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20화 (20/195)

20화 Chapter 8. ER (2)

“채이진 선생님, 노티 드리겠습니다. 40세 남자 환자분으로 1시간 전부터 지속되는 쥐어짜는 듯한 흉통을 주소로 내원하셨습니다. 환자는…….”

채이진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인턴이 다가와 노티를 시작했다.

반가운 마음에 순간 아는 척을 할 뻔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의 두 사람은 친분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시현은 오래된 기억을 되짚어갔다.

* * *

4년 전.

[20xx 신입 레지던트 오리엔테이션]

대부분이 삼아대병원에서 인턴을 같이 한 친구들인 가운데 타병원 출신 채이진은 유독 눈에 띄었다.

- 쟤는 누구래? 처음 보는데?

- 한국대 출신이라는데? 거기서 인턴도 하고.

- 한국대면 굳이 우리 병원으로 올 필요가 있나?

몇몇 동기들이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대 의대는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최고의 의대 중 하나였고, 한국대 병원 또한 병상 수 1, 2위를 다투는 초대형 병원이었다.

- 여길 왜 온 거야? 거기서 성적도 좋았다는데.

- 마이너(인기과) 하려다가 경쟁에서 밀려서?

- 마이너는 무슨. 내과 레지던트인데?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굳이 삼아대병원에 지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채이진이 이목을 끈 것은 비단 출신학교 때문만이 아니었다.

“시현아, 저기 봐봐 저 선생님 정말 예쁘지 않냐?”

시현의 인턴 동기 서혁상이었다.

“어? 그러네…….”

“삼아대 의대에는 없는 비주얼이야. 진짜 내 스타일인 것 같아. 이번엔 진짜야.”

정확히 21번째.

서혁상과 의예과 1학년 일반 생물 시간에 같은 실험조를 하며 알고 지낸 이래,

시현은 그의 ‘진짜 내 스타일’인 여학우를 20명이나 보았다.

문제는 그 수 많은 여학우들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1도 없었다는 것.

그냥 서혁상 본인이 타고난 금사빠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제 같은 내과 의국 동기가 되었는데 가서 인사라도…….”

넋을 놓고 채이진을 보던 서혁상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오호, 이번엔 뭔가…….’

그를 바라보던 시현의 눈에 기대감이 돌았다.

“아니지. 초면인데 갑자기 너무 친한 척을 하면 불편하게 생각하실지도 몰라.”

호기롭게 몸을 일으키려던 서혁상이 다시 주저앉았다.

‘그러면 그렇지.’

서혁상은 워낙 낯가림이 심했다.

특히나 이성과 이야기할 때면,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고 얼굴이 붉어지는 체질이라 쉽게 말도 걸지 못했다.

사회불안장애 환자들이 종종 호소하는, 이른바 적면공포 증상이었는데 시현이 진지하게 치료를 고려해볼 정도로 심했다.

덕분에 그는 전문의 시험 직전까지도 모쏠이었다.

“혁상아, 그러지 말고 정서랑 은형이 형하고 같이 가서 인사하고 와. 얼른!”

연정서와 정은형은 모두 신규 내과 1년차 동기들이었다.

다른 내과 동기들과 함께한 후에야 서혁상은 간신히 채이진과 통성명을 할 수 있었다.

시현이 그녀를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 * *

‘이런 부분이 참 어렵단 말이지.’

레지던트 수련 기간 전체를 미리 경험하고 돌아온 터라 의학 지식만큼은 이미 전문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특정 시점에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답할 수 있지만, 언제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를 답하기란 꽤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

전자가 의미 기억(semantic memory)에 더 가깝다면 후자는 일화 기억(episodic memory)에 메타인지가 결합 된 복잡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좀 더 신경 써야겠어.’

며칠 전 최세영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레지던트 숙소 쪽으로 걸어가는데, 건너편에서 누군가 통화를 하며 응급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뭐? 가슴통증?”

특유의 짜증 섞인 목소리.

내과 레지던트 3년차 남혜미였다.

“ST 세그멘트가 어떻다고? 제대로 얘기해! 교수님한테 보고 드려야 할 수도 있으니까.”

환자의 주증상은 흉통, 특히 쥐어짜는 듯한 양상의 심한 흉통이었다.

어쩌면 심근경색이나 불안정 협심증과 같은 응급 상황일 수도 있었다.

남혜미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아스피린하고 플라빅스 주고 랩 빨리 내달라고 해!”

‘ST 세그멘트라면…….’

심전도를 구성하는 파형 중 일부분으로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 중 하나였다.

거기에 혈전 생성을 억제하는 약물들까지.

아무래도 응급 상황인 것 같았다.

‘오늘 3년차 당직이 남혜미인가?’

응급실에는 1년차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환자들이 종종 오기 때문에 2년차 또는 그 이상의 시니어 레지던트가 1년차와 함께 당직을 서곤 했다.

1년차의 뒤를 봐준다고 하여 ‘백당직’이라고 부른다.

‘아까 그 환자인가?’

분명 시현이 응급실에서 나오기 직전에 들었던 환자의 주증상도 흉통이었다.

멀어져가는 남혜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쓴웃음이 나왔다.

아랫년차들 휘어잡기로 유명한 저 남혜미가 백당직이라니.

채이진의 주말 당직도 순탄치는 않아 보였다.

시현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응급실 환자 리스트를 띄웠다.

‘잠깐. 채이진에 남혜미…… 그리고 흉통?’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정미 씨는 퇴실하셨고.’

자신의 환자는 이미 응급실을 떠났지만 채이진과 남혜미가 함께 보고 있는 환자가 마음에 걸렸다.

차트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을 때, 시현의 눈이 커졌다.

‘그 환자다.’

오늘 당직은 잠깐 눈붙이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 * *

[3:03 AM 레지던트 숙소]

위이이잉.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다.

“정신과 1년차 천시현입니다.”

“내과 1년차 채이진입니다.”

잠깐의 침묵.

수화기 너머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채이진이 눈에 선했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하지만, 환자 협진 의뢰 드려도 될까요?

사실 그녀의 다음 대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응급실에 정성환 환자 때문에 전화 주셨죠?”

“네? 네…….”

“가서 듣죠. 잠시만요.”

이 시간에 바로 와준다니.

예상치 못한 대답에 채이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3:06 AM 응급실.]

“늦은 시간인데 죄송해요. 저희 윗년차 선생님께서 환자 병실로 입원시키기 전에 타과 협진을 다 봐두라고 하셔서…….”

채이진이 말끝을 흐렸다.

“환자분이 평소에 감정 기복이 좀 있었다고 하고 술을 즐겨 드셨다고 하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 간단히 코멘트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역시나 과거와 같은 전개.

시현은 응급실 PC에 환자 차트를 띄웠다.

[정성환 남/41세 인턴 노민혜 / 내과 채이진]

“ST 세그멘트하고 트로포닌 수치가 안정적이라서 바로 PCI(관상동맥시술)을 할 상황은 아닌가 보네요?”

“네? 아…… 네, 맞아요. 일단은 병실로 올라갈 환자분이세요.”

“NSTEMI(비ST분절상승심근경색)까지는 아니고 우선은 UA(불안정 협심증) 단계로 보시는 거죠?”

시현이 검사 결과를 쭉 확인한 뒤 물었다.

채이진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타과 레지던트가 미처 설명하기도 전에 자기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신과 진료가 급한 환자는 절대 아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야심한 시각에 타과 레지던트를 불러 진료를 보라고 하는 건 남혜미가 닦달해서였다.

- 불안장애 때문에 심박수가 올라가고 부하가 늘어나면서 증상이 나빠졌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입원 중에 알코올 금단이 오면 어떡해?

대략 이런 논리였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실상은 입원 후 본인이 담당의가 되면 타과에 컨설트도 직접 내야 하니 응급실에서 아랫년차를 시켜 해결하고 가려는 속셈이었겠지만.

사실 정신과 진료가 급한 환자가 아니라는 건 채이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시현을 호출하는 것이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환자분 잠깐 면담하고 노트 남길게요.”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시현은 별다른 불평 없이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향했다.

* * *

“정성환님, 저는 정신과 당직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정신과요? 저는 심장이 아파서 온 사람인데요?”

역시나.

남혜미가 의뢰한 환자들의 반응이 대체로 이렇다.

환자 본인도 불편함이 없고 의학적으로도 꼭 필요한 협진인가 싶지만, 혹여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책임 회피를 위해 해두면 좋은 협진.

충분히 예상하고 들어왔음에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환자만은 달랐다.

남혜미의 의도와는 다르게 시현의 역할이 분명 존재했다.

[정성환 남/41세 인턴 노민혜 / 내과 채이진]

[치료 진척도 18/100 퇴원까지 4일 8시간 20분 19초]

‘치료 진척도가 낮아.’

이제 막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 상태를 고려하면 치료 진척도가 낮은 건 납득 가능한 수준이었다. 정작 우려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생존확률 13%]

다른 환자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항목.

이대로 둘 경우, 환자는 십중팔구 사망한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회귀 전에도 정성환 환자는 입원 며칠 후 사망했었다.

- 선생님, 며칠 전에 응급실에서 봐주셨던 환자가 expire(사망) 했어요.

- 심장 쪽 문제가 아니고 외상으로 출혈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좀 더 꼼꼼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채이진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장 문제로 병원에 온 사람이 외상?’

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 부위 외상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시에는 정신과 환자 보기도 바빴고 다른 과 환자 이야기까지 주의 깊게 들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눈앞에 있는 환자에게 답을 구하는 수밖에.

“정성환 님, 혹시 심장 말고 다른 곳이 아프지는 않으세요?”

“다른 곳이요? 글쎄요 지금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다른 곳 아픈 줄은 모르겠는데…….”

“잠깐 진찰 좀 하겠습니다.”

시현은 환자의 머리부터 다리 끝까지 혹여 다친 곳은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환자는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정신과 의사라는 작자가 와서 면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몸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딱히 다친 곳은 안 보이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흉부와 복부까지 살피고 청진도 해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차라리 두부, 흉부, 복부 CT(전산화단층촬영)를 전부 다 찍어보자고 할까?’

현재로서는 외상 부위를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정신과 협진을 하러 온 입장에서 뜬금없이 추가로 CT를 찍어야 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볼 것이 분명했다.

‘믿을 건 진찰뿐인가?’

하지만 그러기에 시현의 진찰 실력은 미천한 수준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해오던 일이라고는 테이블에 앉아 환자와 면담하던 것이 전부.

이런 진찰을 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뭘 더 해봐야…….’

문득 며칠 전 최세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앞으론 조심하세요. 지켜보는 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누가 지켜본다는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확실히 이 새벽에 담당과도 아닌 타과 레지던트가 와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힌트 하나를 툭 던져주고 간다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정신과적으로 당장 불편한 점은 없는 환자니까 그냥 이대로…….’

시현은 환자의 병변을 찾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혹시 평소에 기분이 우울하다거나 불면증이 심하지는 않으셨나요?”

“네? 딱히 그런 점은 없었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과거에 했던 대로 정신과적인 부분만 간략히 면담한 뒤 응급실을 떠나는 것도 방법이긴 했다.

환자에게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지만, 최소한 지금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다음 주에 정욱이 생일이잖아. 선물 샀어?”

울컥.

환자가 보호자에게 건네는 말에 시현은 스테이션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벌써 그렇게 됐나? 얘기 안 했으면 잊을 뻔했다.”

자칫 다음 주에 초상을 치를지도 모르는데 아들 생일 이야기라니.

‘지금 그런 이야기 할 때가 아니라고요.’

하마터면 그렇게 이야기할 뻔했다.

‘이진이한테 외상이 의심되니 병변을 찾아보자고 해야겠어.’

아무 근거도 없이 추가 검사를 요청하는 것은 분명 이상하게 보일 테지만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전신을 다 스캔해서라도…….’

발걸음은 똑같이 스테이션을 향했지만 조금 전과는 분명 다른 의미였다.

시현이 병상 커튼을 열어젖혔다.

다음 순간 시현의 귓가에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딩동!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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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응급실 풍경이 아닌 새로운 알림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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