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22화 (22/195)

22화 Chapter 8. ER (4)

딩동!

[system : 사용자의 의지가 시스템과 공명합니다.]

[새로운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번쩍.

시현이 서 있던 텅 빈 주차장이 갑자기 환한 빛에 휩싸였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천시현 선생님.”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레지던트 조력자.

새로 떠오른 알림창과 함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빛으로 둘러싸인 공간.

시스템 관리자의 진료실에서 느낀 것과 같은 비현실감이다.

“저도 반가워요.”

시현이 대답했다.

“앞으로 진료에 필요한 내용들을 수시로 정보창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밖에 원하는 부분들이 있으면 요청해주십시오.”

“원하는 정보를 요청할 수도 있군요.”

“열람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지금까지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내용만 볼 수 있었다.

‘대화형 인터페이스(Interactive Interface)? 아니,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준다니 비서인가?’

“비슷합니다. 그렇게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듯한 반응.

“어? 방금…….”

시현은 흠칫 놀랐다.

“아, 모든 생각을 공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시현을 안심시켰다.

주로 언어화된 생각에 대해 제한적인 공유가 가능하다는 설명과 함께.

대화를 통해 시스템과 소통하는 것.

그것이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레지던트 조력자’의 첫 번째 기능이었다.

“그런데 자료 요청은 어떻게 하죠?”

“호출 후 필요한 내용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레지던트 조력자’는 너무 깁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사용자 지정 호출 명령을 설정하십시오.”

“시ㄹ…… 아니 ‘소라(SORA)’로 할게요. 괜찮죠?”

SORA.

원래 이름인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레지던트 조력자(Subjective Objective Resident Assistant)에서 따왔다.

“등록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는 ‘SORA’로 불러주십시오.”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말씀도 편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아니 알겠어, SORA.”

앞으로 수시로 부를 텐데 계속 존대를 하기도 애매했다.

“단축 명령어 목록을 표시합니다.”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입원 환자, 응급실 환자 그리고 외래 환자 목록과 같은 흔히 쓰는 메뉴들.

거기에 각종 검사 결과.

심지어 영상 소견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육성으로 말하는 것 말고 다른 입력 방법은 없을까? 혼잣말 같아서 이상한데.”

“명령어를 떠올리는 것으로 대체 가능합니다.”

“한 번 해볼게.”

‘응급실 환자 리스트 띄워줘.’

생각한 그대로 환자 명단이 떠올랐다.

‘입원 환자도 병동별로.’

창들을 펼쳐 놓고 보니 병원 전체에 있는 환자들의 명단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과거 1년차 때 듀얼 모니터만으로도 신세계를 느꼈던 시현이었다.

허공에 뜬 여러 창들을 보니 SF 영화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기본 사용 설명이 완료되었습니다. 혹시 다른 궁금하신 점 있으십니까?”

“없는 것 같아. 우선은.”

“기본 사용 설명을 종료합니다.”

“아, 그래.”

“선생님의 건투를 빌겠습니다.”

SORA는 시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잠깐만, 혹시 아까 포션 추천한 건?”

“관리자님께는 비밀입니다.”

SORA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지고, 이내 빛에 둘러싸인 공간도 삭막한 응급의료센터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천시현 선생님?”

바뀐 풍경에 놀라는 것도 잠시.

뒤쪽에서 누군가 시현을 불렀다.

“아, 채이진 선생님.”

그녀 또한 응급실을 나와 레지던트 숙소동으로 가는 길인 듯했다.

“아, 네. 정성환 환자 수술 시작했나요?”

“네, 방금 들어갔어요. 외과 병동 선생님에게 환자 인계하고 나오는 길이에요.”

“잘됐네요. 다행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환자, 외상은 생각도 못 했어요. 그거 모르고 관상동맥 중재술 들어갔으면…….”

심혈관 조영술 할 때 혈액 응고 방지를 위해 헤파린(항응고제의 일종)을 추가로 쓰기 때문에 출혈이 악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후우.

채이진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놀랬나 보네.’

내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능한 레지던트로 꼽히는 채이진 이었지만 아직은 1년차 초반이었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아직은 내과 의사보다는 인턴에 더 가까운 시기.

눈앞에서 환자를 놓칠 뻔했는데 당황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환자가 다친 걸 아셨어요? 환자 본인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는데.”

“네?”

미처 예상치 못한 질문.

‘일종의 복기인가?’

확실히 학구적인 면이 있는 그녀였다.

시현이 그렇게 판단한 근거를 찾고 자신이 놓친 부분을 파악하려 들고 있었다.

“그냥…… 그 부위에 멍이 보이길래 환자분께 물어봤어요.”

복잡한 설명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시현은 최대한 간단하게 그저 자신이 본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멍이 있었어요? 전 못 봤는데.”

채이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소홀했던 탓에 환자를 놓칠 뻔했다고 자책하는 듯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당연히 안 보였겠지.’

그 또한 ‘시청타촉의 포션’을 쓰기 전에는 몰랐던 부분이었으니까.

“아마도 관점의 차이 아닐까요? 저는 남혜미 선생님이 음주 문제에 대해 봐 달라고 하시길래…… 그 부분에 대해서만 물어봤거든요.”

“관점의 차이요?”

“네. 술 드시고 다친 적은 없는지 최근에 필름이 끊긴 적은 없는지 뭐 그런 것들이요.”

시현이 채이진을 달래듯 말했다.

남혜미로부터 환자 상태에 대해 들은 것은 없었지만, 이렇게 말해두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아, 그래서 남혜미 선생님이…….”

다음 순간 채이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는 솔직히 남혜미 선생님이 괜히 여기저기 협진만 남발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해였네요.”

“네?”

“그런 깊은 뜻을 모르고…… 역시 윗년차 선생님 말씀은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거였어요.”

‘아니 왜 그런 결론이 나와.’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아니 저… 그분을 따르시다가는…….”

시현이 뭔가를 이야기하려 했으나 다음 순간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1골 같은 1도움 – 신속 정확한 협진으로 환자 생존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3,000P)]

‘좋아.’

보상이 지급되는 걸 보니 수술이 시작되면서 환자의 생존 확률이 크게 오른 것 같았다.

D급 아이템을 적시에 사용한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다. 하물며 나중에 나올 상위 아이템 들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포인트를 더 모아야겠어.’

시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7 : 00 AM

이른 아침부터 시현은 응급실 스테이션에 나와 있었다.

- ER 인턴 노민혜입니다. 환자 노티 드리겠습니다.

좀처럼 환자가 없는 시간대에 응급실을 방문한 환자.

환자는 심한 자살사고를 호소했다.

‘하필 병실이 없네.’

시현은 가까스로 환자를 전원할 병원을 찾은 뒤 진료 의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저희 먼저 갈게요.”

응급실 간호사 교대시간. 나이트 근무자들이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시현도 슬슬 9병동에 가봐야 할 시간이다. 황진호에게 당직 인계를 하기 위해, 병동 환자들을 파악해둬야 했다.

사실 최근에는 일일 퀘스트 ‘병동 장악’을 수행하느라 웬만한 내용들은 이미 담당의만큼 알고 있지만.

“선생님, 그때 감사했어요.”

주차장을 가로질러 병동이 있는 신관 건물로 가는 길에 누군가 시현을 불러 세웠다.

“누구…….”

처음 보는 간호사였다.

반짝이는 새 명찰에는 RN 박혜선(Registered Nurse, 정규간호사) 이라고 적혀있다.

‘이번에 들어온 신규인가?’

시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간호사가 말했다.

“저…… 지난번에 친구분이랑 맥주 마시러 오셨을 때.”

‘‘동료 의료진’이 이 사람이었구나.’

신규 간호사라면 충분히 모를 수 있다.

계속 3교대 근무를 하느라 마주치는 시간이 별로 없었을지도 모르고.

“아, 그때 별일 없으셨어요?”

“네. 덕분에요. 너무 놀랐어요. 정말 그런 나쁜 놈인 줄 몰랐는데.”

박혜선 간호사가 커피 4잔이 담긴 캐리어를 건넸다.

“어제 응급실에서 보고서야 우리 병원 레지던트 선생님일 줄 알았어요. 그때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잘 마실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 그리고 휘핑크림이 듬뿍 올라간 카라멜마끼아또가 한 잔.

과거 시현이 1년차 내내 샷 추가해가면서 마시던 음료였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도움은 되는 듯했지만, 덕분에 살도 많이 쪘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단 게 별로 안 당기네.’

딩동!

[system : 업적보상을 지급합니다.]

[그린라이…트? : 이성에게 처음으로 달콤한 음료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린라이트는 절대 아닙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

아니라고 굳이 알려줄 것까지야.

시현은 곧바로 알림창을 닫아버렸다.

* * *

8 : 30 AM

담당의들이 퇴근하고 난 시간대나 주말에는 사실상 1년차들이 응급실이며 병동 전체를 커버한다.

시현은 박혜선이 건넨 커피를 들고 병동을 향했다.

“시현 쌤, 마침 콜하려고 했는데 딱 맞춰 왔네요?”

9병동 간호사 이선지가 시현을 반겼다.

“이거 드시고 하세요.”

시현은 응급실에서 받은 커피 4잔을 고스란히 스테이션에 내려놓았다.

“우와! 대박! 우리 마시라고 따로 사신 거예요?”

“따로 산 건 아니…….”

“난 당 떨어지니까 이거!”

이선지가 냉큼 카라멜마끼아또를 집어 들었다.

딩동!

[system : 업적보상을 지급합니다.]

[오다 주웠다 : 작은 선물로 취향을 저격하였습니다. (어려움 난이도 +500P)]

‘이런 걸로도 보상을 주네.’

커피 4잔으로 포인트를 벌었다.

이런 식이라면 병동에 간식만 열심히 사다 날라도 금방 필요한 아이템들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간호기록과 내일 자로 난 오더들도 쭉 살펴보았으나 눈에 띄는 내용은 없었다.

‘이쪽 일은 다 마무리됐고.’

병동을 간단히 돌아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선지가 말을 붙인다.

“선생님, 근데 그거 진짜예요? 이번에 ER 신규로 들어온 애…… 큰일 당할 뻔했는데 선생님이 잡았다면서요?”

병원 소문은 역시나 빠르다.

시현은 이런 대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 1년차 때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아, 네. 황진호 선생이랑 같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렇게 됐네요.”

대화가 길어질수록 할 일은 쌓여가기에 조금도 붙들리고 싶지 않았다. 얼버무리며 자리를 뜨려는데 또다시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업적보상을 지급합니다.]

[썰을 풀 시간 : 사람들이 당신의 사연에 흥미를 보입니다.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어보세요! (어려움 난이도 +500P/명)]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죠. 사실 그 날은 원래…….”

시현은 어느새 스테이션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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