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Chapter 7. 뜻밖의 환자(4)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시현이 입을 열었다.
“…….”
대답 없이 흐르는 통화 시간.
이제 공은 이유진에게로 넘어갔다.
“조동규씨는 곧 퇴원할 겁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시현은 당부의 말을 남긴 뒤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 * *
다음 날 아침회진.
“조동규님은 오늘 퇴원이신가요?”
901호 병실에 들어선 이광섭 교수가 조동규에게 물었다.
“네, 교수님. 많이 좋아졌습니다.”
환자는 한시라도 빨리 병원을 떠나고 싶었는지 아침 일찍 사복으로 갈아입고 퇴원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외래에서 뵙겠습니다.”
“교수님, 혹시 진단서 발급 가능할까요? 회사에 제출하려고 하는데…….”
극도로 공손한 태도.
면담실에서 시현을 위협하던 모습과는 180도 달랐다.
“입퇴원 확인서를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평가 기간이 부족하니 진단서는 퇴원 후 외래에서 다시 상의하시죠.”
이광섭의 ‘상의’는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자세한 상황은 말하지 않았음에도 환자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이렇게 되나.’
어찌 됐든 조동규는 오늘 병동을 떠난다.
여기서는 진단서는 받지 못했을지라도 다른 병원 정신과에 입원해서 비슷한 내용의 연기를 하며 조현병 환자 행세를 할 것이다.
보호자에게 사정을 알렸음에도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씁쓸함을 느끼며 다음 병실로 넘어가려는데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시현을 불렀다.
“천시현 선생님!”
병동 수간호사였다.
“지금 병동 밖에 사람들이 왔는데요. 잠깐 봐주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입니까?”
시현은 황급히 병동 입구를 향했다.
“서울중앙지검 강현욱 검사입니다.”
인터폰으로 보니 건장한 체격의 남성 4명이 병동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조동규 씨 때문에 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딸깍.
시현은 지체 없이 병동문을 열었다.
“조동규 씨, 당신을 김현지 씨 실종 사건 주요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강현욱 검사와 함께 온 수사관들이 양쪽에서 그를 붙들었다.
회진 중에 병동에 수사관들이 들이닥치다니.
이광섭 교수도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거 놔! 난 치료 받아야 할 환자라고!!”
“조사를 미뤄야 할 만큼 심각한 상태입니까?”
강현욱이 묻자 조동규는 절박한 눈빛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게…….”
대답하기에 앞서 이광섭의 표정을 살폈다.
미처 상황을 설명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평소와 같은 인자한 표정으로 시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오늘 퇴원 예정인 분입니다.”
“그렇다는군요. 이만 가시죠.”
강현욱의 말에 조동규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병동 밖으로 끌려나갔다. 퇴원 채비를 다 해둔 터라 더 지체할 것도 없었다.
“신고자에게 상황은 대충 들었습니다. 혹시 따로 전할 말씀이 있으시면 이쪽으로 연락주십시오.”
강현욱은 시현에게 명함을 건넨 뒤 바로 병동을 떠났다.
* * *
다시 병동 회의실.
“어떻게 된 일인가? 설명해보게.”
이광섭이 자리에 앉자마자 시현에게 물었다.
“환자가 입원 전에 범죄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보호자 신고를 받고 온 것 같습니다.”
“보호자가 신고를? 그런데 왜 이 시점일까?”
- 혹시 천 선생이 따로 언질을 준 건가?
아마도 이렇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동안 잠잠했던 보호자가 환자가 퇴원할 무렵 신고를 했다.
이광섭은 혹여 시현이 진료 중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묻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시현의 대답에 이광섭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레지던트들도 병동 간호사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진료 중 알게 된 사실을 환자 동의 없이 외부에 알리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
“천 선생, 아무리 환자가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비밀 보장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아니야.”
“타해 위협이 너무 큰 환자였습니다.”
시현은 조동규의 최근 행적과 보호자가 느꼈던 공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증상 호소에 일관성이 없었다는 것과 혈액검사에서 약물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까지 이야기하자 이광섭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했다.
“저는 이 케이스가 ‘타라소프 사건’ 이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흐음.”
이광섭이 침음했다.
타라소프 사건.
1969년 10월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타라소프라는 여학생이 자신을 스토킹하던 포드다르라는 남학생에게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었다.
문제는 포드다르를 상담했던 임상심리사가 위험을 감지하고 여러 차례 보고했음에도 대학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타라소프의 부모는 대학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승소했다.
“자해 또는 타해 가능성이 명백한 경우라면, 비밀 보장 의무에 예외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이 경우엔 환자라고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고요.”
이광섭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천시현 선생이 환자를 열심히 봤군요. 그래요. 담당의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게 맞는 것이겠죠.”
그리고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법무팀과 상의합시다.”
이광섭은 더는 조동규의 일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
딩동!
[system : 정신과 과장 이광섭이 사용자에게 상당한 신뢰를 보입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system : ‘세상의 모든 차트’의 내용이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1차 예방 전문가 - 극악무도한 범죄의 사전 차단에 성공하였습니다. (불가능 난이도 +5,000P)]
‘5천 포인트!!!’
알림창을 확인한 시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일 퀘스트 10번을 해야 얻을 수 있는 보상이었다.
‘하긴, 사람 목숨을 여럿 구한 셈이니까.’
의사로서 환자의 생명을 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보상을 받을 자격은 충분해 보였다.
“올, 천시현! 환자 꼼꼼하게 잘 봤는데? 잘했어.”
이광섭이 회의실을 나선 뒤 권진은이 감탄하며 말했다.
“전형적인 스키조(조현병) 환자인 줄 알았는데 엄청 까다로운 케이스였네. 수고했어.”
시현이 노련하게 처리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꽤나 고전할 수 있었던 케이스.
그런 환자를 1년차에게 배정한 김민홍은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어? 지금 시간이?”
9:15 AM
김민홍이 허겁지겁 핸드폰을 확인했다.
“우오오아!”
그의 입꼬리가 거침없이 올라갔다.
또다시 상한가.
방금까지의 미안한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민홍을 비롯한 레지던트들은 주말을 앞두고 모든 주식을 처분했다. 정확한 액수는 말하지 않았지만, 꽤 많은 수익을 얻었을 것이다.
시현이 부추긴 덕에 김민홍은 과거에 비해 더 공격적인 투자를 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단기 수익률 대회를 했다면 단연코 1등을 차지했을 것이다.
“한 주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그만 다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솔직히 한두 번은 더 오를 수도 있었지만, 이후 상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심장 쫄깃한 단타 대회 하느라고 고생들 많았어. 주말이기는 한데…… 오늘만큼은 회식을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평소라면 질색을 할 금요일 회식.
하지만 오늘만큼은 누구 하나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심지어 최지훈도 참석하기로 했다.
김민홍이 그래도 동기라고 최지훈을 챙긴 모양이었다.
그 또한 다른 레지던트들과 매매 패턴을 맞춰가면서 손실을 만회하고 결국에는 어느 정도 수익을 냈다.
* * *
7:00 PM
병원 근처 식당.
“어, 왔어?”
오늘 모임에는 낯익은 얼굴이 한 명 더 왔다.
김민홍의 여자친구이자 미래의 우현이 엄마, 최세영이었다.
하마터면 형수님 오셨냐고 반갑게 맞을 뻔했다.
“안녕하세요? 신규 1년차 천시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시현이 동기 황진호입니다.”
“반가워요. 하 선생님 권 선생님도 오랜만이에요!”
김민홍과 사귄 지 오래되어 레지던트들과는 안면이 있었다.
“오빠는 이번 주 내내 좋은 일 있었나 봐?”
김민홍의 표정은 도무지 숨길 수가 없다.
“그럼! 어쩌면 우리 신혼집 바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김민홍이 신이 나서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최세영 또한 집을 빨리 장만할 수 있다는 소식에 상기된 모습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오빠 완전 신난 것 같은데요? 원래 투자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니오. 저도 그 종목은 치프 선생님 말씀 듣고 처음 알았습니다. 도리어 제가 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늘?”
순간 최세영의 눈에 이채가 돌았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 대단했다면서요? 투자에 참고하는 지표가 따로 있나요?”
꽤 까다로운 질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보조 지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거래량 정도 확인하는데 이번엔 왠지 계속 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그냥 감이었습니다.”
“뭔가 못 미더운 듯하면서 믿음이 가는 희한한 느낌이네요?”
최세영이 웃으며 말했다.
“황진호 선생님도 할 만해요? 오빠는 1년차 땐 엄청 힘들어했는데…….”
“네, 치프 선생님이 잘 가르쳐주셔서 할 만합니다!”
황진호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봤지? 내가 이렇게 우리 1년차들한테 잘한다니까?”
“에이, 선생님 외래에서 힘든 환자 시현이 보라고 배정해주고 그건 왜 빼고 말해요? 병동에 수사관들까지 왔었잖아요?”
2년차 권진은이 김민홍에게 핀잔을 주었다. 의국에서야 후배지만 본래 친구였던 만큼 사석에서는 편한 말투였다.
“외래가 좀 바빴어야지. 환자 정신없이 보느라 놓친 게 좀 있었나 봐. 시현아, 내 맘 알지? 한 잔 받아.”
“괜찮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시현이 김민홍이 주는 잔을 받으며 말했다.
인사치레 같았지만 사실이었다.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 일부러 병동에 입원한 환자는 지금껏 경험한 적이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었길래 그래요?”
김민홍이 오늘 아침 회진에서 있었던 일을 최세영에게 설명해주었다.
자신이 외래에서 입원시킨 환자가 알고 보니 가짜 환자였으며 다행히 1년차가 기지를 발휘하여 수사기관으로 인도하게 됐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천시현 선생님은 어떻게 안 거예요?”
또다시 까다로운 질문.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가 회귀 전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왠지 환자가 자꾸 뭘 숨기는 것 같아서 파고들다보니…….”
“아, 네…….”
최세영은 의아했지만 다들 들떠있는 분위기라 그런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긴긴 회식이 끝나고.
레지던트들은 병원 숙소 앞에서 헤어졌다.
김민홍이 대리 기사와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시현과 최세영이 단둘이 남았다.
“오빠가 저렇게 좋아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네, 저도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시현이 무심코 대답했다.
어색한 침묵.
전조등을 켠 김민홍의 차가 서서히 다가올 무렵 최세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천시현 선생님, 선생님은 혹시 ‘돌아온 사람’인가요?”
최세영의 마지막 질문.
시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