로 바꾸자고 이야기했던가?”
“네, 교수님.”
“그래. 알겠다.”
진철영이 환자의 퇴원 기록을 쭉 훑어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황선생 환자는 좀 어떤가?”
유독 1년차들의 담당 환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진철영이었다.
“어젯밤부터 음식 섭취하고 있습니다. 아침 투약도 잘했습니다.”
황진호의 목소리에 제법 힘이 붙었다.
일주일 넘도록 전혀 진전이 없어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 그래? 어제는 어떻게 면담했나?”
“사실 면담은 잘 안됐는데…… 다른 환자분들하고 치킨을 드시더니 바로 좋아졌습니다.”
“뭐? 치킨?”
풉.
오랜만에 듣는 신선한 답변에 수간호사는 마시던 현미 녹차를 뿜을 뻔했다.
흠흠.
그러나 갑자기 냉랭해진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아, 저, 그게…… 환자가 병원에 대한 피해망상이 있어서 음식을 거부했는데 다른 환자들이 남긴 음식이나 다 같이 모여서 먹는 음식은 드시길래…….”
“그 치킨을 황선생이 산 건가?”
“네? 아, 네…….”
진철영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표정을 풀고 웃으며 말했다.
“굉장히 재밌는 발상이야. 우리 은사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
진철영은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선한 눈빛을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현은 지금부터 진철영 교수가 할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매년 신규 레지던트가 들어올 때마다 진철영이 해주었던 이야기.
아주 먼 옛날 오래된 폐쇄병동이 있었는데, 피해망상증 환자가 매일 같이 신문지로 문틈 창틈을 틀어막는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이 환자를 치료하지 못했는데 한 의사가 결국 치료에 성공했다고 한다.
매일 환자 곁에서 같이 문틈을 막아주고 바람 새는 곳을 찾아주는 방법으로.
“환자는 밤에 누군가 병실에 독가스를 살포해서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아무도 믿지 못했던 거지. 그래도 같이 문틈을 막아준 의사만큼은 자기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세상에 자기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가?
그 환자는 담당 의사와 면담을 시작했고 점차 증상이 호전되었다는 이야기였다.
4년 전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다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무튼 황진호는 진철영 교수에게 점수를 땄다.
어쩌면 먼 훗날 후배 레지던트들은 진철영 교수가 들려주는 ‘치킨으로 환자를 치료한 정신과 의사 이야기’를 들으며 1년 차를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작년에 저 이야기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회진이 끝나자 김석용이 말했다.
“오늘 내 당직이니까 시현이랑 진호는 저녁에 나갔다 와라.”
“예에?”
시현과 황진호가 동시에 반문했다.
“윗년차 선생님들한테는 걸리지 말고.”
“아……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금은 비번 없이 연속근무를 하는 소위 ‘백일 당직’ 기간.
신입 레지던트는 학기 초 얼마 동안 퇴근 없이 병원에서 숙식하는 것이 관례였다.
과거에는 그 기간이 꽤 길어서 ‘백일 당직’으로도 불렸지만 최근 들어서는 1-2달 정도로 많이 줄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일을 붙들고 있는 셈인데, 심지어 2년 차가 당직인 날에도 응급실 호출이 오면 2년 차와 함께 내려가 환자도 보고 차트 작성하는 법도 배운다.
언뜻 가혹하게 생각될 수도 있으나 새로 레지던트가 되어 배워야 할 것도 많고 2년 차가 진료하는 것을 직접 보여준다는 의미도 있어 학기 초에는 그렇게 해오고 있었다.
‘이 시기에 오프(비번)라니.’
물론 비공식적인 오프였지만.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딩동!
이번에도 여지없이 알림음이 울렸다.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퐁당퐁당 - 백일 당직 기간에 오프를 획득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700P)]
인턴 말부터 따지면 3주 만의 외출.
1년 차 두 사람의 마음은 벌써 병원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시현아, 뭐 먹을까?”
“병원 밥만 아니면 다 맛있지.”
“갑자기 신선한 샐러드가 먹고 싶다.”
“샐러드…… 그래, 가자.”
외식은 당연히 고기라고 생각하던 시현이었으나 이 상황에 메뉴가 중요하겠는가.
잠시나마 병원을 벗어난다는 사실 만으로도 신이 난 두 사람이었다.
* * *
잠시 후.
병원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녀들 사이로
후줄근한 셔츠 차림에 뭔가 확실히 찌들어있는 남자 두 사람이 허겁지겁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단둘이 병원 근처에서 식사하는 일은 4년을 통틀어 손에 꼽는다.
한 명이 오프일 때 나머지 한 명은 늘 당직을 서고 있었기 때문.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황진호가 물었다.
“시현아, 너 여자 친구 있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하기까지 시현은 잠깐 생각을 해야만 했다.
인턴 중반에 간간이 썸을 타던 사이인 사람은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시점에서 연락을 했는지가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확실한 연애 관계는 없었다.
“없는데? 너는 어때?”
“있긴 있는데. 요즘엔 서로 바빠서 얼굴 못 본 지 좀 됐지.”
황진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사실은 알면서도 예의상 물어봤다.
황진호에게는 의대생 시절부터 사귀던 여친이 있었다.
‘그 여친이 바람이 나서 헤어진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맨날 당직만 서고 자기에게 관심 없는 남자는 싫다고 했다나.
‘하긴. 누가 1년 365일 병원에 묶여있는 사노비를 좋아하겠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절로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마침 잘 됐다. 조만간 소개팅 하나 해볼래?”
[system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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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비행 레지던트]
난이도 E
1년 차 극초반에 소개팅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피어나는 법.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성공 조건 : 소개팅 수락 및 연인관계로의 발전
성공 보상 : 용자의 칭호 + 5,000P
실패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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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에 응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
퀘스트.
그것도 무려 ‘백일 당직’ 기간에 소개팅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시현은 한참 동안 알림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