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29화 (29/195)

29화 chapter 9. 수상한 환자와 더 수상한 보호자(7)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 이러다가 우울증 오는 거 아니에요?”

사진 속 인물들을 확인하자 예상대로 딸들은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울증이라고요? 글쎄요.’

남편이 외도를 확인했음에도 그동안 이인임의 얼굴에서 우울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system : 이인임의 주요 감정은 ‘즐거움’입니다.]

겉으로는 낙담한 듯 보이지만, 카이트만의 안경은 시종일관 이인임의 감정을 ‘즐거움’으로 보았다.

“그래도 입원하고 선생님들하고 면담하면서 좀 나아졌어. 원래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서…….”

[system : 이인임이 거짓을 말합니다.(99.9%)]

‘아직 멀었어.’

4년 동안 레지던트 수련을 하면서 사람 보는 눈 만큼은 좋은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지금 보니 전혀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 우울증을 진단할 만큼은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시현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아, 다행이에요.”

엄마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말에 딸들은 다소 안심한 표정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입원까지 필요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중으로 퇴원하시면 되겠습니다.”

반면 이인임과 환사준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스쳤다.

내심 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어 주기를 바랐으나, 시현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저 여자 어떻게 혼내줄 방법 없나요?”

이인임의 장녀 곽은경이었다.

응급실에서 아빠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했던 그녀는 이제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환사준에게 묻고 있었다.

“꼭 그 여자분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환사준이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보나 마나 그 여자가 아빠한테 먼저 접근을…….”

“당연히 가정이 있는 남자에게 접근한 상간녀도 잘못이지만, 의뢰인께서는 배우자분에 대해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계십니다.”

그의 말에 면담실 내에 정적이 흘렀다.

“엄마, 이게 무슨 말이야?”

“엄마도 그동안 고민을 많이 했다.”

이인임의 말에 곽은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바람을 핀 걸로도 모자라서 날 정신병원에 가두기까지 한 너희 아빠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미안하구나.”

‘이거 분위기가 왜?’

이혼 선언에 면담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system : 곽은경의 주요 감정이 ‘경멸’ -> ‘우울’로 변경되었습니다.]

남편의 잘못이 너무도 명백한 상황인지라 딸들도 이인임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상간녀 소송에 대한 부분은 상간녀 소송 단독으로 하는 방법이 있고 이혼 소송과 동시에 진행하는 방법이 있는데. 의뢰인의 경우에는 재산 분할 문제가 특히…….”

[system : 환사준의 ‘기대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주 신이 났군.’

겉으로는 유감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환사준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설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간녀 위자료 소송…… 그것부터 진행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딸 곽은희였다.

“네,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바로 안 되는 거죠? 이렇게 증거가 명확한데!”

곽은희가 테이블 위에 놓은 사진을 흔들어 보였다.

사진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우선 소장을 송달하려면 상간녀의 본명과 인적 사항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저희가 거기까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환사준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렇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주세요.”

‘41세 이예림씨. 전화번호는 보호자 폰에 강대리…….’

곽은희의 분노에 과몰입한 탓이었을까.

순간 입 밖으로 이예림의 이름이 튀어나올 뻔했다.

시현이 가까스로 목에 걸린 말을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딩동!

또다시 들려오는 알림음.

그리고 다음 순간 떠오른 알림창에 시현의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system : 환사준이 거짓을 말합니다. (99.9%)]

* * *

환자와 보호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시현은 면담실에 혼자 남았다.

‘거짓말이라고? 어느 부분이?’

상간녀 위자료 소송을 위해 상대의 인적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은 거짓일 리가 없다.

어느 정도 상식적인 부분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변호사가 상간녀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왜?’

위자료 소송을 바로 진행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뭐, 이제는 중요한 부분이 아닐지도.’

이인임은 이미 이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았고 딸들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

환사준이 이예림에 대해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더 이상 시현이 할 일은 없어 보였다.

위이이잉.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여기 외래인데요. 이인임 환자 보호자라는 분이 선생님을 찾는데 어떻게 할까요?”

“보호자라면 누구…….”

“곽정수씨라고 하는 중년 남자분인데 선생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곽씨 성의 중년 남성.

‘무슨 일로?’

모든 것이 정리된 마당에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시현은 일단 보호자를 만나러 외래를 향했다.

* * *

“천시현 선생님.”

시현을 부르는 곽정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쪽 진료실로 가시죠.”

마침 교수님 진료 전에 초진 환자를 진료하는 예진실이 비어있었다.

“……예.”

며칠 전 보였던 당당함은 사라지고 극도로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딸들한테 다 들었습니다. 제가 외도 한 것도 잘못이지만 아내를 정신 병동에 입원시켰다는 것에 더 화를 내더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교수님하고 선생님이 어떻게 좋게 좀 말씀해주시면 안 됩니까? 응급실에서 보니까 아내가 선생님은 신뢰하는 것 같던데.”

곽정수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내가 이혼하기로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던데…… 제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자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그 여자분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내가 외도를 의심하면 무조건 잡아떼고 세게 나가야 한다고 하길래 그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상간녀만 탓하는 모습.

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튼, 그 부분은 저희 가정사이고…… 사실 오늘은 그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아내 일로 온 게 아니면 왜?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 지은이…… 아니 지은인지 예림인지 아무튼 그 친구가 갑자기 연락이 안 됩니다.”

‘아니, 그 사람을 왜 여기서 찾아요?’

곽정수의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것은 아내 쪽 문제가 아니고 이쪽 때문인 것 같았다.

“연락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 있었나 싶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오피스텔에도 찾아가 봤는데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혹시 아시는 게 있습니까?”

“전혀요.”

기대했던 시현조차 별다른 정보를 주지 못하자 곽정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여자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던 겁니까?”

“실은 저도 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료 중 알게 된 비밀이라 구체적으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모든 차트’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이라 일단은 얼버무리기로 했다.

“아, 그렇군요.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곽정수는 여전히 이예림에게 미련이 남은 듯했다.

“병동에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그 여자가 꽃뱀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시현에게 곽정수는 다시 말을 붙여왔다.

“실은 그 여자의 조언대로 투자를 해서 큰 수익이 생겼습니다. 덕분에 회사 규모도 커지고 알짜 자회사도 두 개나 생겼죠.”

“인수 합병을 하시는 데 그분 도움이 컸다는 말인가요?”

“맞아요. 제가 사업하면서 사람들을 여럿 만나봤는데 그렇게 사업 감각이 좋은 사람은 몇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큰 이득을 안겨준 상간녀라니.

이예림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했다.

“부잣집으로 장가 와서 열심히 회사 키우고……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마네요. 아내에게 용서를 구할 면목도 없습니다.”

[system : 곽정수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이렇게 됐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아마 다음 주주 총회에서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와 딸들이 화가 많이 났거든요.”

이인임은 남편을 회사에서 몰아낼 생각인 듯했다.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시게 되나요?”

“네, 당분간은요. 대주주라도 회사에 할 일이 없는 상황이 되면 떠나야겠죠. 하지만 기회는 언젠가 또 오지 않겠어요? 회사 운영하면서 저에게 우호적인 주주들도 많이 알고 있고…….”

[system : 곽정수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시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곽정수를 바라보았다.

외도의 파괴력은 실로 엄청났다.

수십 년간 일궈온 가정과 회사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을 만큼.

‘이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걸까?’

곽정수가 진료실을 나선 뒤 시현은 다시 녹색창을 열어 IM바이오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최근 기사부터 종목 게시판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쪽 살펴보던 시현의 눈이 커졌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시현은 진료실을 나와 곽정수를 뒤쫓아 가기 시작했다.

* * *

1시간 뒤 면담실.

“내일 퇴원할까 해요.”

“네, 그렇게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밖에 있을 때 지지부진했던 일들이 입원하고 나니 바로 처리가 되네요.”

더는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 이인임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일단 그 인간부터 회사에서 쫓아내야죠. 딸들하고 이미 이야기 마쳤어요.”

“그렇군요. 혹시 그 부분도 ‘애인’과 함께 하시나요?”

“네, 우리 회사 법률 자문이기도 하고 저하고 일하는 스타일도 잘…….”

무심코 대답하던 이인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걸 어떻게? 혹시 남편에게 이야기한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진료 중 알게 된 내용은 비밀을 보장합니다. 대신 제가 알게 된 내용들은 숨김없이 환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내용이 있나요?”

“방금 남편분과 외래에서 면담하고 왔습니다. 불륜녀가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시현의 말에 이인임의 표정이 한결 더 밝아졌다.

“뭐, 당연한 거 아닌가요? 소송을 피하려면 사라져줘야죠. 그런 꽃뱀들이 하는 짓이 다 똑같지.”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꽃뱀이요? 글쎄요. 남편분 말에 따르면 이번에 자회사 인수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 여자가 남편을 도와요?”

“네, 남편분이 보기에는 사업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답니다. 그 정도면 상간녀 소송 위자료 정도는 부담되지 않는 수준이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더 빨아 먹을 단물이 없으니까 잠수탄 거 아닐까요? 곧 회사에서 쫓겨날 사람인데 왜 만나겠어요.”

이인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것도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인임이 반문했다.

“지금 남편이 가지고 있는 지분만 매각해도 상당한 현금을 가지게 되니까요. 오히려 상간녀 입장에서는 요리하기 더 좋은 상태가 되는 겁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의아해하는 이인임을 향해 시현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두 분은 함정에 빠지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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