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chapter 9. 수상한 환자와 더 수상한 보호자(8)
“제가 생각하게 두 분은 함정에 빠지신 것 같습니다.”
“함… 정이요?”
이인임은 시현이 내민 종이를 찬찬히 살폈다.
- 이노첨단소재
- 일등종합화학
- ……
- ……
- 진명약품
“이 회사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십니까?”
“뭔가요? 처음 보는 회사들인데.”
“적대적 M&A의 표적이 되고 끝내는 경영권 방어에 실패한 회사들입니다.”
“그렇군요. 회사 운영하는 입장에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이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죠?”
이인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공통점이 하나 더 있거든요. 환사준 변호사가 법무법인 파천을 세워 독립하기 전에 자문했던 회사들이기도 하죠. 홈페이지에 변호사 주요 업무 사례만 찾아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거야 그이가 그쪽 전문이라 그런 것 아닌가요?.”
이인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걱정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우린 괜찮아요. 가족들 지분만 해도 절반이 넘는걸요.”
“정확히 51.2%더군요.”
시현이 오전에 검색해본 내용을 이야기하자 이인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무슨 수를 써도 피인수회사가 되기 어려운 회사죠.”
“맞아요. 우린 아무 문제도…….”
“‘지금’ 같은 경우만 뺀다면 말이죠.”
시현이 ‘지금’에 유독 힘을 주었다.
“이혼 결심할 때 그 생각 안 해본 거 아니에요. 남편이 경영권을 되찾으려고 해도 우린 충분히 방어할 수 있어요. 백기사 역할을 해줄 사람도 있어요.”
“방어는 가능하시겠지요. 하지만 분쟁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손실입니다.”
경영권 싸움이 생기면 양측의 주주 확보를 위한 출혈 경쟁이 심해진다. 사실상 승자 없는 싸움이 될 가능성도 있다.
“만약 백기사라고 믿었던 그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배신한다면요?”
“그럴 리 없어요. 그런 억측을 잘도…….”
이인임이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돌연 대답을 멈추었다. 뭔가 걸리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환사준은 불륜녀에 대해 뭔가 알고 있었어.’
시현은 나름대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출처를 밝힐 수 없었을 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정 그러시면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현은 곽정수에게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몇 주 뒤.
위이이잉.
“네, 천시현입니다.”
“선생님, 여기 외래인데요. 얼마 전에 퇴원한 환자분이 선생님을 뵙자고 하셔서요.”
시현이 외래로 내려가자, 이인임 부부가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천 선생님.”
곽정수가 먼저 시현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두 분이 같이 오셨군요. 이쪽 진료실로 오시죠.”
일주일 전에 곽정수와 면담했던 예진실이었다.
이번에는 이인임도 함께였다.
“일단 아내한테 사과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다 이야기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요.”
“저도 이혼하고 재산 분할은 하더라도 회사 경영은 당분간 남편이 하도록 상의를 했어요.”
-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몇 주만 지켜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분명 주변에서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일 겁니다.
일주일 전 시현이 두 사람 각각에게 했던 말이었다.
지금 상황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부부는 일시적으로나마 싸움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다.
부부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유의미한 변화였다.
“다시 보니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더군요.”
이인임이 입을 열었다.
“어떤 부분이 그렇던가요?”
“담당 변호사가 원래는 상간녀 신원 확인하는데 굉장히 미온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상간녀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이혼 소송하고 재산 분할은 진행하지 않을 거라고 했더니 며칠 만에 상간녀 소재 파악까지 끝냈다고 하더라고요.”
‘며칠 만에?’
남편이 작정하고 찾아도 흔적조차 발견하기 힘든 사람을 환사준이 어렵지 않게 찾아내자 이인임은 적잖이 놀랐다.
“이렇게 쉬운 일을 그동안 미뤄왔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사람이 급하지 않다고 했는데도 자꾸 이혼 소송을 서두르는 눈치도 있었답니다. 아무리 변호사라지만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곽정수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이인임은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아직 환사준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 이혼 후에 경영권 분쟁을 하게 되면 돕겠다고 하는 주주들이 먼저 컨택해왔어요. 마치 싸움을 부추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최근에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시현이 부부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지은이, 아니 예림이를 처음 만났던 골프 모임 통해서 수소문을 해봤더니 이 여자가 법무 법인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법무 법인이요?”
“네, 환사준 변호사하고도 접점도 있어 보였습니다. 본인은 아니라고 펄쩍 뛰는데…….”
“아무튼, 이혼을 할 때 하더라도 지금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특히 회사에 대한 부분은요. 근데 선생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이인임이 신기하다는 듯 시현에게 물었다.
사실대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저도 이런 사정은 몰랐습니다. 다만 모든 게 좀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어요. 불륜녀가 병원에 찾아와서 담당 의사한테 시비를 걸지 않나…… 변호사라는 사람은 딸들을 불러 놓고 싸움을 부추기는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니 정말 이상했는데 확실히 그땐 저도 판단이 흐려졌던 것 같아요.”
이인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다 나 때문이야. 정말 미안해.”
남편이 슬며시 이인임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은 감각이 타고 나신 것 같군요. 앞으로 전문의 따시고 개원하시면 병원이 아주 잘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별말씀을요. 덕분에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두 분’ 가정과 회사에도 좋은 일이 많으시길 빕니다.”
시현이 두 사람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 아내분께서는 환자가 아니시라…… 어쩌면 또 뵐 일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인사를 건네며 일어나려는 찰나.
“저희 회사에서 개발한 신약 후보 물질을 여기 삼아대병원 리서치 센터에서 임상시험 할 예정입니다. 나중에 선생님을 다시 뵐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인임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저희 과가 참여한 연구라면…… 혹시 신경계통 약물인가요?”
“조현병 치료제입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조현병 치료 약물이라면…….’
과거의 기억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설마 저 부부가 ‘그 회사’의 주인이었다는 건가.’
- SB바이오파마
과거 적대적 M&A에 의해 피인수 후 사명이 바뀌어 잘 몰랐었지만, 지금 보니 김민홍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던 그 종목이었다.
시현이 연구 담당 레지던트였을 때 참여했던 임상 연구에서 후보 물질을 개발한 회사이기도 했다.
현시점에서는 아직 개발 중인 약물이 몇 년 뒤에는 대박을 쳐 주가는 수직상승하게 된다.
‘이것도 인연이야.’
시현은 이인임 부부가 외래 복도를 따라 멀어져 가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환사준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
기업의 미래가치를 알고 경영권 분쟁을 일으킬 유일한 방법을 찾아 실행에 옮긴 것까지는 좋았다.
상대가 회귀자였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속앓이를 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 * *
같은 시각.
“지금은 도저히 지분 싸움을 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올림픽 대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집무실.
환사준은 창밖을 바라보며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 거의 마무리 단계라고 하지 않았던가.
수화기 너머에서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흡사 기계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는데 대주주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의외로군.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유독 이번에는…….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 그래, 일단 알겠어. ‘변수’가 뭔지 파악해봐.
“네, 알겠습니다.”
- 납득 가능한 설명을 가져와야 할 거야.
“…….”
남자의 말에 환사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뚝.
‘젠장.’
통화를 마친 환사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4주 후에 뵙겠습니다 - 이혼 위기의 부부가 숙려기간을 갖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3,000P)]
[3+1 이벤트 - 동일 환자 진료에 구독권을 3회 이상 사용하여 무료 구독권을 1장을 획득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카이트만의 안경 무료 구독권)]
이인임 부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반가운 알림음이 들렸다.
‘과거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쩌면 환자와 보호자의 의견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둘리다가 애꿎은 환자에게 항정신병 약을 투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울증이나 망상장애를 MRI로 진단할 수 없듯 정신과적 진단에는 생물학적 표지자가 없는 경우가 많다.
진단을 위한 도구는 결국은 의사 자신일 뿐.
시현은 저절로 회귀 전에 만났던 환자들을 떠올렸다.
‘그 환자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지금이라면 그들의 말을 조금 더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시현아,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알림창을 닫고 병동으로 가려는데 누군가 시현을 불렀다.
“아, 치프 선생님.”
김민홍은 외래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얼마 전에 퇴원하신 과장님 환자분 외래 오셔서 잠깐 뵀습니다.”
“아, 그 환자? 부정망상이라고 했던가?”
“면담해보니 망상장애는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엥? 그걸 어떻게 알아?”
김민홍이 약간 의아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아, 그게…… 남편이 실제로 바람을 피우고 있었거든요. 특이적인 증상이 없어서 약물 치료도 안 했습니다.”
“그래? 감별하기가 까다로웠을 텐데…… 참, 내일 리서치 미팅 때 발표할 자료 정리는 끝냈니?”
“네. 입력 마무리했습니다. 새로 추가된 환자 데이터 입력한 SPSS(통계소프트웨어) 파일하고 PPT 자료 아까 연구 담당 선생님 메일로 보냈습니다.”
“올. 시현 요즘 환자도 잘 보고 일도 잘하고 아주 마음에 들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 데이터를 분석해서 내년에 발표할 논문의 결과까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딩동!
[system : 레지던트 권원주가 사용자에게 상당한 신뢰를 갖습니다. (어려움 난이도+1,000P)]
마침 연구 담당 레지던트인 권원주가 메일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신뢰도가 상승한 것을 보니 공들여 정리한 PPT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system : 누적 획득 포인트가 200,000P를 돌파했습니다. 신규 아이템들을 오픈합니다.]
시현은 시스템창을 열어 ‘NEW’ 표시가 된 아이템들을 쭉 살펴보았다.
※ 이 작품은 창작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집단, 지명 사건 등은 실존하는 것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작품 내 등장하는 의학 지식은 작품에 맞추어 재구성 및 각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