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chapter 9. 수상한 환자와 더 수상한 보호자 (3)
[system : 인턴 설현수가 정신과에 호감을 갖습니다. 향후 정신과에 지원할 확률이 상승합니다.]
‘응, 이건 뭐지?’
그저 포인트를 더 획득하려고 했을 뿐인데 결과는 시현이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설현수 선생님, 어느 과 어플라이(레지던트 지원) 하시죠?”
“아, 아직 못 정했습니다.”
당황한 듯 설현수는 말을 더듬었다.
종종 의기소침한 면이 있긴 했지만 성실한 친구였다.
과거에는 흉부외과에 지원했고 일도 꽤 잘했던 것 같다.
‘이 친구가 정신과를 쓰면 원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시현은 자신의 1년 후배, 정확히는 1년 후배가 될 예정인 김원기를 떠올렸다.
인턴 성적 수위를 다투던 김원기가 경쟁에서 밀릴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상당히 큰 변화였다.
‘환자들 입장에서는 담당의가 다 바뀌는 거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중에는 어제 시현에게 커피를 건넸던 박혜선 간호사도 있었다.
‘이런 게 관계 사고인가?’
왠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분명 험담은 아닐 테지만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묘하게 달라진 응급실 분위기가 시현의 불안을 자극했다.
* * *
월요일 아침 회진.
“1년차 선생님들 주말 동안 고생했군요. 병동 환자는 호흡곤란이 있어서 심장내과로 전과 했다고?”
“네, 903호 정기철 환자 페리카다이티스(Pericarditis, 심장을 싸고 있는 막의 염증) 발생하여 전과했습니다. 흉부외과에서 페리카디오센테시스(Pericardiocentesis, 심낭에 찬 물을 빼내는 것) 시행하고 경과 관찰 중입니다.”
“저런. 큰일 날 뻔했군요.”
황진호의 보고를 듣고 이광섭 교수가 이마를 닦았다.
“환자가 일단 병동에 입원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내과적인 문제들도 잘 살펴야 합니다. 주말 동안 고생했습니다.”
잠깐 놀란 듯했지만 이내 이광섭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1년차들이 잘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 환자 나중에 다시 전과 받으면 이어서 디스커션 해봅시다.”
별다른 추가 코멘트 없이 이광섭은 회진을 마치고 병동을 떠났다.
“커피 마실 사람들 따라와. 바쁜 선생님들은 환자 보고.”
치프 김민홍이었다.
주식 투자가 잘 되는지 요즘 매주 월요일마다 커피를 사고 있다.
“주말에 바쁜 것 치고는 말끔해 보이는데?”
2년차 권진은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1년차면 절대적인 수면 시간이 부족할 시기.
세수와 면도만 간신히 하던 사람이 얼굴에 피로감도 없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으니 좀 달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요즘 시현이 인기가 좀 있죠.”
황진호가 말했다.
“인턴들도 그렇고 응급실 간호사들도 시현이를 너무 좋아해요.”
“이러다 응급실 회식 때 연락 오는 거 아냐?”
김석용이 맞장구를 쳤다.
‘어쩌면 그럴지도.’
과거에 비해 응급실 콜도 열심히 받고 사석에서 응급실 간호사에게 도움까지 줬다.
응급의학과 과장님은 타과 레지던트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인턴들과 간호사들에게 잘하는 레지던트는 꼭 불러다 손수 챙겼다.
위이이잉.
“1년차 천시현입니다.”
“선생님. 이광섭 과장님 호출 있어요.”
외래에서 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지?’
시현은 남은 커피를 서둘러 마시고 외래로 향했다.
* * *
똑똑.
“천시현입니다.”
“천 선생, 주말에 응급실에서 본 이인임 환자 말이야. 보호자가 자꾸 망상장애라고 주장하는.”
“네. 기억납니다. 과장님.”
“오늘 오전 외래로 왔더라고. 그 환자는 입원해서 평가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이광섭은 약간 망설이는 듯했다.
“환자는 응급실에서 만난 당직 의사가 마음에 들었다면서 천시현 선생 앞으로 입원하고 싶다고 해. 어떻게 생각하나?”
“네. 제가 담당하고 싶습니다.”
“흠…… 일단 알겠어. 입원 처방할 테니까 열심히 해봅시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순간 이광섭이 말했다.
“응급실 차트를 봤는데, 의무기록이 지나치게 환자의 주관적인 말들 위주더군.”
확실히 시현은 차트에 환자가 말한 내용들을 주로 썼다.
‘카이트만의 안경’을 통해 보호자의 말들이 대부분 거짓말인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환자를 위하는 마음에서 그랬겠지만.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것들도 균형 있게 다뤄주고, 나중에 다른 의사가 봤을 때 진단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지 않도록 해줬으면 해.”
“명심하겠습니다. 과장님.”
그의 말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그런데, 천 선생이 보기에는 어땠나?”
“네?”
뜻밖의 질문. 넌지시 시현의 개인적인 의견을 묻고 있었다.
“저는 보호자가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환자를 망상장애로 몰아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봤단 말이지?”
이광섭의 표정에 가벼운 미소가 스쳤다.
“보호자도 보통이 아닌 것 같던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입원해서 제대로 평가를 했으면 해. 병실 비는 대로 바로 연락하도록 하고.”
“네, 과장님.”
시현이 생각하기에 이인임은 남편의 외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뿐, 입원이 필요할 만큼 증상이 심한 환자는 아니었다.
‘과장님이 입원을 권한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4년 전으로 돌아왔음에도 이광섭 교수의 속내를 알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 * *
이틀 뒤 오후.
이인임 환자와 남편 그리고 두 딸이 병실을 찾았다.
‘카이트만의 안경 사용할게.’
[SORA : 현재 잔여 포인트는 5,500P 입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아까워도 어쩔 수 없어.’
속이려고 작정을 한 보호자가 있는 이상 일반적인 면담은 무의미했다.
시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1일 구독권이 사용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유 자원 - 500P]
‘회복 포션 하나면 끝이네.’
이상한 보호자를 만나 빈털터리가 되다니.
시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선생님. 다시 만났네요. 제가 저 인간 때문에 정신과에 입원까지 하게 됐어요.”
“아니…… 이 사람 또 그러네? 난 바람피운 적이 없대도!”
[system : 보호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이분 참…… 일관성이 있어.’
시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남편이 ‘그 여자’만 좀 안 만나면 좋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입원했으니 선생님이 좀 도와주세요.”
이인임 환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하도록…….”
“남편하고 예전처럼 잘살아보고 싶어요.”
딩동!
[system : 환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떠오른 알림창.
‘응? 이게 무슨…….’
의외의 내용에 시현은 눈을 떼지 못했다.
“선생님, 이 사람 좀 고쳐주세요. 의부증이 너무 심합니다! 망상장애라고요!”
[system : 보호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망상(妄想).
합리적인 설득으로도 교정되지 않는 잘못된 믿음.
남편은 말하는 의부증은 부정망상, 배우자의 정조를 의심하는 망상을 의미했다.
“그 여자만 포기하고 돌아온다면 다 용서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남편의 외도만으로도 힘든데 괜한 의심을 한다며 비난까지 받는 상황.
환자는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가슴을 쳤다.
그 답답한 마음이 전해져 오려는 찰나.
딩동!
이내 떠오른 알림창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system : 환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남편도 이인임도 거짓을 말하고 있다니.
‘이 부부 뭐지? 도대체 어떤 부분이?’
순간 ‘카이트만의 안경’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남편분과 관계를 회복해서 전처럼 잘 지내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말을 이상하게 여긴 시현이 확인차 다시 물었다.
“그럼요. 잘살아보고 싶죠.”
[system : 환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결혼생활 하면서 지금껏 별다른 문제가 없었거든요.”
지켜보던 두 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인임의 말대로 다시 화해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잘 지냈던 중년 부부가 갑자기 이럴 수가 있나?’
난감한 상황이다.
남편은 외도를 하면서 아내의 합리적인 의심을 망상으로 몰아가고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지적하면서도 내심 남편과 관계를 회복하고 싶지는 않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거야?’
“보호자님은 입원 수속 마치신 뒤에 귀가하시면 되겠습니다.”
보호자들이 듣고 있는 한 이인임 환자가 마음 편하게 이야기하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 * *
보호자들이 떠난 뒤 시현은 환자와 면담을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부부는 완벽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이인임이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전혀 문제없는 부부 관계에서 남편이 아내를 환자로 몰아가는 것도 조금 이상한데요?”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에요.”
“아까부터 말씀하시던데 그분은 대체 누군가요?”
‘그 여자’의 정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 여자’가 나타나고부터 이름도 모르는 회사에 투자를 한다고 하고…… 골프 약속도 자주 잡고 평소엔 가지 않던 모임에도 가고 그랬거든요.”
“남편분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군요?”
“작년 초부터였을 거예요. 우리 남편은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정말이지 성실하고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거든요.”
이인임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집에 조금 무심하긴 했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남편에 대한 신뢰가 깨진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남편과 헤어지고 싶어요.”
[system : 환자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친정아버지가 시작하신 회사라서 저도 애정이 많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회사에도 집에도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해요. 차라리 단순한 외도라면 좋겠어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남편이 ‘그 여자’에게 푹 빠진 나머지 평소처럼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내분에게도 회사 지분이 있으신가요?”
“네. 남편하고 정확히 같은 지분이 있죠.”
정신과 입원과 진단서를 요구하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재산 문제인가.’
시현이 그동안 해왔던 일은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정신질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과는 결이 달랐다.
이인임이 망상장애가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남편의 외도가 사실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붙여 미행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또 다른 방법은 환자를 면밀하게 관찰한 뒤 망상장애에 부합하는 소견이 없다고 결론 내는 것이다.
‘잘 평가해 보라는 게 이런 뜻이었어.’
이광섭 교수의 의중을 알 것도 같았다.
이번 입원에서 시현의 역할은 아내를 환자로 몰아가는 남편으로부터 최소한의 방어를 해주는 것이었다.
‘거짓말인 줄도 알고 상간녀 연락처까지 알아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면담을 마치고 내려가는 시현의 마음은 더욱 착찹해졌다.
* * *
응급실을 거쳐 숙소로 들어가는 길.
시현은 별관 1층 주차장에서 의외의 인물들과 마주쳤다.
중년 남자와 언뜻 보면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
“아,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이인임 환자의 남편.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 여기 의사 선생님인가 보네. 언니가 집착이 너무 심한 것 같던데. 잘 부탁드려요.”
걱정하는 낌새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인임의 지인은 아닌 것 같았다.
간단히 목례하고 지나가려는데 여자가 한마디 보탰다.
“잘 좀 ‘치료’해보세요. 오빠가 너무 힘들어하는데. 너무 어려운 환자라서 힘들까요? 하하하.”
“그만 좀 해! 왜 그래?”
남편은 시현의 눈치를 살피느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다.’
시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인임이 말하던 ‘그 여자’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