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Chapter 5. 시스템 관리자 (2)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레지던트 조력자(Subjective Objective Resident Assistant, SORA)]
시현이 알림창을 클릭하자 추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system : 현재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강성진의 진료실에서 본 그 사람을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보자고 했었지.’
그런데 어떻게?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다는 메시지 외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시현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바라는 사람…….
강성진에 따르면 자신이 1년차를 다시 시작한 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체 누가?’
주변 사람들? 환자들?
어쩌면 시현 자신일 수도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가 되는 것만 바라보고 10대와 20대를 열심히 살았건만 시험 하루 전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니까.
억울하기로 따지면 누구 못지않았다.
‘이번만큼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아야겠어.’
강성진도 그렇게 말했다.
1년차 2번 하는 것도 억울하니 일단은 그렇게 살아보라고.
그중에 답이 있을 거라는 말도 했다.
‘돈도 많이 벌고. 플렉스를…….’
그때였다.
딩동!
또다시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system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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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 퀘스트]
1. 논문 읽기 - 레지던트의 지식은 교과서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는 법. 매일 3편의 논문을 정독하고 리뷰 하세요.
2. 체력 단련 - 레지던트 수련에 체력은 필수입니다. 매일 3Km 달리기에 도전하세요.
3. 병동 장악 - 레지던트의 관심은 자기 환자에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병동 입원 환자들의 경과 기록을 체크하세요.
성공 보상 +500P /일
실패시 –1,000P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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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괴롭히려고 다시 불러온 건가?’
퀘스트 내용을 보니 최지훈이 천사로 보일 지경이다.
‘공부 열심히 하고 교수님들 말씀 잘 들으라고 할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라는 관리자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임이 틀림없었다.
* * *
“오늘은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군요. 환자들 상태도 안정적이고.”
회진을 마치고, 이광섭 과장이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치프하고 최지훈 선생은 1년차들 특별히 신경쓰도록 하세요.”
“네, 과장님.”
김민홍과 최지훈이 동시에 대답했다.
이광섭은 바로 외래 진료를 보러 병동을 나섰다.
“회진도 일찍 끝났는데 외래 시작하기 전에 커피라도 한잔할까?”
김민홍이 레지던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인턴 선생님, 인원수대로 음료 부탁해요.”
인턴은 김민홍이 건넨 카드를 받아들고 후다닥 병동을 나갔다.
‘오늘은 무슨 일로?’
김민홍이 회진 끝나고 커피를 사는 건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가지고 있던 주식이 폭등했을 때고 나머지 하나는 극도로 심각한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표정을 보니 오늘은 주식이 대박 난 쪽인 것 같았다.
“치프 선생님, 혹시 지난주에 산 그거 어떻게 됐어요? 많이 오른 거예요?”
때마침 누군가가 김민홍이 자랑을 할 수 있게 멍석을 깔아주었다.
2년차 권진은.
4년차 김민홍과 의대 동기이지만 다른 병원에서 내과를 하다 그만두고 삼아대 정신과로 온 케이스였다.
친구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석에서는 저렇게 존대를 했다.
“응. 전부터 눈여겨보던 주식인데 이번 찌라시 때문에 오른 것 같아.”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것을 보니 상한가가 확실해 보였다.
“올랐으면 제때제때 좀 팔아버려요. 지난번처럼 야수의 심장 어쩌고 하면서 버티다가 손실 보고 울면서 술 먹자고 하면…….”
2년차가 4년차에게 말하는 것 치고는 꽤나 가벼운 말투.
원래 두 사람이 친구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김민홍은 권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사석에서는 늘 의국원들과 편하게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다.
시현은 주식투자에는 영 관심이 없었지만, 아침 회진이 끝나고 김민홍이 해주는 주식 이야기는 늘 흥미롭게 듣곤 했었다.
“이번에 내가 들어간 회사가 삼구물산이라는 곳인데, 여기 자회사가 최근에 투자한…….”
사실 이야기보다는 주식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필터링 없이 드러나는 김민홍의 표정이 꽤 볼만 했는데, 정말 풍부면서도 감정 이입이 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과거 김민홍이 커피를 사면서 말했던 회사 이름들이 뇌리를 스쳤다.
늘 변동성이 큰 급등주 투자를 많이 했었던 그였기에 투자 성과는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늘 드라마틱했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끝에는 항상 커피 또는 소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어떻게 됐더라.’
무심코 달력을 쳐다보던 시현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선생님, 외람되지만 삼구물산 계속 들고 계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차익 실현하시고 파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촤아악.
다들 아이스 버킷 챌린지라도 한 것마냥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김석용이 연신 마른기침을 했다. 마시던 커피가 목에 걸린 것 같았다.
몇 년 뒤에야 김민홍과 막역한 사이가 되지만, 아직까지는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상황.
아무리 김민홍이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1년차가 4년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례일 수는 있지만 두고 볼 수만은 없네요.’
이대로 가면 김민홍은 티타임이 끝난 뒤 본관 1층 은행에 들를 것이다.
삼구물산을 추가 매수하겠다고 신혼집 전세금 들어갈 돈에 마이너스 통장까지 뚫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아느냐고?
회귀 전 4월 1일 밤.
김민홍은 술을 사들고 만취상태로 전공의 숙소로 찾아와 삼구물산을 저주하며 고성을 질렀다.
- 으아악! 내 돈! 내 전셋집!
‘무슨 만우절 장난도 아니고.’
몇 주 사이에 김민홍의 계좌는 반의 반토막이 되어버렸다.
머리를 감싸고 울부짖던 김민홍을 달래느라 그날 당직이었던 시현과 김석용은 꽤나 애를 먹었었다.
이번만큼은 김민홍이 망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에게는 1년차 내내 빚진 게 많았으니까.
“천시현 선생, 혹시 이 주식 알고 있는 거야? 찌라시에는 이번에 수주 계약 엄청나다고…….”
김민홍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부도 직전에 일부러 흘린 정보라는 말도 있습니다. 물량을 떠넘기려고요.”
시현이 대답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잠깐 차트를 봤는데…… 아까부터 손을 바꿔서 조금씩 팔고 있는 느낌도 있어서요.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차트 따위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김민홍은 기술적 분석을 통해 주식을 사고파는 부류는 아니었고 귀가 얇은 편이라 이런 종류의 설득에 약하다.
시현은 자신이 거짓말에 제법 소질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중에 형수님이랑 우현이가 저한테 고마워할 거예요.’
물론 우현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환자 디스커션이 오고 가야 할 시간에 김민홍의 투자 이야기만 하게 되었다.
“어, 외래에서 연락 왔다. 먼저 갈게. 천 선생이 이야기해 준 거 생각 좀 해볼게!”
김민홍은 외래에서 온 전화를 받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잠깐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우리 과가 좀 좋은 과이긴 하지?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가 있어 응급 수술이 있기를 해?”
또다시 김민홍의 동기 최지훈이 입을 열었다.
“1년차도 주식 공부할 시간이 따로 있고. 안 그래? 이러다 정신과 관두고 전업투자자 하는 거 아냐?”
재밌다는 듯 웃고 있으나 명백히 비꼬는 말투.
예전 같았으면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멋쩍은 듯 작은 목소리로 얼버무렸겠지만, 이제는 후회 없이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은 상황.
‘좀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어.’
특히 저 최지훈 선생에게만큼은 조금도 지고 싶지 않았다.
“뭐, 못할 것도 없죠. 혹시 필요하시면 종목 추천이라도 해드릴까요?”
시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처음 보는 아랫년차 유형에 당황한 탓이었을까.
최지훈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정신과 업무도 주식투자만큼이나 자신 있는 거겠지? 앞으로 내가 잘 지켜봐 줄게.”
“저도 열심히 보고 배우겠습니다. 혹시 지난번 clozapine 처방처럼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또 여쭤봐도 될까요?”
시현의 대답에 최지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4년차를 상대로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3년차 권원주가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카푸치노를 마시다 시나몬 가루가 목에 걸린 모양이다.
김석용도 황진호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삼키다 만 커피가 주르륵 흐를 것만 같았다.
“이거…… 올해 1년차는 정말 기대가 많이 되는 것 같네. 2년차 선생님들이 1년차들 잘 좀 봐줘야겠다. 응?”
최지훈이 2년차 김석용과 권진은을 한 번씩 교대로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근데 그 주식 더 오르면 되게 민망하겠어? 1년차가 4년차한테 그따위로 말을 하고…… 책임질 수 있는 거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조만간 하한가가 2번 정도는 나올 예정이니까요.”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해졌다.
“일반 외래 있어서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원주야 너도 같이 가자.”
“어? 어, 그래.”
하도영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권원주도 구해줘서 고맙다는 표정으로 함께 나갔다.
“2년차들, 나중에 따로 좀 보자.”
최지훈이 애써 화를 누르며 회의실을 나갔다. 이제 회의실에는 1, 2년차들만이 남았다.
“시현아, 최지훈 선생님하고 무슨 일 있어? 혹시 어제 따로 불러다 잡일 시키던?”
김석용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아뇨. 어제는 아니고요. 4년 전에요. 1년 내내 시켰죠.’
시현은 이렇게 말하려다 꾹 참았다.
“워낙 일 내리는 걸 좋아하는 양반이라 그럴 수도 있긴 한데, 태도가 너무 과한 거 아니냐? 내년에 펠로우로 남을 수도 있는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권진은도 한마디 했다.
[system : 레지던트 권은진의 사용자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합니다.]
‘이런 식이었지.’
- 야! 니들 일만 하면 다야? 1년차 티칭 똑바로 안 해? 내가 나중에 너희 논문 안 봐주면 좋겠어?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늘 윗년차를 불러다 혼내곤 했었다.
그뿐인가.
- 너는 잘하는 것 같은데 네 동기가 저 모양이니 어떡하냐. 같이 당직서면서 공부해야지. 안 그래?
패널티를 줄 때는 연대 책임이랍시고 동기인 황진호에게까지 불이익이 돌아갔다.
이간질에 편가르기로 의국(醫局)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반발할 수는 없었다.
병원 내 군기가 군대보다 훨씬 센 이유.
윗년차가 무서운 이유.
더 많이 알기 때문이었다.
지식과 경험이 권력을 만든다.
과거의 시현 또한 담당 4년차인 그에게 밉보였다가 진료에 필요한 지식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다.
부족한 실력으로 환자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지금에야 그런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아도 될 상황이 되었지만.
“제가 말이 심했습니다. 두 분 곤란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시현이 2년차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우리야 가서 잔소리 듣고 오면 그만인데 뭘. 근데 듣고 보니 뭔가 좀 시원한 거 같기도 하고.”
의외로 김석용의 반응은 담담했다.
“얘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한번 잔소리 시작하면 30분이 기본인데.”
권진은이 투덜거렸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
다시는 저런 식으로 주니어들에게 시비를 걸 수 없게.
남은 커피를 끝까지 들이키고는 시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