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5화 (15/195)

15화 Chapter 7. 뜻밖의 환자(1)

의국 회식.

시현이 늘 불편해하던 자리였다.

오늘도 최지훈에게 함부로 말한 것을 두고 윗년차들이 뭐라 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시현이는 환자도 잘 보고 투자도 잘하고 얼마 전에 보니까…… 왠지 싸움도 잘할 것 같던데. 못하는 게 뭐야?”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석용이 시현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우리 진호는 사비 털어서 환자 열심히 먹여가면서 잘하고 있더라? 그분 많이 좋아지셨던데?”

그리고 황진호의 잔에도 맥주가 채워졌다.

‘왜 술을 적게 주시지?’

두 잔 모두 따르다 만 것마냥 어정쩡한 높이.

시현이 의아해하는 사이 김석용이 말했다.

“의국장(치프의 다른 표현) 선생님, 오늘은 폭탄으로 가시죠?”

‘망했다.’

평소 술을 즐겨하지 않는 김석용이었지만 오늘처럼 분위기가 좋을 때는 누구 못지않은 주당이 된다.

김석용이 술잔의 남은 부분을 소주로 가득 채웠다.

“내일은 또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오늘은 많이 먹자.”

김민홍이 들떠서 말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레지던트들이 내일의 전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치프 선생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 사실 이쯤되면 예측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어차피 세력 마음대로 될 건데. 차트도 의미 없어.”

김민홍이 술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워낙 변동성이 심해서 내일 상승 출발하면 정리하고 나오는 게 어떨까요?”

“당분간 계속 가지 않을까요?”

“어휴, 저는 떨려서 못 들고 있겠어요. 또 하한가 가면 어떡해요?”

다른 레지던트들도 각자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시현의 반응을 살폈다.

“제 생각에는…….”

그리고 마침내 시현이 입을 열었다.

저절로 레지던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회진 끝나고 교수님 코멘트 기다리듯.

“변동성이 극심하지만 당분간 종가는 상한가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갭상승 출발이면 팔았다가 되사고 하락 출발이면 기다렸다가 매수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매매기법이었으나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비록 정신과에서는 1년차였지만 이 분야에서만큼은 다른 레지던트들의 절대적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런데 시현아. 너 최지훈 선생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어?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자 김석용이 물었다.

“별일은 없었습니다.”

“그래? ……뭐 그래도 앞으로 시현이랑 보낼 시간이 더 길 것 같으니까, 나는 네 편 들어야겠다. 하하하.”

“난 동기라서 누구 편들기가 난처한데. 싸우더라도 나 없을 때 둘이 싸워. 분위기 이상해지잖냐?”

보통이라면 시현을 나무라야 정상인 상황.

그럼에도 이렇게 말해주는 김민홍이 고마웠다.

“시현아! 내년에 나 치프 할 때는 안 그럴 거지? 미리 잘 부탁해.”

3년차 권원주가 장난스레 말했다.

시현……아?

후배 레지던트들에게도 늘 존대를 했던, 엄격하고 감정 표현이 없던 인물.

정신과 의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워했던 사람 중 한 명이 권원주였는데, 오늘은 평소와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현이 권원주가 주는 술을 받아 마시며 말했다.

“그나저나 내일이 기다려지네. 내일도 회식하는 거 아냐?”

황진호도 들떠 있었다.

밤늦도록 술자리가 이어졌다.

아직 학기 초인데도 동료 레지던트들과 벌써 제법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회귀 후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부분이었다.

* * *

다음날 아침.

[system : 회복 포션 효과로 피로도가 감소합니다.]

‘이거 다른 사람한테도 쓸 수 있나?’

아이템의 효과는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었다.

‘숙취 해소제로 팔면 대박일 것 같은데.’

평소 같았으면 어제 마신 술에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겠지만 오늘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사실 견딜만한 정도가 아니라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 조합이 정말 괜찮단 말이지.’

시현의 시선이 인벤토리에 보관된 회복 포션과 숙면 포션을 향했다.

포인트가 꽤 소모되지만 환자를 열심히 보면서 보충하면 될 일.

[system : 체력 단련을 시작합니다. (0.1/3Km)]

시현은 그렇게 또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 오후에 병동으로 신환 한 분 입원하실 거야. 천시현 선생이 보도록 하고.”

“네, 선생님.”

회진이 끝나자 김민홍이 새로운 환자를 시현에게 배정했다.

“외래에서 내가 몇 번 봤던 환자인데, 병실이 없어서 입원 못 시키고 있었거든. 주치의는 이광섭 교수님이셔.”

시니어 레지던트인 김민홍, 최지훈, 권원주 그리고 하도영은 일주일에 2-3타임 정도 외래 진료를 보고 있었다.

레지던트 진료인 만큼 교수들에 비해 환자 수는 많지 않지만 종종 증상이 심한 환자들은 교수에게 보고 후 입원시키곤 했다.

“네, 선생님. 어떤 환자분이신가요?”

“내가 보기에는 전형적인 스키조(조현병, schizophrenia의 준말) 환자야. 병록번호 61901202 조동규님이고 외래 차트 확인해봐.”

새로운 환자는 뜻밖에도 회귀 전에 본 적이 없었던 환자였다.

‘벌써부터 변화가…….’

시현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시현아, 쫄지 마. 어려운 환자는 아니야. 1년차 선생님들이 진료하기에 괜찮을 것 같아. 궁금한 건 나한테 물어봐도 돼.”

시현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김민홍이 웃으며 말했다.

첫 번째 환자, 김수영이 일찍 퇴원하면서 병실 사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녀가 퇴원하고 그 병실에 남아있던 환자가 6인실로 옮겨가면서 2인실 하나가 텅 비게 된 것.

‘지금은 902호가 남자 병실이 된 거네.’

당분간 입원하는 환자들이 과거와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 * *

[조동규 남/32세 담당의 R1 천시현 / 담당 교수 Prof. 이광섭]

환자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병동으로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병동 담당의 천시현입니다.”

“아… 안……녕 하세요.”

환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눌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법 큰 키의 환자는 트레이닝복에 한겨울에나 입을 것만 같은 두꺼운 패딩 차림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

머리는 며칠째 감지 않은 듯 헝크러져 있었고 수염은 덥수룩했으며 체취가 심했다.

시선은 허공을 응시할 뿐, 눈맞춤이 전혀 되질 않았다.

‘이래서 전형적인 스키조라고 하셨구나.’

극심한 무의욕으로 개인위생을 챙기지 못하는 상태.

조현병 환자들이 증상 악화를 겪을 때 종종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같이 오신 분은?”

그의 옆에 같이 병동에 올라온 보호자가 서 있었다.

늘씬한 키에 마른 체형.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에 몸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으며,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했다.

다소 큰 사이즈의 링귀고리가 눈에 띄었다.

“와이프예요. 우리 오빠 좀 잘 봐주세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환자와 너무도 대비되는 화사한 모습의 보호자였다.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시현이 환자와 보호자를 면담실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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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증상]

1. 환청(“죽이라고 명령하는 소리가 들려요.”)

2. 망상(“누가 내 몸을 조종하려고 해요.”)

3. 무의욕

(Onset : 1년 전부터)

상기 환자는 정신과적 과거력 없는 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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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은 김민홍이 외래에서 쓴 초진차트를 살펴보았다.

‘주증상으로 봤을 땐 조현병 환자가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기록만으로 환자를 평가할 수는 없다.

의사마다 견해가 다를 수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시현은 본인이 직접 본 것을 더 믿는 스타일이었다.

“조동규님, 어떻게 불편하셔서 오셨을까요?”

“…….”

환자는 이따금씩 부적절하게 웃어 보였으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 지연된 언어 반응

- 둔마된 정동

시현이 환자의 상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외래 기록을 읽어보니 귀에서 자꾸 소리가 들린다고 하셨는데, 어떤 소리가 들리세요?”

“…….”

“저, 조동규님?”

한참 동안 반응이 없자 시현이 환자를 다시 불렀다.

“죽…… 죽이라고 해요. 하루 종일 들려요.”

“누구를요?”

“여자… 여자들…….”

환자는 힘들게 면담을 이어나갔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환청 때문에 면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환자는 괴로운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당장 면담보다는 안정이 필요해 보였다.

‘심한 환청. 그것도 지시하는 내용…….’

시현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현실 검증력이 없는 환자의 경우 간혹 환청의 내용에 따라 그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그 내용이 누군가를 해치라고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거라면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보호자님, 환자분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러셨나요?”

“증상이 심해진 건 작년 말부터인데 생각해보니까 작년 초부터 평소랑 좀 다르긴 했어요. 멍하고 우울해 보이고…….”

시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한 증상이 생기기 한참 전부터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

‘급성기는 3개월 전. 전구기 증상은 1년 전부터인가.’

갑작스러운 증상 발현이 아닌 점진적인 변화.

양극성 장애보다 조현병의 경과에 더 합당한 소견이었다.

“아프기 전에는 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저희 오빠요? 오빠는 가게…….”

시현의 질문에 대답하던 보호자가 갑자기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뭐였지?’

4년 동안 병원에서 먹고 자는 시간 외에 환자 진료만 해온 시현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스치는 공포감을 쉬 놓칠 리 없었다.

“보호자님? 방금 뭐라고…….”

“아, 아니에요. 회사 다녔어요. 그냥…… 평범한 회사.”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려는 보호자.

다음 순간, 시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환자의 표정이었다.

두 눈 가득한 분노.

아내를 보는 환자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조동규님,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담당하셨나요?”

“공, 공장에서 생산직을 했습니다.”

“아, 네. 혹시 교대근무를 하셨나요? 평소 불면증은 없으셨나요?”

“잠…… 잘 잤습니다.”

환자는 순식간에 다시 멍한 표정이 되어 느릿느릿 대답을 이어나갔다.

방금 전까지의 공격적인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뭐지 이 부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일고 있었다.

“우선은 병동에서 충분히 안정 취하시고 약물치료도 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첫 입원이시니 종합심리검사도…….”

“혹시 검사는 나중에 외래에서 해도 될까요?”

시현의 설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환자가 물었다.

“네? 입원하신 김에 하시는 게…….”

“일을 못 하게 되면서 형편이 좀 어려워져서요. 검사비가 비싸기도 하고…… 우선은 증상부터 치료하고 검사는 나중에 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시현이 대답하려는데 보호자의 무릎에 놓인 핸드백이 유독 눈에 띄었다.

‘메르…… 헤스?’

명품에 문외한인 시현이 보기에도 꽤나 비싸 보이는 가방이었다.

가방 손잡이만 팔아도 입원비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면담을 계속할수록 이해 안 되는 것들만 늘어갔다.

* *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희 남편 잘 부탁드려요.”

첫 면담이 끝난 뒤 보호자는 황급히 병동을 떠났다.

“조동규님, 오늘 저녁부터 외래에서 드시던 약물을 조금 변경해서 드리겠습니다. 불편한 점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네.”

환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히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기도 했다.

급성 악화기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기분 탓인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면담실에서 환자가 보호자를 노려볼 때의 표정이었다.

‘아주 또렷한 얼굴이었어. 잠깐이긴 했지만.’

위이이잉.

고민하는 사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02-20xx - 0119]

응급실이었다.

“정신과 1년차 천시현입니다.”

- 선생님, 여기 ER인데요. 어떤 환자 보호자 분이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요.

응급실 간호사가 상황을 설명했다.

‘김수영 환자 보호자는 아닐 테고.’

김수영은 과거에 비해 훨씬 안정된 상태로 퇴원했던 터라 응급실을 찾아올 리는 없었다.

시현의 시선이 병동 홀에 앉아 멍하게 TV를 보는 조동규를 향했다.

이 시점에서 자신을 찾을 환자 보호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네, 바로 갈게요.”

시현의 발길은 곧장 응급실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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