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24화 (24/195)

24화 Chapter 9. 수상한 환자와 더 수상한 보호자 (2)

[SORA : ‘카이트만의 안경’은 코어 아이템입니다. 선택할 경우 다른 코어 아이템 사용이 제한됩니다.]

‘1일 구독인데도?’

[SORA : 구독 서비스 또한 동일한 원칙이 적용됩니다.]

카이트만의 안경.

감정을 분석하고 거짓을 판별하는 코어 아이템.

이것을 선택하면 ‘노신사의 카우치’와 ‘오래된 수용자의 거울’은 포기해야만 한다.

진로 선택의 기로에 선 기분이었다.

‘정신분석이나 의미치료 분야도 충분히 매력적인 분야이긴 한데.’

무의식과 욕망을 이해하는 것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지금 당장 눈앞의 환자를 잘 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도 이걸로 할게.’

원래 망상 장애 환자를 진료할 때 중요한 것은 망상의 진위보다 환자의 감정과 사고의 흐름이다.

하지만 시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전문의 시험 전날, 망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환자의 말을 무시했다가 죽을뻔하지 않았던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어.’

카이트만의 안경을 터치하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SORA : 1일 구독권을 구매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사용하시겠습니까? Y/N]

Y를 터치하자 시현의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환자와 보호자들의 이목구비에 수많은 표시선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증강현실이 구현된 진료실이라…….’

허공에서 안경이 툭 떨어진다거나 하는 걸 상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system : 세상의 모든 차트 기능이 확장됩니다.]

[신규 애드온(Add on) - 카이트만의 안경]

‘새 아이템이 시스템에 녹아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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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트만의 안경 1.0 릴리즈 노트]

1. 거짓 감별 - 문장 단위로 거짓말 확률을 표시합니다.

2. 주 감정 분류 - 기본 감정을 수치화하여 보고합니다.

3. ???? - ???? (비활성화)

* 구독 서비스에서 일부 기능은 사용이 제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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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판…… 이라고?’

1일 체험권에 전 재산의 2/3을 투자했는데 기능 제한이라니.

살짝 억울한 기분이었다.

시현이 알림창에 잠깐 주의를 빼앗긴 동안 환자의 가족들은 2:2 구도로 싸우고 있었다.

아내의 망상이 심하니 입원시켜야 한다는 남편과 첫째 딸.

남편을 충분히 의심할 만했고 정신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아내와 둘째 딸.

“아빠가 요즘 매일 늦게 들어오고 주말마다 외박도 하잖아? 그리고 블랙박스는 왜 맨날 지워져 있는 건데? 선생님,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제 말이 틀렸어요?”

둘째 딸이 엄마를 두둔하며 말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외도였던 거군요?”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에 질세라 남편이 말을 이어나갔다.

“선생님, 이 사람 때문에 생활이 안 됩니다. 생활이! 하루 종일 연락을 막 해대고 어디 갔냐고 따지는 통에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이번에는 남편이 답답함을 토로한다.

“아…… 업무에 지장이 될 정도였군요.”

난감한 상황.

시현은 점점 황희 정승이 되어가고 있었다.

“난 정말이지 바람을 피운 적이 없어요. 다른 여자라도 만나봤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딩동!

[system : 거짓말을 감지하였습니다.]

시현은 새 아이템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보았다.

“최근에 만나는 여자분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럼요. 없다마다요.”

[system : 보호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회사분들하고 친하다 보니 오해를 받으시는 것도 아니고요?”

“전혀요. 여직원들하고도 겸상을 안 해요.”

[system : 보호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호오…… 이것 봐라?’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이다.

‘혹시 아이템이 고장인 건 아니겠지.’

시현은 일부러 중립적인 질문을 던졌다.

“다른 분들 말씀도 들어보고 싶은데, 같이 지내는 가족은 아내분과 두 따님뿐인가요?”

“네.”

[system : 보호자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카이트만의 안경이 정확하다면, 이인임은 환자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의심받을 상황이 되자 아내를 정신질환자로 몰아가는 남편이 문제였다.

“망상이 너무 심합니다. 입원을 좀 했으면 좋겠어요.”

피해자인 척하는 남편의 말에 시현은 기가 찼다.

“병실이 없어 입원은 어렵습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입원 적응증이 아닙니다.”

“입원이 안 되면 진단서라도 좀 써주세요.”

환자로 몰아가는 것도 모자라 진단서 요구라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무리한 입원 요구를 하다못해 이제는 응급실을 자기 유리한 진단서 써주는 곳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응급실 초진만으로 망상장애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정신과는 평가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진단서 당일 발급은 어렵습니다.”

시현은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걸 어떻게 혼내준다.’

이인임이 환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가족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딱히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이이잉.

때마침 남편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핸드폰을 힐끔 보더니 수신거부 버튼을 눌렀다.

“저것 봐! 또 그 여자한테 전화 오는 거잖아? 어디 한 번 받아봐.”

“병원에서 진료받는 중에 꼭 전화를 받아야겠어? 그런 거 아니라는데 왜 자꾸 그래? 강과장한테 온 거야.”

[system : 보호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시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회사 분에게 전화 같은데, 가족분들에게 핸드폰 잠깐 보여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내분께서 불안해하시는데요.”

“그, 그럴까요?”

보호자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전화기를 보여주었다.

가족들의 시선이 남편의 핸드폰에 집중되었다.

[최근 통화 목록]

→강호민 과장

←이갑석 부장

→강호민 과장

여자 이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시현은 최근 통화기록을 한번 쓱 본 뒤, 그중 하나를 메모지에 슬쩍 옮겨 적었다.

“우선 이인임 님과 따로 면담하겠습니다. 보호자 분들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아, 네…….”

보호자들이 나가자 시현이 말했다.

“저는 이인임 님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제가 오해한 게 아니죠?”

“하지만 정신과 진료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제가 치료를 받아야…….”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스트레스 아주 많이 받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건 그렇죠. 요즘 잠도 안 오고 화병이 날 것 같아요.”

이인임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주기적으로 진료도 받으시고 심리 평가도 해서 망상장애가 아니라고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남편이 하도 고집을 피우니까…… 큰 애도 엄마가 예민한 거라고만 하던데.”

남의 가정사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메모지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우선 외래진료 예약해드리겠습니다.”

시현은 이인임에게 소량의 수면제와 항불안제를 처방했다.

당연하게도 망상에 대한 약은 포함되지 않았다.

환자가 면담실에서 나간 뒤 시현은 키보드에 불이 나게 차팅을 하기 시작했다.

- 망상 장애를 의심할 만한 소견 없음.

- 우울, 불면, 식욕 저하 및 체중감소 있으나 사고 내용 및 사고 과정에서 특별한 이상 관찰되지 않음.

- 남편이 환자에게 망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전형적이지 않음.

외래에서 환자를 진료할 교수님이 이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예전 같으면 갈팡질팡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겠지만, 이번에는 신속하게 차팅을 마쳤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새로운 차트 : 시스템이 새로운 환자의 차트를 추가합니다. (어려움 난이도 +500P)]

과거에 보지 못했던 환자들은 진료하는 것만으로도 보상이 주어졌다.

‘진호가 이 환자를 봤다면 어떻게 판단했을까?’

카이트만의 안경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은 환자였을 것이다.

정확히는 쉽지 않은 보호자였지만.

후우.

어제부터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일만 했더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인벤토리에서 회복 포션을 터치하자 점차 피로감이 사라지고 눈에 힘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당직 하루 더 서도 할만하겠는데?’

주말 당직 때 처음 느껴보는 자신감이었다.

* * *

주위를 둘러보니 응급실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그 와중에도 남정욱은 인턴을 불러다 놓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적당히 좀 하지.’

처치실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숨넘어갈 듯 우는 것을 보니 성형외과 레지던트와 상처가 난 아이가 씨름을 하는 모양이다.

“인턴 선생님, 제가 잡을 테니까 다른 환자 보세요.”

발버둥 치는 아이를 오래 붙들고 있느라 힘이 빠진 인턴 설현수가 뒤로 물러섰다.

“형, 제가 잡을게요.”

“아, 시현이 응급실에 있었어?”

성형외과 레지던트 1년차, 박환태였다.

인턴 시절 2층 침대 나눠 쓰던 사이로 시현보다 두 살 위였다.

시현이 아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어깨를 단단히 잡자 발버둥 치던 아이도 잠잠해졌다.

회복 포션 탓이었을까?

평소보다 근력도 세진 것 같았다.

“오케이. 거의 다 됐다. 조금만 기다려.”

박환태의 수술용 실 다루는 실력이 몇 주 전보다 월등히 좋아졌다.

불과 작년 말만 하더라도 같은 인턴이었는데 역시 수술 손은 타고 나는 모양이었다.

“컷!”

박환태가 한 땀 한 땀 봉합하는 것에 맞춰 시현이 수술실을 잘라 주었다.

“후우. 덕분에 일찍 끝났네. 내려와 있었어?”

아이와 보호자가 처치실을 나가자 박환태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네. 환자 보느라고요. 형, 식스-제로(6-0 봉합사) 다루는 거 완전 자연스러운데요?”

6-0면 머리카락보다 가는 굵기. 다루기가 매우 까다롭다.

“하루 종일 이것만 해봐. 안 늘래야 안 늘 수가 있나. 오늘 무슨 날인가? 다쳐서 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주말 PS(성형외과)는 여전하네요.”

얼굴에 찢어진 상처가 생기면 으레 성형외과를 호출하다 보니 박환태는 주말이면 응급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떤 부위가 다쳤냐에 따라 간혹 정형외과와 성형외과 사이의 영역 다툼(?)이 있기도 했으나 박환태는 대체로 콜을 잘 받아주어 인턴들이 좋아했다.

“가자. 커피나 한잔…….”

박환태와 응급실을 떠나려는데 또다시 알림음이 들렸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적재적소 -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나 동료 전공의를 도왔습니다. (어려움 난이도 +500P)]

“형, 혹시 수처(봉합) 필요한 환자 있으면 저 부르세요. 보조할게요. 네?”

“응? 응급실 인턴 놔두고 너를 왜 불러?”

“당분간 환자를 좀 많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환자를…… 많이?”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잠깐의 시간 투자로 포션 하나를 공짜로 얻게 된 상황.

시현은 아까부터 싱글벙글이었다.

‘얘가 무슨 조증이라도 왔나.’

동기들을 통틀어 환자를 좀 더 보게 불러 달라고 말하는 1년차는 처음 봤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박환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system : 성형외과 R1 박환태의 주된 감정은 ‘우려’입니다.]

카이트만의 안경 효과 탓인지 대화 중인 상태의 감정이 알림창에 떠올랐다.

‘아이템 유지비가 좀 많이 들어서요.’

시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포인트를 벌 생각뿐이었다.

“인턴 선생님들도 환자 오면 바로바로 노티하세요. 다 받아줄 테니까.”

“네? 네…… 감사합니다.”

설현수가 살짝 감동한 눈빛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딩동!

[system : 인턴 설현수의 사용자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합니다. (어려움 난이도 +500P)]

[system : 인턴 설현수가 정신과에 호감을 보입니다. 향후 정신과에 지원할 확률이 상승합니다.]

‘응, 이건 뭐지?’

그저 포인트를 더 획득하려고 했을 뿐인데, 결과는 시현이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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