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23화 (23/195)

23화 chapter 9. 수상한 환자와 더 수상한 보호자 (1)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죠…….”

시현은 어느새 스테이션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포인트가 걸리자 의미 없다고 여겼던 잡담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 잔을 시현 쌤이 낚아챈 거예요? 그 안에 뭘 넣었을까?”

일일 드라마의 다음 회를 재촉하듯 이선지 간호사가 물었다.

“확실한 건 모르죠.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물뽕’인데.”

“그게 뭐예요?”

“진정제처럼 작용하는 약물입니다. 마시면 의식을 잃고 anterograde amnesia(전향성 기억상실)가 생긴다고 해요.”

“헉. 정말요?”

시현의 설명에 이선지 간호사가 울상이 되어 되물었다.

“현화쌤 어떡해요? 예전에 이브닝 끝나고 홍대 놀러 갔을 때…… 혹시 우리도 당한 거 아닐까요? 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이선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때요? 제가 보기에 2차 끝날 때까지는 괜찮으셨던 것 같은데요?”

병동 보호사가 대답했다.

“의식을 잃기는 무슨…… 그날 너 완전 잘 놀던데?”

“제, 제가요?”

“동영상 찍어둔 게 여기 어디 있을 건데 어디 보자…….”

빠밤빰빰 빠밤빰빰 빠빠-

강한 비트의 EDM. 클럽이었다.

핸드폰 화면 중앙에 머리를 푼 이선지 간호사가 신들린 듯한 춤사위를 펼치고 있었다.

“내가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 찍어 뒀다니깐. 너 정말 기억 안 나?”

이선지가 급하게 손을 뻗어 심현화의 핸드폰을 덮었다.

“우와…… 정말 춤을 잘 추시네요.”

“그냥 술 많이 드시고 필름이 끊긴 거 같은데요.”

“와하하하.”

‘이브닝(오후 3시~11시) 끝나면 근무자들끼리 자주 어울렸나 보네.’

과거에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매일 같이 얼굴 보는 사이였음에도 막상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system : 총 2,000P를 획득하였습니다.]

간호사 두 명, 병동 보호사 그리고 스테이션 옆에서 턱을 괴고 선 우울증 아주머니 한 분까지 시현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무용담을 들려주고 얻은 포인트가 환자 한 명 살린 수준으로 쏠쏠했다.

철컥.

“어? 시현이 와 있었네.”

황진호가 9병동 직원용 뒷문을 열고 스테이션으로 들어왔다.

“병동에 특별히 인계할 건 없어. 이따 903호 환자분 외박 나가실 때 보호자 사인만 받으면 돼.”

“그래, 수고했다. 어서 가서 쉬어. 어제 응급실 환자도 많았던 것 같은데.”

황진호는 밤 동안 응급실을 들른 환자 리스트를 보고 온 것 같았다.

“그래. 무슨 일 생기면 불러줘. 숙소 근처에 있을 거야.”

시현은 황진호 몫으로 남겨둔 커피 한 잔을 건넨 뒤 병동을 떠났다.

* * *

일요일 아침 9시.

이제 공식적인 당직은 시현에서 황진호로 바뀌었다.

‘의외로 피곤하지 않네?’

중간중간 응급실 환자를 보느라 실제로 잔 시간은 2시간 남짓.

하지만 ‘숙면 포션’에 ‘회복 포션’까지 사용한 덕분에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뭐 하지?’

마음 같아서는 병원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고 싶은 날씨였다.

창밖에는 가벼운 봄옷 차림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소위 ‘백일 당직’ 기간.

과거에는 레지던트 1년차가 새로 들어오면 무려 백일 동안은 병원에서 숙식 하도록 했다고 한다.

요즘에야 처우가 많이 개선되어서 백일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3, 4월은 암묵적으로 병원 근처에 머물러야 하는 시기였다.

‘1년차가 할 일이 없다니.’

외과 계열 레지던트만큼은 아니겠지만 정신과 1년차 또한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예전 같았으면 주중에 못한 일을 하고 케이스 발표 준비를 하느라 바쁜 주말을 보냈을 테지만, 지금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과거에는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료함이 어색하기만 했다.

[SORA : ‘일일 퀘스트’ 수행을 추천합니다.]

시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SORA가 알림을 띄웠다.

‘일일 퀘스트 보상은 500P, 숙면 포션과 회복 포션을 매일 쓴다고 하면 1,000P.’

며칠 사이 포인트를 많이 획득하기는 했지만 매일 사용하는 포션 값도 만만치 않았다.

생존비가 차감 되는 기분이랄까.

벌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system : 체력 단련을 시작합니다. (0.1/3Km)]

일단은 아침 운동부터.

‘날씨가 너무 좋은데.’

좀 더 멀리 나가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우선은 병원 주변을 달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system : 논문읽기(0/3)를 시작합니다.]

달리기를 마친 뒤에는 곧바로 미리 출력해둔 논문을 보기 시작했다.

「암환자 정신과 자문의뢰의 임상적 특성과 항우울제 사용에 대한 국내 다기관 연구」

오늘의 첫 번째 논문이었다.

논문은 국내 9개 대학병원의 공동연구로 수백 명의 암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거… 데이터 정리하느라 애 좀 썼겠는데.’

시현 또한 회귀 전 임상 연구에 참여하여 대표 저자로서 논문을 투고한 경험이 있다.

덕분에 이제는 논문의 내용뿐 아니라 연구 계획을 세우고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등 전반적인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후속 논문은 항우울제 별로 내약성을 비교하는 내용이 되겠어. 통계 방법론은 생존분석(survival analysis)가 좋겠고.’

그리고 앞으로 나올 논문에 대한 전망까지도.

논문을 보는 안목이 과거 1년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system : 일일 퀘스트 논문읽기(3/3)를 완료하였습니다.]

3편의 논문을 정독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딩동!

[system : 일일 퀘스트 보상 +500P]

‘이제 진짜 뭐하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한가함에 당혹스러울 무렵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시현아, 큰일 났다. 903호 정기철 환자분 갑자기 호흡곤란 있고 혈압 떨어지는데 어제는 괜찮았었어?”

다급한 목소리.

황진호였다.

“어? 어제까지는 증상 없으셨는데? 오늘 아침까지도…….”

‘903호 정기철 환자 차트 띄워줘.’

[SORA : 입원 환자 차트를 출력합니다.]

시현은 황진호의 전화를 받는 동시에 허공에 뜬 시스템창을 통해 환자의 기록을 확인했다.

“내과하고 흉부외과에 협진 의뢰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응급실 환자 한 분만 봐줄 수 있어? 방금 노티가 왔는데 도저히…….”

“그래. 정기철 님 먼저 조치해드려. 응급실은 걱정말고.”

시현이 황진호를 안심시켰다.

‘자꾸 변수가 생기네.’

정신과 병동에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라니.

확실히 과거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시현의 환자가 빨리 퇴원하면서 빈 병실로 새로 입원한 환자였다.

위이이잉.

황진호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응급실이었다.

“선생님, 응급실 인턴 설현수 입니다. 노티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최대한 간단하게.”

“47세 여자 환자. 부정망상을 주증상으로 내원하셨습니다. 환자는…….”

부정망상(不貞妄想).

배우자의 정절을 의심하는 망상으로 의부증이나 의처증을 일컫는 말이었다.

“바로 갈게요. 면담실 자리 비었는지 확인해주시고 환자 옮겨주세요.”

다시 1년차가 된 후로는 인턴들에게 되묻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번 설현수의 노티 또한 싱겁게 끝났다.

‘그런데 왜 처음 듣는 히스토리같지?’

어쩌면 과거에 황진호가 봤을지도 모를 환자였다.

시현은 곧장 응급실을 향했다.

* * *

일요일 응급실은 언제나처럼 전쟁터가 따로 없다.

A라인에는 가장 중증도가 높은 환자들이 누워있었다.

방금 CPR(심폐소생술)이 끝났는지 침상 주변이 어수선하다. 모니터를 보니 지금은 일단 정상 심박동으로 돌아온 것 같다.

“시현이도 콜 받고 온 거야?”

먼저 내려와 있던 시현의 동기, 이비인후과 1년차 남정욱이 아는 척을 했다.

“응, 바빠 보이네.”

“인턴이 개념이 없다…… 아주 그냥 자비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남정욱은 저쪽에서 차트를 쓰고 있는 인턴 설현수를 불렀다.

“야. 인턴. 딕스홀파이크(이석증진단을 위한 검사의 한 종류) 제대로 한 거 맞아?”

“환자분이 목 통증이 심하셔서 끝까지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피지컬(진찰) 이따위로 할래? 네 말만 들어서는 NR(신경과)이랑 ENT(이비인후과) 감별이 어렵잖아! 환자 뇌경색이면! 골든 타임 놓치면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인턴 갈구는 모습이 가히 전율적이다.

1년차가 된 지 몇 주나 됐다고. 벌써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노티 드리겠습니다.”

의기소침한 설현수의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스테이션을 가로질러 면담실로 가는데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인턴 쌤이 그 진찰 다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는데…… 자기네 환자 맞으면 그냥 보면 안 되나?”

“남정욱 선생 변했어. 노티를 왜 저렇게 안 받아줘?”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다.

인턴 때야 어떻게든 병원에 남기 위해 본색을 숨긴 것이었고.

레지던트 남정욱은 후배들 휘어잡기로 악명이 높았으니까.

동기들도 남정욱 아랫년차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정욱이는 알까? 인턴 투표에서 단독 선두로 올해의 워스트 레지던트가 된다는 걸.’

시현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 * *

응급실 내 면담실.

쾡한 표정의 중년 여인이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예상대로 과거에서는 만난 적이 없는 환자였다.

“선생님,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요즘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요. ……저한테 사람을 붙여서 미행도 하는 것 같고요.”

딩동!

[SORA : 환자 정보를 출력합니다.]

[이인임 여/46세 인턴 설현수/ R1 천시현]

[치료 진척도 0/0, 퇴실까지 남은 시간 30분]

‘뭐지?’

백분위로 나오던 치료 진척도가 0/0으로 되어있었다.

시현은 곧바로 다른 과 환자들을 둘러보았다.

[치료 진척도 37/100]

[치료 진척도 55/100]

[치료 진척도 18/100]

모두 평소와 같이 정상적으로 나온다.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건가?’

부정 망상이 쉽지 않은 병이기는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시현은 의아한 마음으로 환자와의 면담을 시작했다.

뒤이어 보호자로 온 남편과 첫째 딸이 면담실에 들어왔다.

“이날 평생 결혼생활 하면서 다른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집사람을 좀 고쳐주세요! 오죽하면 휴일에 응급실까지 왔겠습니까?”

우선 남편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맞아요, 저희 아빠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엄마가 아픈 것 같아요.”

첫째 딸의 의견도 비슷했다.

똑똑.

시현이 보호자에게 몇 가지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 누군가 면담실 문을 두드렸다.

“엄말 왜 여기 데려왔어?”

둘째 딸이었다.

“요즘 아빠가 평소랑 달라지기는 했잖아? 외박도 자주 하고. 선생님 같으면 의심 안 하시겠어요?”

“......”

의사는 법조인이 아니다.

실제로 바람을 피웠는지 여부보다 환자가 느꼈을 분노나 불안감을 다뤄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망상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만큼은 사실 여부가 궁금해졌다.

‘정말 남편은 바람을 피웠을까?’

궁금하다. 진짜로.

1년차로 돌아온 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거짓말 탐지 포션 같은 건 없나?’

바로 그때, 시현의 머릿속에 높은 가격순 첫 페이지에서 봤던 고가의 아이템이 스쳐 지나갔다.

[카이트만의 안경(S) - 카이트만의 평생 연구가 빛을 발합니다. 감정을 분석하고 거짓을 판별합니다.]

코어 아이템 셋 중 하나인 ‘카이트만의 안경’이었다.

거짓을 판별한다니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그런데 이거 엄청 비싸지 않았나?’

[카이트만의 안경 - 999,999+ P]

‘일일 퀘스트를 4년 내내 해도 이건 못 사.’

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이템 설명란 가장 아랫줄 문구가 눈에 띄었다.

[구독 서비스 5,000P / 1일로 이용 가능합니다.]

[보유 자원 - 7,500P]

SORA에게 가격 흥정이 되는지 묻고 싶었으나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 번 써봐?’

시현은 눈을 질끈 감고 시스템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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