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chapter 9. 수상한 환자와 더 수상한 보호자(6)
- 다 잘될 거야. 걱정할 것 없어. 내일 만나서 또 이야기하자. ……사랑해.
이인임의 수화기 너머에서 인상적인 중저음 톤의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환사준…… 변호사?’
시현의 온 관심이 통화 내용에 쏠리기 시작했다.
* * *
“흐음.”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한참을 더 들어보았으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병동에 찾아온 변호사가 확실했다.
‘양쪽 다 불륜이라는 건가.’
회귀를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속이다.
‘그런데 왜 남편에게 집착하지? 본인도 외도를 하면서?’
문득 이인임의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선생님, 이 사람 때문에 일상생활이 안 됩니다. 종일 연락을 막 해대고 어디 갔냐고 따지는 통에……
내가 바람을 피워도 너는 절대로 피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노래 가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애꿎은 아내를 망상 장애 환자로 몰아가는 남편의 심리가 궁금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내의 심리 또한 그에 못지않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찌 됐건 의부증이 아닌 건 이제 충분히 확인했으니…… 당장 내일 퇴원할 수도 있겠어.’
망상 장애 여부를 평가하겠다는 입원 목표는 이미 달성한 셈이었다.
* * *
딸깍.
“우리도 이만 가자.”
정기철 환자의 전과 기록을 작성하던 황진호가 저장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시현…… 아?”
“......”
먼 곳에서 들리는 통화 내용에 집중하느라 정작 옆에서 황진호가 하는 말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잔여 시간 00 : 00 : 00]
[‘시청타촉의 포션’ 효과가 종료됩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방금 뭐라고?”
이인임과 상간남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져가고 나서야 황진호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정기철 환자 전과 처리했어. 이제 좀 쉬자. 숙소 안 가?”
“그럴까?”
“오늘 왜 이렇게 바쁘냐? 얼른 가자. 응급실 콜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자둬야지.”
정기철 환자가 무사히 전과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니 맥이 풀리고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보유 자원 - 0P]
회복 포션 살 포인트도 남지 않았다.
‘쉬어야겠어.’
황진호를 따라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에 처음 보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히든 퀘스트 ‘어쩌다 올인’을 달성하였습니다!]
‘히든… 퀘스트?’
이내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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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퀘스트 - 어쩌다 올인]
성공 조건
- 아이템 구매로 보유 자원 0P를 달성
성공 보상
- 해당 아이템 사용으로 업적 달성 시 1,000%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주의 - 사용자의 건강 증진을 위한 아이템 구매 및 사용은 보상에서 제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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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이 10배라고?’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생환의 달인 - 해당 환자 생존에 기여도 1위(70%)를 달성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7,000P)]
[한점 돌파 - 불리한 환경에서 활용 가능한 최선의 도구로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냈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3,000P)]
[system : 퀘스트 ‘어쩌다 올인’의 효과로 100,000P가 추가 지급됩니다.]
‘그렇지!’
[보유 자원 - 110,000P]
갑자기 늘어난 포인트.
허전한 마음이 급하게 훈훈해졌다.
“학회 심사 준비 좀 더 하고 갈게. 리서치 미팅도 있어서 연구 담당 선생님이 이번 주 안으로 자료 입력도 끝내자고 하셨어.”
“응? 내일 같이 해도 되는데.”
황진호는 미안한지 선뜻 병동을 떠나지 못했다.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난 정말 괜찮아.”
[보유 자원 - 108,500P]
회복 포션 3개를 연달아 터치하며 시현은 황진호의 등을 떠밀었다.
* * *
[11 : 58 PM]
‘밀린 일 좀 해볼까?’
호기롭게 황진호를 보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혼자 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4년간의 경험이 있다고 한들 잡일 하는 속도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SORA : ‘멀티 태스킹 포션(D)’ 사용을 추천합니다.]
‘좋아. 바로 사용할게.’
[system : ‘멀티 태스킹 포션(D)’을 사용합니다.]
‘후후 1,000P 쯤이야.’
무려 일일 퀘스트 2일분에 해당하는 포인트였지만 지금의 시현에게는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았다.
화아악.
책상에 늘어놓은 서류들이 알림창의 형태로 눈앞에 넓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동시에 여러 서류를 보는데도 내용 파악이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너튜브 보면서 웹소설도 쓰겠는데.’
온갖 잡일을 단시간에 처리하는 데 특화된 아이템이었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쉴새 없이 들려오는 키보드 타건음이 면담실을 가득 채웠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사무의 달인 - 신속 정확한 일 처리로 학회 심사 통과 가능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2,000)]
‘역시 이런 건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달까.
시현은 어느덧 추가 보상을 획득하는 요령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 * *
다음날 회진.
“정기철 환자는 혈압 저하와 호흡곤란 있어 흉부외과에 트랜스퍼 했습니다.”
“저런! 심낭압전이 생긴 원인은 뭔가?”
“처음에는 약물에 의한 심낭염을 의심했었는데 심낭 삼출액 양도 그렇고 아무래도 다른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위험할 뻔했는데, 대처를 잘했군요.”
이광섭이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병동 환자들은 대체로 안정된 것 같군요. 새로 입원하신 이인임 님은 좀 어떤가요?”
이광섭이 이번에는 시현에게 물었다.
“면담 내용에서 특별히 망상이 의심되는 면은 없습니다.”
“약물 치료는 어떻게 하고 있나?”
“불면 호소 있어서 평소 로컬(개인병원)에서 드시던 졸피뎀 서방정 6.25mg 처방하였습니다.”
시현의 보고에 이광섭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가급적 수면제 사용은 피하고 정 필요하다면 항불안제 소량 쓰도록 합시다.”
“네, 과장님. 환자분은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자의 퇴원 요청하실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호,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광섭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 환자가 담당 변호사와 함께 외출했는데, 남편의 외도 현장을 잡은 것 같습니다. 최소한 부정망상이 아닌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고…….”
시현은 이광섭에게 어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단, 환자와 변호사 사이의 통화에 대해서는 제외하고.
감각이 비약적으로 좋아져서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환자에게 불리한 내용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글쎄. 망상이 아닌 것만 확인하면 환자가 순순히 퇴원할까?”
“네?”
“환자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자는 것이지.”
이광섭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병동을 떠났다.
* * *
“선생님, 바쁘지 않으시면 면담 가능할까요?”
회진이 끝나자 이인임이 시현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아, 혹시 오늘 퇴원하십니까?”
“아뇨. 며칠 더 있고 싶은데요?”
아프지도 않은 사람이 병동에 더 있겠다니.
의외의 반응이었다.
“집에서 남편 보는 것도 스트레스거든요. 지금 딸들이 이쪽으로 오는 중인데 제 상태 좀 잘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설명이라면 어떤?”
“있는 그대로요. 남편에 대한 실망과 분노감이 큰 상태라는 걸 꼭 좀 이야기해주세요.”
‘세컨더리 게인(Secondary gain)인가.’
세컨더리 게인.
병으로 인한 이차적인 이득.
즉, 질병을 통해 주변의 동정과 관심을 얻거나 책임과 의무가 면제되는 등의 이익을 말한다.
망상이 없는 건 확실하지만, 남편에 대한 분노감이 큰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어젯밤, 남편의 외도 현장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네, 그럼 30분 뒤에 면담실에서 뵙겠습니다.”
시현은 면담실로 들어간 뒤 녹색창을 열어 몇 가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얻어야 해. 조금이라도.’
이인임. 법무법인 파천. 환사준.
[(주) IM바이오 법무법인 파천과 법률 컨설팅 MOU 채결]
첫 화면에 떠오른 것은 2년 전 기사였다.
‘이때부터 서로 알고 지냈나?’
사진 속에는 이인임 부부와 환사준이 활짝 웃고 있었다.
IM바이오.
회사 이름을 검색어로 하자 회사 홈페이지와 주가 창이 떠올랐다.
이인임은 남편이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우량한 회사였다.
본업은 전문 의약품 생산과 신약개발. 국내 유수의 대학병원과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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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주주 : 곽정수 외 11인
곽정수 보유지분(%) 19.6%
이인임 보유지분(%) 19.6%
곽은경 보유지분(%) 7.1%
곽은희 보유지분(%) 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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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지분은 같고 두 딸들도 상당히 많은 주식을 가지고 있는 회사였다.
‘이 집은 싸움이 나면 회사 분위기까지 안 좋아지겠네.’
똑똑똑.
이인임과 두 딸들이 면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천시현 선생님.”
모녀의 뒤에 뜻밖의 인물도 함께 서 있었다.
환사준 변호사였다.
‘이 사람이 왜.’
시현은 반사적으로 녹색창에 변호사의 이름을 입력했다
[환사준 / 법무법인 파천 대표]
인물 정보가 바로 나오는 걸 보니 업계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M&A(기업 인수 합병) 전문 변호사]
변호사 이력 첫 줄이 시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노렸던 게…… 이건가.’
시현은 면담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얼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M&A 변호사 그리고 두 딸들.
‘딸들을 보호자가 아니라 회사의 주요 주주로서 데려온 거라면?’
애초에 병원에 입원한 이유가 단순히 남편과의 신뢰 문제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곽은경 그리고 곽은희.
이인임의 ‘망상’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외도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담당 의사마저 이인임이 고통스러워했다는 점을 부각해서 말해준다면?
두 딸의 생각은 한쪽으로 기울 것이 분명했다.
지금부터는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카이트만의 안경.’
[SORA : 1일 구독권을 구매하여 바로 사용합니다.]
‘멀티테스킹 포션도.’
포션 효과가 추가되자 면담실 테이블에 앉은 네 사람의 표정 변화가 한 눈에 들어왔다.
[system : 곽은희와 곽은경의 주요 감정은 ‘우울’과 ‘우려’입니다.]
여기까지는 자녀들이 겪을 만한 합당한 감정이었다.
“따님들께서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여기 어제 찍은 사진들입니다.”
환사준이 기다렸다는 듯 먼저 포문을 열었다.
“이게 대체…….”
테이블에 놓인 사진들을 확인한 두 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system : 곽은희의 주요 감정이 ‘우울’ -> ‘분노’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래 놓고 엄마한테 잘도 그렇게!”
[system : 곽은경의 주요 감정이 ‘우려’ -> ‘경멸’로 변경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시현의 눈길을 끈 것은 다음 분석 결과였다.
[system : 이인임과 환사준의 주요 감정은 ‘즐거움’과 ‘기대감’입니다.]
계획했던 일이 의도대로 흘러갈 때나 나올 법한 반응.
확실히 이 자리는 두 딸을 설득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가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