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3화 (13/195)

13화 Chapter 6. 천하제일 단타 대회(1)

일주일 뒤.

“저 회사가 부도가 났어? 세상 모를 일이네.”

“그러게요. 건실한 회사인 줄 알았는데…….”

병동 중앙 홀에서 식판을 든 환자들이 TV를 보며 수군거렸다.

‘예전과 같아.’

장 시작부터 삼구물산은 하한가로 직행했다.

팔겠다는 사람은 많고 사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거래가 없다시피 했다.

매물은 쌓여만 가고 호가 창에는 기존 주주들의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듯했다.

“전 재산 날릴 뻔했는데 덕분에 살았다.”

김민홍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입니다.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지난주에 천시현 선생 말 듣고 상한가에 다 정리했어. 원래는 추가 매수하려고 대출도 받았었거든.”

김민홍은 개미지옥에서 탈출한 뒤 불구경하는 듯한 그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도 커피 한잔하자고.”

수익을 내서 주변 사람들에게 커피나 밥을 사면 다음에 더 큰 수익이 생긴다는 것이 김민홍의 미신적 믿음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진정한 도파민형 인간이었다.

회의실 테이블에는 테이크 아웃 커피잔과 함께 조각케익이 올라왔다.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유독 최지훈의 표정만 좋지 않았다.

‘저 표정 뭐야? 동기가 망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시현이 틀렸으면 한소리 따끔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몹시 분하다는 얼굴이었다.

“지훈아, 무슨 일 있어?”

“별일 아냐. 나 먼저 나가볼게.”

김민홍이 물었으나 최지훈은 남은 커피를 쭉 들이키더니 그대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놓치는 부분이 없어야 해.’

사소한 기억 하나가 상황을 이렇게 바꿔놓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4년이 지났음에도 1년차 때의 일들을 제법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인간은 학습 내용과 주변 맥락을 함께 저장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 인지과학 책에서 읽었던 글귀가 떠올랐다.

확실히 기억이 형성될 때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놓이게 되니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살아나긴 했다.

1년차로 돌아오던 날도 그랬다.

당직복을 입고 그 당시 쓰던 핸드폰을 손에 쥐자 인턴 시절의 기억들 마저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들 마냥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무튼, 이제 머리를 쥐어뜯는 김민홍과 소주를 마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없어야만 했다.

* * *

같은 시각 삼아대병원 9병동 간호사 스테이션.

“캬! 시원하다! 오늘 무슨 일이래요? 치프 쌤이 간호사실에 커피를 다 사고.”

간만의 티타임에 신이 난 듯 간호사 이선지가 말했다.

“요즘 투자가 좀 잘되시나 봐.”

“주식 투자요? 나도 좀 가르쳐 달라고 할까? 쥐꼬리만한 월급 어떻게든 불려야…….”

“아서라, 다칠라. 지난번에 계좌 보니까 죄다 파란색이던 걸. 이번에 많이 번 것도 1년차 천시현쌤이 알려줘서 그런 거라던데?”

“헤헤. 그럼 시현쌤한테 물어봐야지.”

이선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참, 이번에 우리 1년차 선생님들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인데요?”

“그 ER에 신규로 온 애가 있는데, 얼마 전에 소개팅 하다가 큰일 날 뻔했다고 하더라고. 상대방 남자가 잔에 무슨 약을 타려고 했다나 봐. 그걸 우리 1년차 선생님들이 잡았고.”

“와, 대박. 그래서 어떻게 됐대요?”

“어떻게 되긴. 바로 경찰 불러서 조사 들어갔다던데. 아무튼, 험한 세상이니까 니들도 조심해.”

“저, 우리 1년차들이 뭘 어쨌다고요?”

간호사들의 대화에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 지훈쌤. 아니에요. 아무것도.”

이선지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최지훈의 모습은 아랫년차들 갈구고 혼내는 모습뿐.

괜한 말을 건넸다가 불똥이 튈까 걱정이었다.

“인계 끝났으면 얼른 퇴근 들 할 것이지 무슨 사담이 이렇게 많아!”

“네네, 수쌤 저희 먼저 갈게요!”

뒤늦게 나타난 수간호사의 일침에 간호사들은 후다닥 인계를 마쳤다.

“효순아, 네가 보기엔 어때? 새로 온 1년차 선생님들?”

나이트 번 간호사들이 퇴근한 후 수간호사가 이제 막 데이 근무를 들어온 간호사에게 물었다.

9병동 간호사 박효순.

첫 회진에서 환자에게 공격을 당할 뻔한 간호사였다.

“황진호 선생님은 아직 모르겠고 천시현 선생님은 뭐랄까…… 1년차 답지 않게 노련한 것 같아요. 당황하는 느낌도 없고.”

“그래?”

“근데 수선생님, 저 임신한 거 선생님께서 따로 말씀하셨나요?”

“아니, 나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수간호사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안 거지?’

박효순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간호기록을 마저 입력해 나갔다.

* * *

다음날 회진.

“자, 다들 수고하셨고 오늘도 환자 열심히 봅시…….”

“치프 선생님,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김민홍을 최지훈이 만류했다.

“1년차 선생님들 이상한 소문 들리던데, 최근에 밖에 나갔다 온 적 있어?”

“…….”

갑작스러운 질문에 시현과 황진호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병원 근처에서 밥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황진호의 대답에 최지훈은 좀 더 말해 보기를 채근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멀리 가려 애썼건만.

얼마 전 오프 나갔다 온 것을 본 모양이다.

아니면 누군가가 이야기 해줬거나.

병원 바닥이 좁긴 좁다.

“술도 한 잔… 그리고 경찰서도……”

황진호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직 때 술? 경찰서? 이 자식들이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

최지훈이 열을 올렸다.

‘누가 들으면 당직 서면서 술이나 마시는 파렴치한인 줄 알겠네.’

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정식 당직은 2년차 김석용 한 사람이었다.

1년차들이 병원에 남는 것은 정식 당직보다는 배움의 성격이 강했고 김석용이 따로 부르지 않는 한 야간에 공식적인 업무는 없었다.

“선생님, 그때는 제가 나갔다 오라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김석용이 두 사람을 두둔하려 들자 시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1년차들 좀 제대로 봐주라고 몇 번 말해? 아직 3월이야. 어떻게 관리를 했길래 백일당직 기간에 마음대로 술 마시고 병원 밖을 돌아다녀? 다른 과에서 우리 과를 어떻게 보겠어?”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김석용과 권진은이 대답했다.

“천시현 선생하고 황진호 선생은 패널티로 최신 논문 20편씩 리뷰해서 PPT 만들어 오세요. 주제는 사회불안장애로.”

“…….”

황진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시현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황진호의 경우 1년차 초반이라 정신과 논문에는 익숙하지 않을 시기.

종일 매달려도 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그럼 그렇지.’

시현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회불안장애 최신 논문 20편씩 총 40편 요약.

언뜻 보면 저녁에 병원을 무단이탈한 1년차들에게 주는 벌로 보이겠지만 다 나름의 의도가 있었다.

‘그냥 도와달라고 하면 얄밉지는 않지.’

최지훈은 4월에 있을 춘계 학술대회에서 레지던트 구연발표를 할 예정이다.

비록 요약본이라고 할지라도 최신 논문을 40여 편이나 접하고 간다면 준비 잘했다는 평을 받을 것이 확실하다.

“다음 주 초에 확인할 테니까 주말까지 제대로 준비하세요! 김석용 선생은 이따 외래 끝나고 따로 보고.”

쾅.

최지훈은 신경질을 내며 그대로 회의실을 나갔다.

뭐 문밖에서는 웃고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잠깐 앞에만 나갔다 오게 하지 석용이가 너무 멀리 보낸 거 아니냐?”

분위기가 가라앉은 가운데 김민홍이 웃으며 말했다.

뜻밖에도 김민홍은 김석용이 1년차들을 잠깐 나갔다 오라고 한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커피나 한 잔 하러 가자.”

“어제도 사주셨는데 오늘도요?”

“괜찮아. 나 돈 많다고.”

김민홍이 김석용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 *

Cafe Gustav.

삼아대 병원 테라스에 입점한 카페였다.

3월치고는 따뜻한 날씨에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타과 레지던트들도 커피를 마시러 나와 있었다.

“지훈이가 왜 저렇게 까칠한지 모르겠다.”

김민홍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 2년차 당직일 때 1년차들 한 번씩 밖에 나가서 밥 먹고 오라고 하는 건 관례인데.”

“맞아요. 저희 때도 그렇게 해주셨잖아요.”

3년차 두 사람이 거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패널티 없이 지나가게 하고 싶은데 쟤가 저렇게 눈 뒤집힐 땐 나도 못 말려.”

“괜찮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현이 괘념치 말라는 듯 말했다.

‘일일 퀘스트도 할 겸.’

4년 동안 수도 없이 봐왔던 것이 논문이다.

숙면 포션으로 수면 시간도 많이 확보했겠다.

최지훈에게 필요한 수준으로 요약하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진호가 문제인데…….’

가뜩이나 풀당직으로 잠이 부족할 시기에 논문 요약까지 하라니.

이건 잠자지 말고 일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선생님, 요즘 주식투자 잘 되시나 봐요? 커피 자주 사주시네요.”

예상외로 황진호도 씩씩해 보였다.

“그럼! 아주 잘하고 있지. 내가 또 대박 종목을 알고 있거든.”

김민홍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정말요? 선생님 저도 좀 알려주세요.”

황진호가 그의 말에 급관심을 보였다.

“이거 아무나 말 안 해주는 건데…… 다나아생명과학이라고 면역항암제 관련 특허가 있는 회사거든.”

‘다나아생명과학!’

김민홍의 말에 시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의대동기 신경외과 민국이 알지? 걔 아는 사람의 사촌 형이 그 회사의 연구원으로 있는데……”

김민홍이 열변을 토했다.

회귀 전 1년차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내용이었다.

이미 다나아생명과학이 연구 중인 항암제의 최신 논문들도 다 찾아본 듯했다.

“아, 그래요? 저 그럼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만들어서 사야겠네요!”

황진호는 김민홍의 설명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신약이 아직 임상 단계이고 당장 매출이 잡히는 것도 아니라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3년차 하도영이 입을 열었다.

과묵하고 신중한 사람이니만큼 투자 전략도 안전지향인 편이었다.

“맞아. 그래서 나도 조금만 들어가 보려고 해.”

김민홍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여기까지는 예전과 같은데……’

문제는 김민홍의 투자방식이었다.

이른바 상한가 따라잡기.

변동성이 큰 만큼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 폭망할 가능성 또한 높았다.

오죽하면 ‘한강행 익스프레스’라는 말도 나오겠는가.

과거의 김민홍은 다른 레지던트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뜻밖의 수익에 무리한 추가 매수를 했다.

그리고 이후 며칠간 펼쳐진 널뛰기 장세에 추매와 손절을 반복하다 결국 큰 손실을 보게 된다.

‘주식도 도박하듯이 하면 충분히 도박이 될 수 있다고 했어.’

그 말은 딱 김민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천시현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시현이는 어떻게 생각해?”

때마침 김민홍이 물어왔다.

지난번에 시현이 말해준 덕분에 큰 손실을 면한 터라 그의 신뢰는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장고 끝에 시현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도 방금 확인해봤는데 정말 좋은 회사인 것 같아요. 파이프라인도 탄탄하고. 좀 더 사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김민홍은 시현의 말이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진호야, 점심시간 때 같이 계좌 개설하러 가자. 치프 선생님이 좋은 종목 알려 주셨는데. 선생님도 같이 가실래요?”

이번에는 되려 김민홍을 부추기기로 했다. 이왕이면 다른 레지던트들도.

“그…… 그럴까?”

황진호나 김석용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 착실한 성격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친구따라 강남가는 심정으로 따라나섰다.

‘이번엔 제가 패널티를 드리죠.’

시현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장은 다음 월요일 아침 회진까지 이들이 최대한 많은 주식을 모으도록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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