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Chapter 7. 뜻밖의 환자(2)
“선생님, 여기예요.”
역시나 시현을 찾는다는 환자 보호자는 아까 병동에서 봤던 조동규의 아내였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을까요?”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보호자가 주변을 살폈다.
- 어레스트! 에피 한 엠플 주세요!
- 기도가 부어서 인튜베이션이 안됩니다!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들 사이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의사와 간호사들.
확실히 차분하게 면담을 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이쪽으로 가시죠.”
시현이 가리킨 곳에는 응급실 환자 보호자용으로 마련된 면담실이 있었다.
응급실 인턴을 돌 때 종종 간식도 먹고 쪽잠도 자던 곳이었는데 다행히 지금은 비어 있었다.
“하실 말씀이란 게?”
시현이 운을 뗐다.
“저희 오빠 좀 길게 입원할 수 있을까요? 한 달? 아니면 최소 3주 만이라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입원을 길게 하기를 원하신다니.”
환자가 호전되어 빨리 퇴원하기를 바라는 보호자는 봤어도 무작정 입원 기간을 늘려달라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
보호자의 눈빛이 흔들리고 상체가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면담실에서 본 환자의 눈빛을 떠올랐다.
‘분명 눈에 살기가 돌았었어.’
담당 의사와 면담 중에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데, 집에서 단둘이 있을 때는 오죽할까.
“조현병 급성기 때는 평소보다 예민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치료를 잘 받으면 좋아질 겁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보호자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여자들이 자꾸 자기를 비웃는다고 해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것도 증상이겠죠? 그리고 의심이 많아졌는지 남들한테 자기 이야기를 못 하게 해요.”
“아, 그래서 아까 면담실에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셨군요.”
보호자의 말을 듣고 보니 시현을 따로 불러 면담을 신청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심리검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검사비가 없는 건 확실히 아니에요.”
사실 검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치료가 급하지 검사가 급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궁금한 것은 검사를 꺼리는 환자의 의도였다.
“요즘 오빠가 밤마다 나가는데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누굴 해치거나 하지는 않을지 너무 걱정이에요.”
보호자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혹시 최근에 잠을 안 자고 말수가 많아지던가요? 아니면 돈을 많이 쓰신다던가…….”
“아니오. 그런 적은 없어요.”
“최근에 새로 드시기 시작한 약물은 없나요? 건강보조식품이랄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양극성 장애나 물질 관련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시현은 속으로 가능한 진단들을 추려 나갔다.
“그리고 정말 섬뜩한 게 뭔 줄 알아요? 가끔 옷에 피를 묻혀서 오는데, 아무리 봐도 그게 오빠 피가 아닌 것 같아요.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거든요.”
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공격 대상을 찾아다니는 것 같아.’
과거에서 종종 공격적인 조현병 환자들을 봤었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병동에서도 주의 깊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제 명함이에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오빠 때문에 불안해서 당분간은 가게도 쉬려고요.”
[Hair by Eugen 원장 유진 / 명동역 8번 출구]
02 -38xx - 0067
010-76xx - 0067
“미용사셨군요. 성함이 유진이십니까?”
Eugen.
공교롭게도 조현병의 옛 명칭인 정신분열병(schizophrenia)을 처음 명명한 독일의 정신과 의사와 이름이 같았다.
“네, 본명이 이유진이에요. 저희 오빠 잘 부탁드립니다.”
보호자는 시현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응급실을 떠났다.
* * *
다음 날 아침.
[system : 병동 장악을 시작합니다. (1/30)]
시현은 여느 때와 같이 하루를 시작했다.
스테이션 너머로 아침약을 받는 환자들이 보였다.
[조동규 남/32세 담당의 R1 천시현/ 담당 교수 Prof. 이광섭]
조동규 또한 간호사로부터 약을 받아 입에 털어 넣은 뒤 물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나요?”
“예에…….”
시현이 인사를 건넸으나 환자는 어눌한 말투로 짧게 대답한 뒤 이내 화장실을 향해 갔다.
지연된 반응.
그리고 여전히 경계하는 듯한 태도.
당분간 환자와 제대로 된 면담을 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 밤에 뒤척임 없이 수면 잘 취함.
- 아침 식사 절반 정도 섭취함.
- 타 환자들과 교류 없으며 홀에서 TV 시청.
보호자의 말에 따르면 입원 전에는 밤마다 밖으로 나가 돌아다닌다고 했는데, 다행히 병동에서는 잠도 잘 잤고 별다른 문제 행동도 없었다.
‘우선은 외래에서 쓰던 대로…….’
김민홍이 입원 직전 약물을 증량했기 때문에 우선 며칠간은 지금 용량으로 유지할 계획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온 조동규가 병동 홀에서 고함을 지르기 전까지는.
“당신,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앵?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젊은 놈이 왜 그렇게 사냐고 욕했잖아! 당신이 뭘 안다고!”
조동규가 병동 한편에서 가만히 TV를 보고 있던 젊은 여자 환자를 향해 으르렁댔다.
“보호사님!”
병동 보호사 2명과 시현이 바로 뛰어나가 조동규를 만류했다.
두 환자가 물리적으로 부딪치는 일은 없었지만 내버려 뒀다가는 싸움이 날 분위기였다.
“병동에서 폭력은 안 됩니다.”
“저 여자가 방금 저 욕하는 거 못 들었어요?”
“우선 병실로 들어가세요. 나중에 면담실에서 따로 이야기하시죠.”
약간의 소란은 있었지만, 환자는 의외로 시현의 말에 순순히 자기 병실로 들어갔다.
‘환청이 있었던 건가?’
자신을 욕하는 내용의 환청은 조현병 환자들에게 흔한 증상 중 하나.
밤새 괜찮다가도 환청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담당의 말에 저항하지 않고 병실로 들어가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렇지 않으면 안정실에 격리 후 안정제를 주사해야 할 상황이 될지도 몰랐다.
- Lorazepam 1mg BID, Risperidone 2mg BID, Valproic acid 500mg BID 로 증량함
시현은 기존 약물들을 증량하도록 추가 처방을 한 뒤 회진 준비를 시작했다.
* * *
“901호 조동규 환자, 수개월 전부터 지속되는 환청과 피해망상을 주소로 외래 통해 입원하신 분입니다. 입원 전 공격적인 행동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래요. 병동에 입원한 후로는 어떤가요?”
시현의 보고를 듣고 이광섭 교수가 되물었다.
“어젯밤까지는 수면 잘 취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 금일 아침에는 다른 환자와 마찰이 있었습니다. Hallucinatory behavior(환각 행동, 환청에 따른 행동)로 생각됩니다.”
“그렇군요. 안전에 특별히 신경 씁시다. 치프 외래에서 올라온 걸로 아는데, 코멘트 있나요?”
이광섭이 이번에는 김민홍에게 물었다.
“환청이 있기는 했지만, 그동안 행동 문제는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병식(병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는 정도)도 있는 환자였는데…….”
김민홍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보호자에 의하면 집에서도 위협적인 때가 많다고 합니다. 밤마다 자주 외출을 하는데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시현이 부연 설명했다.
“보호자? 저 환자 보호자가 같이 왔었어?”
“네. 어제 아내분이 같이 병동에 올라왔습니다.”
“아내? 저 환자 미혼인데? 혹시 여자친구 아니야? 보험회사 다닌다는?”
“아닙니다. 아내분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민홍과 시현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너무도 달랐다.
서로 다른 환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
‘혹시 양다리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환자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일관성이 없다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한번 잘 평가해 봅시다.”
이광섭은 두 사람의 말을 번갈아 듣고 짧게 코멘트 한 뒤 회진을 마쳤다.
“외래에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입원하니까 특이한 구석이 있네.”
회의실을 나오며 김민홍이 시현에게 말했다.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잘 살펴보고.”
“네, 선생님.”
때마침 환자가 스테이션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가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느릿느릿 움직이며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
“저런 거 보면 전형적인 조현병 환자 같은데. 그치?”
“네, 하지만 그동안 본 환자들하고는 뭔가 다른 것 같습니다.”
시현이 외래 의무기록과 간호기록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입원 환자 딱 한 명 본 애가 무슨. 하하하.”
‘아차.’
시현의 대답에 김민홍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장실에 갔던 조동규 환자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것.
“조동규 환자분?”
순간 못 알아볼 뻔했다.
시현의 눈앞에 머리를 감고 깔끔하게 면도를 한 조동규가 서 있었다. 짧은 시간에 샤워까지 마쳤는지 체취도 전혀 나지 않았다.
“담당의 선생님, 혹시 전화 좀 쓸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입원 후 첫 며칠간은 외출과 전화 통화가 제한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혹시 이 물건들을 좀 가져와 달라고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내한테요.”
환자가 메모지에 이것저것을 적고는 시현에게 건넸다.
외출과 전화가 안 된다는 말에도 짜증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공손해 보이기까지 했다.
- 수건, 연습장, 잡지…… 과자.
시현은 쪽지 내용을 확인하는 동시에 환자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메모지를 건넨 환자의 얼굴 표정, 자세 그리고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그의 시선이 손끝에서 멈췄다.
“네, 제가 급하게 확인할 것이 있어서 이것만 마저 보고 전달해드리겠습니다.”
[system : 병동 장악 진행 중. (17/30)]
마침 아침에 나간 혈액검사 결과들이 나올 시간이라 파악해둬야 했다.
“네, 확실히 입원하니까 좋네요. 약도 잘 받는 것 같고요. 훨씬 나아진 것 같습니다.”
환자는 시현을 향해 씩 웃어 보이고는 다시 스테이션에서 멀어져갔다.
‘낯이 익어. 어디서 봤더라?’
나름 친근감을 표현하고 싶은 의도였겠지만 결과는 완전히 실패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현은 환자의 표정에서 도리어 섬뜩함을 느꼈다. 이내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전까지 환각 행동을 보이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일반적인 경과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환자였다.
입원 후 안정감을 찾으면서 증상이 빠르게 호전되는 환자들은 종종 있었지만, 이건 너무 빠르지 않은가.
문득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궁금해졌다.
이 정도라면 분명 유의미한 변화가 있을 터.
[조동규 남/32세 담당의 R1 천시현/ 담당 교수 Prof. 이광섭]
과거에 본 적이 없는 환자라 ‘세상의 모든 차트’에 기록이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더보기’ 를 터치했다.
[Lorazepam 1mg BID, Risperidone 2mg BID, Valproic acid 500mg BID]
약물은 회진 전 시현이 입력한 그대로.
하지만 이어진 내용은 시현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치료 진척도 0/100 퇴원까지 6일 2시간 10분 29초]
‘이게 왜 이렇게…….’
치료 진척도가 0인 것은 말이 안 된다.
김민홍이 외래에서 치료해오던 것도 있고,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태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혹시 뇌 병변이 원인인가? 아니면 다른 기질적 원인으로?’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가 아닌 뇌병변이나 감염성 질환에 의한 증상이라면 저렇게 시시각각 증상이 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시현은 곧바로 조동규의 뇌 MRI 영상 판독지와 혈액검사 결과를 살폈다.
검사 결과를 하나하나 확인해가던 시현의 눈이 커졌다.
[Serum valproic acid Level : 0 mg/L
(not detected)]
혈중 발프로산 미검출.
환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