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Chapter 7. 뜻밖의 환자(3)
발프로산(Valproic acid).
뇌전증 치료제로 알려져 있지만, 정신과에서는 주로 조울증 증상이나 공격성을 완화하기 위해 주로 처방한다.
혈중 농도가 낮을 때는 효과가 없고 높을 때는 독성을 띠는 성질 때문에 주기적인 혈액검사로 적정 농도를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혈액검사에서 발프로산 레벨이 0mg/L…….’
약물의 혈중 농도가 생각보다 낮게 나오는 경우는 과거에도 종종 겪었다.
소화기에서 제대로 흡수가 되지 않아서 일 수도 있고 다른 약물과의 상호작용으로 체내에서 빠르게 사라져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히 0으로 나오는 경우의 수는 단 하나뿐이다.
‘환자가 약을 복용하고 있지 않아.’
이 정도면 실수로 하루 이틀 약을 거른 것도 아니다.
입원 전 외래 진료 때부터 전혀 먹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아침 식후 간호사에게 약을 받아 복용한 뒤 곧바로 화장실을 향하던 환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랬지?’
일단은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지하지 못해 약물 복용 필요성을 부정하는 경우.
하지만 스스로 병원을 찾아와 입원까지 요청한 마당에 약을 거부하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나머지 가능성은…….’
증상이 없는 사람이 환자 행세를 하는 경우.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선 이 가능성이 가장 유력했다.
전자라면 지금처럼 꾸준히 면담하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독려하면 된다.
환자 또한 증상으로 고통받는 면이 있는 만큼 열심히 찾으면 치료의 실마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라면?’
이 경우엔 환자가 증상을 가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시현의 복잡한 속내와는 달리 환자는 병동 홀에 앉아 느긋하게 TV를 보고 있었다.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하고 깨끗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어제 봤던 만성 조현병 환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뭘까?’
가짜 환자. 심리검사. 자의 입원.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딱히 짚이는 것은 없다.
마침 병동 TV에 유명 시사 프로그램의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다.
<미스테리 사건 추적, 그것을 알고 싶나?>
마치 시현에게 질문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래, 알고 싶다. 좀 알고 싶어.’
답답한 마음에 바깥바람이라도 쏘일까 일어나는데 새로운 단어들이 뇌리를 스쳤다.
사건 현장.
옷에 묻은 남의 피.
그리고 미용실 원장.
‘미용실 원장?’
시현은 스테이션에 선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명동 미용사 살인사건?’
회귀 전 2년차 무렵에 있었던 꽤 유명한 사건이었다.
명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던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동거인에게 살해당했다.
처음에는 치정으로 인한 우발적 살인으로 수사가 진행되었으나, 파면 팔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추가되었다.
범인의 집에서 발견된 고가의 장물들과 추가 범행을 의심하게 만드는 다수의 증거들.
연쇄 살인 사건은 금세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현이 이 사건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범인이 정신질환을 이유로 감형을 요구했기 때문.
- 정신질환자의 범행을 감형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던 주제라 이광섭이 회진 때 레지던트들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설마 그 사람일까? 시내에 미용실이 한두 곳 있는 것도 아니고 조현병도 흔한 질환인데.’
회귀 전 언론에 공개된 범인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환자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섬뜩함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 Hair by Eugen 원장 유진 / 명동역 8번 출구
보호자가 준 명함이 아직 가운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뭐,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
시현은 빈 면담실에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 * *
- 여보세요.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뒤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처음 듣는 목소리.
어제 응급실에서 만났던 보호자는 아니었다.
“이유진 씨 핸드폰 맞습니까?”
- 네, 맞아요. 지금 바쁘신데 어디라고 전해드릴까요?
“삼아대병원 정신과 천시현이라고 해주십시오.”
- 잠시만요. 원장님!
전화를 받은 이는 미용실 직원인 모양이었다.
- 네, 선생님. 이유진입니다.
직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유진 본인이 전화를 받았다.
“몇 가지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남편께서 밤에 자주 외출하시게 된 게 언제부터인가요?”
- 음, 한 1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요즘엔 좀 더 자주 나가고요.
‘최근 1년이라. 어쩌면…….’
시현이 바로 다음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렇군요. 혹시 요즘 집에서 못 보던 물건들이 보이거나 하지 않던가요?”
- 못 보던 물건이요? 예를 들면 어떤?
“패물이나 귀중품 종류로요.”
시현은 회귀 전 범인의 집에서 발견된 장물들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 그게 그……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던진 질문에 이유진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 사실 얼마 전부터 집에서 못 보던 반지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유진에 따르면, 집에서 못 보던 여자 반지가 나오자 조동규에게 따져 물었다고 한다.
-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동규는 도예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손님이 작업을 하다가 놓고 간 것을 가게에 두기가 뭐해서 집으로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 손님에게 돌려줬다고 한 반지를 오빠 차에서 다시 발견하기 전까지는요.
이유진과 이야기할수록 석연치 않은 점들이 늘어났다.
“혹시 두 분은 정식 부부이신가요 사실혼 관계이신가요?”
시현이 물었다.
꼭 필요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이것만큼은 맞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혼인 신고는 아직 안 했어요.
하지만 대답은 역시나였다.
과거 살인사건의 피해자 또한 범인의 배우자가 아닌 동거인이었다. 집에서는 장물과 피 묻은 옷가지 등 증거물이라 할 만한 것들이 나왔었고.
시현의 의심은 점점 확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동규씨가 위험한 일을 계속하고 다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 네, 저도요. 잘 치료 받고 나아졌으면 좋겠는데…….
‘치료 진척도가 0인 이유가 이거였어.’
연쇄 살인을 저지를 정도의 지독한 반사회성.
안타깝게도 이런 성향은 치료가 쉽지 않다.
극단적으로 반사회성 자체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신고해야 합니다. 더 큰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동거인을 경찰에 고발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지만, 꼭 설득해야 했다.
위험에 처한, 그리고 위험에 처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이유진 본인도 포함해서.
- 신, 신고라고요?
“네 우선 집에 다른 장물들이 있는지 더 찾아보시고 그리고…….”
시현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이유진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이걸 어떡한다.’
면담실을 나온 시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 당장은 어렵겠어요. 병 때문에 그런 거지 오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옷에 다른 사람 피가 묻어있는데도 조동규 씨를 신고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이겠어요?”
- 그냥 지인들하고 다툰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좀 더 치료해보고…….
이유진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무조건 신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죽을 수도 있어요!’
답답한 마음에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저, 천시현 선생님?”
누군가 복도에 서 있는 시현을 불렀다.
조동규였다. 통화에 열중하느라 몰랐는데, 벌써 면담시간이 다 되었다.
“아, 조동규 님. 이쪽으로 오시죠.”
시현이 면담실로 조동규를 안내했다.
핸드폰은 무음모드로 했고, 간단한 메모를 위해 종이 차트를 꺼냈다.
“오늘 기분은 좀 어떠세요?”
“아침에 잠깐 다른 환자분한테 실수하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분께는 죄송하다고 사과했습니다.”
확실히 지금 모습만 본다면 몇 시간 전 타 환자와 시비가 붙었던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소리 들리는 것도 줄어들었나요?”
“네, 입원 전에는 정말 심했는데 여기 오고 나서 90프로는 줄어든 것 같아요. 약이 정말 잘 듣는가 봐요.”
퍽이나.
시현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주로 어떤 소리가 들리던가요?”
“지금은 안 들리지만, 전에는 ‘죽여! 죽이라고!’ 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렸어요. 심할 때는 현실감이 없어지는데…… 잘못하면 정말 그렇게 하겠더라니까요?”
심각한 이야기인데 조동규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심지어 약간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 죽이라는 환청이 종일 들렸어요. 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과거 모자이크 처리된 범인이 했던 말이 겹쳐졌다.
그 말을 듣다 보니 처음에는 소름이 돋았는데 차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우리 환자들을 걸고넘어져?’
사실 언론에 노출된 몇몇 사례가 자극적이라서 그렇지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일반 인구와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핑계로 감형을 요구하는 것이 더 문제다.
결과적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강해지고 정작 치료 잘 받고 있는 선량한 환자들이 피해를 본다.
“남자 목소리인가요? 여자 목소리인가요?”
일단은 더 보기로 했다.
이 인간이 질환에 대해 얼마나 공부해왔는지.
그리고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남자 목소리예요. 어려서 굉장히 엄하고 폭력적인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거든요. 혹시 그런 영향일까요?”
이젠 부모 탓까지.
면담할 내용을 나름 성실하게 준비해 온 것 같았다.
‘슬슬 시작해볼까?’
시현이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증상이 나아졌다니 다행입니다만, 일반적인 환자분들과는 증상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 조동규의 말을 듣기만 하던 시현이 자신의 의견을 낸 것은 처음이었다.
“음, 그런가요?”
순간 조동규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환청이 비특이적이랄까요?”
“비특이적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동일한 단어가 그렇게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건 환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강박에 가깝죠. 혹시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건 아닙니까?”
시현이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설, 설마요. 그럴 리가요. 선생님 농담도 잘하십니다.”
조동규가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치료는 되는 거죠? 저는 너무 괴로운데요…….”
“소량의 안정제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평소 불면증이 있으시니 수면제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그걸로 충분할까요? 그럼 진단은 어떻게 나오나요? 외래에서는 ‘조현병’이라고 하던데.”
조동규가 조심스럽게 진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진단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일단 증상이 전형적이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약물에 대한 반응도 일반적이지 않고요.”
“하하. 그건 제가 워낙 약이 잘 안 받는 체질이라.”
“지금 처방해드린 약물…… 미세한 근육 움직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약물인데, 그런 부분이 전혀 없더군요. 지금 안구 움직임도 너무 자연스러워요.”
시현이 그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제가 환자 행세라도 하고 있다 이 말입니까?”
조동규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그냥 낫고 싶은 환자라고요. 없는 살림에 비싼 입원비 내가면서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혹시 모르죠. 야산에 사람 몇 묻어두고 병원엔 보험 삼아 오셨을지도요?”
시현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하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저는 농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어느덧 조동규를 바라보는 시현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너 뭐야?”
다음 순간 조동규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환자… 아니, 조동규 씨 당신이 그동안 해온 일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두죠.”
“어차피 증거도 없는 거 입 함부로 놀리면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내일 퇴원할 거니까 진단서나 신경 써서 잘 써놓고. 제명에 죽고 싶으면 내 말 명심해.”
탕!
환자가 나가고 텅 빈 면담실.
시현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고.
시현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