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chapter 9. 수상한 환자와 더 수상한 보호자(5)
“하아. 하아.”
903호에 들어서자 새하얗게 질린 환자가 그들을 맞았다.
“Saturation(산소포화도) 어때요?”
“94%…… 아니, 93%에요!”
이선지가 산소포화도 수치를 확인하는 그 순간에도 환자의 상태는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황진호 선생님 호출해주세요. 병원에 있을 겁니다.”
환자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담당 의사인 황진호였다.
‘호흡곤란이 다시 생긴 원인이?’
하지만 그가 올 때까지 넋 놓고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시현은 황진호가 회진 때 보고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 903호 정기철 환자 바이탈 불안정하고 페리카다이티스(Pericarditis, 심장을 싸고 있는 심낭의 염증) 소견 있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사이 상태가 안정되어 다시 정신과 병동으로 돌아온 환자였다.
‘타과 컨설트 내역 출력해 줘.’
[SORA : 정기철 환자의 흉부외과 및 심장내과 협진 기록을 출력합니다.
‘심낭염이 다시 나빠진 게 분명해.’
정신과 병동에서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현은 기록을 확인하면서 곧바로 휴대폰을 열었다.
[흉부외과 한준식]
뚜 - 뚜 -
기분 탓인지 한준식의 통화 연결음은 한없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 사이 환자의 호흡이 조금씩 더 가빠졌다.
‘준식아, 받아라. 빨리…….’
휴대폰을 붙들고 있던 오른손이 가늘게 떨렸다.
- 한준식 선생님 핸드폰입니다.
소리샘 퀵보이스로 넘어가기 직전에 누군가 가까스로 전화를 받았다.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
“정신과 천시현 입니다. 한준식 선생님 통화 어렵습니까?”
- 네, 3년차 선생님하고 같이 응급 수술 어시스트 하고 계세요. 전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수술방 간호사인 듯했다.
“9병동에 심낭염으로 심낭 천자 했던 환자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수술 아직 많이 남았나요?”
- 거의 끝나가는 것 같은데요. 바로 연락 드리라고 말씀 전할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흉부외과 당직이 수술방에 들어가 있다니 난감한 상황이었다.
시현은 다시 휴대폰을 열었다.
내과 당직표에는 채이진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내과 채이진]
뚜 - 뚜 -
이번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통화 연결이 되었다.
- 내, 내과 채이진 입니다. 헉헉.
전화를 받은 채이진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저희 병동에 심낭염으로 흉부외과와 심장내과 협진 본 분이…….”
- 선생님, 죄송해요. 지금 응급실에 CPR(심폐소생술) 중인 환자가 있어서요. 여기 마무리되면 최대한 빨리 갈게요.
“아, 알겠습니다.”
CPR 중이라면 채이진의 백당직 또한 응급실에 묶여있을 가능성이 컸다.
두 과 모두 바로 와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낭패다.’
철컥.
때마침 병동 문이 열리고 황진호가 헐레벌떡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황진호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물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혈압도 낮아.”
“이거 우리가 감당 못 할 것 같은데? 당장 내과부터 불러야…….”
“내과 지금 응급실에서 CPR 하고 있대. CS(흉부외과)는 응급 수술 중이고.”
“그럼 어떻게 해야…….”
황진호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을 벌어야 해.’
환자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903호 병실의 다른 환자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단 환자 안정실로 옮기자.”
시현의 말에 황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산소 최대로 주세요.”
“네, 선생님!”
“수액 세트하고 NS(생리 식염수) 1000cc 준비해 주시고요.”
이선지가 산소통과 코 산소 주입관(nasal prong)을 준비하는 사이, 시현은 환자의 왼팔에 정맥 라인을 확보했다.
“ABGA(동맥혈가스검사) 하고 랩은 트로포닌, CK-MB 포함해서 나갈 겁니다. 검체 바로 검사실로 전달해주세요!”
“바로 내릴게요!”
시현이 채혈을 하는 동안 황진호는 심전도 기계를 가져와 환자의 사지와 흉벽에 전극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정신과 병동에서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를 보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의외로 세 사람은 합이 잘 맞았다.
똑똑똑.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액을 바라보며 시현은 심전도 결과지가 출력되기를 기다렸다.
지이이잉.
붉은 모눈종이에 어지러운 검은색 실선이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심전도 결과지를 확인한 시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빈맥, 낮은 전압 그리고 전기적 교대 맥.
의과대학 시절 교과서에 나올 법한 전형적인 심전도.
‘심낭 압전이다.’
심낭 압전(Cardiac tamponade).
심장을 싸고 있는 심낭에 물이 가득 차서 역으로 심장을 압박하고 있는 상태.
마치 외부에서 심장이 뛰지 못하게 꽉 쥐고 있는 것과 같았다.
제때 심낭에 찬 물을 빼주지 않으면 쇼크가 발생하여 사망에 이를 수 있는, 그야말로 초응급상황이었다.
“선생님, 환자 BP 떨어져요! 70에 50이에요!”
환자의 혈압이 아까보다 더 낮아졌다.
시현은 반사적으로 수액을 풀드랍(full drop)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환자의 혈압을 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직 수술 안 끝난 거예요? 응급실도?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이선지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다 어레스트 나겠어! 코드 블루 띄울게!!”
황진호가 곧바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코드 블루(code blue)는 원내 방송으로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것을 의미했다.
-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본관 9병동
-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본관 9병동
얼마 지나지 않아 전 병동 스피커에서 코드 블루를 알리는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선생님, 혈압이 안 잡혀요! 펄스(맥박) 없어요!”
이선지가 혈압계 커프에서 청진기 헤드를 빼며 다급하게 외쳤다.
“정기철님! 제 말 들리세요?”
“…….”
환자는 이미 의식을 잃어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황진호가 곧바로 팔을 걷어붙였다.
급한 대로 흉부 압박을 시작할 기세였다.
‘이대로는 안 돼.’
시현은 두 눈을 감았다.
환자가 심정지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은 심낭 압전.
심장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외부에서 흉벽을 아무리 세게 누른다 해도 효율적인 심폐소생술이 될 리 없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시현이 감았던 눈을 떴다.
[보유 자원 1,000P]
‘시청타촉의 포션, 서둘러줘.’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구매하여 바로 사용합니다.]
화아악.
또다시 시현의 눈에 형형한 안광이 감돌기 시작했다.
럽덥- 럽덥-
다행히도 환자의 심장은 미약하게나마 아직 뛰고 있었다.
하지만 심음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심장이 수영을 한다는 표현이 이런 거구나.’
심낭에 가득 채운 물속에서 환자의 심장은 그야말로 익사 직전이었다.
“외부에서 압박하는 건 의미가 없어.”
시현이 흉부 압박을 하려는 황진호를 붙잡았다.
“그럼? 이대로 포기하자는 거야? 뭐라도…….”
“그래. 뭐라도 해보긴 해 봐야지.”
시현은 시선을 돌려 이선지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간호사님, 병동에 중심정맥관 세트(쇄골하정맥과 같은 큰 정맥에 삽입하는 관의 일종) 있나요?”
“네? 응급 카트에 하나 정도는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건 왜…….”
“바로 준비해주세요. 에피네프린 주사기도 몇 개 같이요.”
“네!!”
시현의 요청에 이선지는 곧장 응급 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지금 어레스트가 올 상황인데 중심정맥관이 무슨 소용이야?”
황진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현에게 물었다.
“당연히 중심정맥관을 잡으려는 건 아니지.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이거 하나야.”
시현이 중심정맥관 삽입용 키트에서 주사기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주사기 끝에는 손가락 길이만큼 긴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너, 설마…….”
황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지금 여기서 심낭에 구멍을 뚫겠다고? 소노 가이드(Sono guide) 없이?”
심낭 압전 치료를 위한 심낭 천자.
보통은 초음파를 활용하여 정확한 위치를 찌르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다.
실수로 혈관이나 폐를 찌르면 심각한 합병증이 올 수 있기 때문.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건 말도 안 돼! 코드 블루 띄웠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보는 게…….”
“초음파 기계 가져오는 데만 한 세월이야. 환자 이미 의식 없는 상태고. 일단 블라인드로 할 수밖에 없어!”
황진호에게 설명하는 사이 환자의 심박동은 더 미약해졌다.
“서, 선생님! 환자 상태가!!”
정기철 환자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갔다.
시현은 서둘러 베타딘(소독약)으로 환자의 명치 부위를 닦았다.
그리고는 왼손을 뻗어 환자의 검상돌기(흉골 아래쪽에 튀어나온 부분)를 짚었다.
시현의 손끝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여기다!’
갈비뼈 아래 깊은 곳.
거대한 물풍선이 잔잔하게 출렁이는 듯한 촉감.
꺼져가는 심박동이 고스란히 손끝으로 전해졌다.
‘여기서 왼쪽 어깨 방향으로…….’
푸욱.
시현의 손에 들린 주삿바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환자의 부푼 심낭을 꿰뚫었다.
“나, 나온다! 나온다!”
주사기에 맑은 심낭 삼출액이 차오르자 황진호가 흥분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에피네프린 한 앰플 바로 IV!”
“그래, 지금 들어간다!”
황진호는 환자의 왼팔에 잡힌 라인에 에피네프린을 주사한 뒤, 환자의 팔을 들고 수액백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직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약물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두근.
심낭에 찬 물을 200cc 가량 빼내고 에피네프린까지 추가하자 환자의 심음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혈압 다시 잡혀요. BP 90에 70이에요!”
이선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한고비 넘겼어.’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
시현도 황진호도 안정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 * *
잠시 후.
“심낭 압전이 있었고…… 이 주사기로 심낭 천자를 했다고요?”
뒤늦게 도착한 채이진이 토끼눈을 하고 물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블라인드로 찌를 생각을…….’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막상 그 상황에 처했을 땐 누구도 쉽게 내릴 수 없는 판단이었다.
“후. 정말 큰일 날 뻔했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흉부외과 R3 심일동]
응급 수술을 마치자마자 9병동으로 달려온 흉부외과 레지던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코드 블루를 듣고 달려온 다른 레지던트들은 환자의 심장이 멀쩡히 뛰는 것을 확인하고는 양치기 소년에게 속은 주민들마냥 벌써 돌아간 뒤였다.
하지만 심일동의 생각은 달랐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어. 이걸 1년차가…….’
흉부외과 1년차도 아니고.
심지어 정신과 1년차였다.
“천시현 선생님이라고 했나요? 작년에 흉부외과 돌았던 것 같은데?”
“네, 작년 7월에 돌았습니다.”
“그랬군요. 그땐 이 정도까지는…….”
“네?”
시현이 반문하자 심일동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인턴을 놓쳤다고?’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아, 아니에요. 그때도 A턴(A급 인턴)이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엑설런트한 것 같네요. 하하.”
[system : 심일동이 거짓을 말합니다.(99.9%)]
“감… 감사합니다.”
시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환자는 흉부외과로 전과해서 심낭 삼출에 대해 재평가해야 할 것 같네요. 아무튼,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심일동은 황진호로부터 환자의 정신과적 상태에 대해 몇 가지 보고를 받은 뒤 바로 병동을 떠났다.
* * *
‘이제 진짜 끝이다.’
유독 긴 하루였다.
환자들도 거의 다 잠든 시간.
시현 또한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여전히 저쪽 복도 끝에서 통화 중인 이인임이 눈에 들어왔다.
‘통화가 길어지는데.’
정기철 환자를 보기 전부터 통화를 했으니 족히 30분은 된 것 같았다.
-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니까.
‘남자 목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에 익은 음성.
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지?’
눈 씻고 찾아봐도 불 꺼진 병동에는 이인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 당신만 믿을게요.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
멀리 있는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생생하게 들린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틀림없는 이인임의 목소리였다.
[시청타촉의 포션 - 잔여 시간 00:01:54]
알림창을 확인한 후에야 시현은 상황을 이해했다.
‘아직 포션 효과가 안 끝났구나.’
자신이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병동을 나서려는데 또다시 이인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우리? 누구랑 통화하는 거지?’
시현의 관심이 이인임의 통화 상대를 향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 다 잘될 거야. 걱정할 것 없어. 내일 만나서 또 이야기하자. ……사랑해.
‘방금 누구…… 아!’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인임의 수화기 너머에서 인상적인 중저음 톤의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