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Chapter 10. 리서치 미팅(1)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정교한 봉합 포션(C) - 일시적으로 사용자의 봉합 술기가 향상됩니다. (2,000P)]
[어시스트 포션(C) - 집도의의 의도를 보다 빠르게 파악합니다. 수술 보조 능력이 대폭 향상됩니다. (2,000P)]
신규 아이템들을 쭉 살펴봤으나 대체로는 외과계 레지던트들의 수술 실력에 도움이 될 법한 아이템들이었다.
‘이건 뭐지?’
[존재감 포션(D) - 자체 발광 효과가 짧은 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사용자의 설득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1,000P)]
[은신 포션(D) - 은폐 효과가 짧은 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있어도 없는 듯. 사용자를 눈에 띄지 않게 합니다. (1,000P)]
더러는 이렇게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포션들도 있었다.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당장은 필요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당분간은 ‘회복 포션’과 ‘숙면 포션’만으로도 충분해.’
[보유 자원 - 109,500P]
자원창을 확인하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현의 근무여건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 * *
“이따 오후에 리서치 미팅 있는 거 알지? 진호가 회의실 예약 변경할 수 있는지 좀 알아봐 줘. 이왕이면 대회의실로.”
아침 회진이 끝나자, 김민홍이 말했다.
“대회의실이요? 참석자는 몇 명으로 할까요?”
“한 20명? 아니 30명일 수도 있겠다.”
“30명이나요?”
황진호가 되물었다.
리서치 미팅은 앞으로의 연구 일정이나 진행 중인 논문에 대해 중간점검하는 자리.
보통은 과 내 행사로 많아야 10명 정도가 참여하는 회의였다.
“오늘은 리서치 센터장님하고 제약회사 관계자들도 올 예정이라. 다과도 넉넉하게 준비하고.”
“넵! 알겠습니다!”
“아, 1년차들은 굳이 안 들어와도 돼. 환자 보기도 바쁜데.”
1년차들을 위한 김민홍의 배려였다.
논문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는 연차는 2년차 이상. 아직 1년차들은 선배 레지던트들의 데이터 정리를 돕는 수준에 불과했다.
“저, 다른 일이 없다면 참석해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뜻밖에도 시현이 손을 들었다.
“진호는 당직이라 바쁠 테고 혹시 시키실 일이 있으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좋지! 앞으로 할 일 미리 본다고 생각하고 와서 한 번 들어봐.”
환자 진료와 더불어 교육과 연구 또한 대학병원 레지던트의 주 업무였다.
주니어 레지던트 시절에는 정신없이 일만 하느라 몰랐지만.
후학들을 가르치지 않고 새로운 논문을 쓰지 않는다면 조금 더 큰 개인병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시행착오를 줄일 필요가 있어.’
앞으로 몇 년간의 굵직굵직한 연구 성과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꾸준히 진행할 연구와 초반에 접어야 할 연구를 미리 감별한다면 불필요한 수고를 줄일 수 있을 터였다.
* * *
“사회공포증 인지행동치료 연구 환자 모집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현재 70명 정도입니다. 외래에 참가 희망하는 환자분들이 많습니다.”
연구 담당 레지던트, 3년차 권원주가 파일을 넘기며 대답했다.
“사실 굉장히 흔한 질환인데, 소심한 성격 정도로 생각을 해서 모르고 지내는 경우도 많아요. 조금 더 홍보해서 추가 모집할 수 있도록 합시다.”
“네, 과장님!”
이광섭 교수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소아 파트에서도 새로 시작한 연구가 있나요?”
“ADHD 환아에서의 체내 중금속 축적에 관한 연구가 IRB 심사 중입니다.”
소아정신과 펠로우, 신민승이 대답했다.
‘오랜만에 보네.’
올해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소아정신과 분과에서 펠로우로 근무하는 선배였다.
증례발표회 같은 전체 행사에는 종종 참석하지만, 대체로는 일정이 겹치지 않아 가끔 보는 사이였다.
“그렇군요. 충분히 SCI급에 투고할 수 있는 내용인 것 같은데…….”
이광섭이 말끝을 흐리며 회의실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5 : 46 PM]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한 논의는 모두 끝났다.
리서치 센터 쪽 사람들이 오기로 한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많이 늦어지는데, 전화해볼까요?”
불편한 기색을 감지한 김민홍이 물었다.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정신과 내부에서 진행하고 있던 연구에 대해서는 발표가 모두 끝난 상황.
회의실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철컥.
“아이고, 이거 늦어서 죄송합니다.”
통통한 체형의 중년 의사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말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멋쩍게 웃는 모습을 보니 그리 미안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원장님하고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리서치 센터장, 강병우 교수였다.
그가 거느리고 온 리서치 센터 연구원들이 하나둘 회의실을 채웠다.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짜증이 날 법한 상황이었음에도 이광섭은 싫은 내색 없이 그를 맞았다.
‘로얄은 로얄이라는 건가.’
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병우 교수…….’
최연소 교수 임용부터 시작해 원내 요직을 두루 거친, 단순히 로얄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사람.
얼마 전까지는 신경외과 과장 겸 기조실장을 했던 사람이었는데, 최근에 리서치 센터가 새로 생기면서 보직을 옮겼다.
가진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냐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부모를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면 매우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삼아 그룹의 회장, 강태정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우리 센터에 새로 부임한 책임 연구원입니다. 앞으로 뉴로사이언스(Neuroscience) 쪽 연구를 함께하게 될 겁니다.”
강병우가 뒤따라온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을 지목하여 이광섭에게 소개했다.
연구실 가운 차림의 젊은 여성이었다.
“아, 새로 오셨다는 연구원이…….”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요. 오랜만입니다.”
뜻밖에도 이광섭은 그녀와 구면인 듯했다.
“리서치 센터 강서현입니다.”
“우리 서혀… 아니, 강서현 팀장은 CSK 개발팀에서 다양한 임상 연구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번 신약 연구에서도 정신과 선생님들과 함께…….”
강병우가 강서현을 좌중에 소개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달랐지만, 그녀의 얼굴에 강병우 교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지금 몇몇 회사와 기술 이전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삼아대병원과 함께 임상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고요.”
강서현은 이내 단상에 서서 준비된 자료를 넘기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슬라이드를 보며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면을 가득 메운 복잡한 분자식.
각 신경전달물질 수용체에 대한 친화도.
동물 실험 데이터와 초기 임상 결과들.
흐아암.
의대생 시절 공부깨나 했던 레지던트들임에도 곳곳에서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현재로서는 조현병 치료제 ASP-9022와 항우울제 AD-2608이 가장 유력한 후보 물질입니다.”
마지막 슬라이드까지 보고 난 뒤, 강서현이 말했다.
“두 약물 모두 상당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과장님 의견은 어떠십니까? 무리가 없을까요?”
“유력한 후보 물질인 것은 사실이지만, 두 연구를 동시 진행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이광섭은 난색을 표했다.
“허허, 연구 디자인은 어느 정도 나와 있는 상태고 그대로 수행만 하면 될 텐데요. 우리 과장님 너무 몸 사리시는 것 아닙니까?”
이내 강병우가 딸의 편을 들며 압박해왔다.
“우리 서혀…… 아니, 우리 리서치 센터 실적도 생각해주셔야…….”
“……”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광섭이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자원이 필요합니다.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단호한 거절.
평소의 그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시현으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자원이요? 정신과적인 평가에 무슨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 평가라는 게 그저 면담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
“바로 그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신과 면담이라는 게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죠. 대상자가 연구에 적합한 환자인지 선별하는 과정부터 약물을 처방하고 치료 반응을 살피는 것까지 모두를요.”
이광섭이 레지던트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검사 장비로 사람의 마음을 평가할 수 있다면야 기계를 24시간 돌려서라도 하면 될 일이지만, 정신과 면담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흐음.”
강병우는 마뜩잖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확실히 연구 대상자들을 모두 평가하기에 지금 정신과 인원만으로는 부족했다.
‘실적이 필요해. 이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꽤나 유력해 보이는 두 약물이 눈에 어른거렸다.
국내 기업과의 협업으로 신약개발에 성공한다면 센터장으로서의 입지에도 새로 합류한 자신의 딸, 강서현의 경력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분원에 인력 요청을 한다면요? 이번 일, 아버님… 아니, 회장님께서도 관심 있게 보고 계신 일입니다.”
“회, 회장님께서요?”
이광섭이 말까지 더듬으며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바이오산업을 미래 먹거리라고 생각하고 계시니까요.”
“흐음.”
이광섭이 침음했다.
강태정이 누군가.
중견기업에 불과했던 삼아를 오늘날 재계 수위를 다투는 삼아그룹으로 키워낸 인물 아니던가.
강병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대로 된 성과가 날 때까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온갖 압박이 들어올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여기 오기 전에 원장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십니까? 폐쇄 병동을 축소해서 최소 병상으로만 유지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그게 무슨…….”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병동 이야기에 이광섭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금 이사회에서 적자가 큰 시설들 줄여나가자는 분위기인 거 알고 계시지요?”
“네, 과장 회의에서 얼핏 듣긴 했습니다.”
“제일 먼저 중환자실과 응급실과 축소가 거론되기는 했습니다만, 거기에 정신과 폐쇄 병동도 포함될 것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고 하던데요.”
“병동 없이 어떻게 공격적인 환자와 자살 위험도가 높은 환자를 진료합니까? 고위험군 환자 전부를 타 병원으로 전원시키라는 말입니까!”
이광섭이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제 생각이 아니고 윗분들 생각이 그렇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솔직히 병원이 자선 단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돈이 안 되는 사업은 축소하고 잘 되는 분야를 키워줘야죠.”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당장 정신과 폐쇄 병동만 해도 매년 몇억씩 적자인데…… 건진 센터나 VIP 병동으로 대체하면 경영 측면에서는 훨씬 좋은 것 아닙니까.”
“…….”
회의실에 있던 레지던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병동이 축소되면 입원 환자에 대한 치료 경험이 대폭 줄어든다.
당장 일은 편해질지 몰라도 길게 보면 명백한 손해였다.
“하지만 과장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 정신과를 돕겠습니다.”
강병우가 어르고 달래듯 말했다.
다음 이사회 때 폐쇄 병동도 유지하고 외래 공간도 더 확보해 보도록 건의해 본다는 말과 함께.
말은 돕겠다고 하지만, 신약 연구에 협조하지 않으면 정신과 병동을 줄여놓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의국원들과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레지던트 선생님들도 주 80시간 이상 근무하는 실정이라 새로운 일을 맡기가…….”
주 80시간 전공의법.
레지던트들이 과도한 근무로 혹사당하는 것을 막고자 주당 노동 시간을 제한한 법이지만, 대부분 병원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법이었다.
이광섭은 레지던트들의 처우를 이유로 완곡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허, 주 80시간이요? 원래 레지던트라는 게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고 해서 레지던트 아닙니까. 그런 거 다 지켜가면서 어떻게 수련이 된답니까?”
강병우가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레지던트 수련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이 수련받던 30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우리 과장님이 워낙 젠틀하시고 인정도 많으셔서 의국원들에 대한 배려가 넘치시는 것 같은데, 나중에 상의하지 마시고 말 나온 김에 여기서 물어봅시다.”
강병우가 레지던트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혹시 주니어들도 참석했습니까? 1년차가 누구죠?”
“1년차 천시현입니다.”
시현이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래요. 제일 바쁜 1년차 선생님. 우리 팀과 같이 일하는 거 정말 무리인가요? 이 연구, 어떻게 생각합니까?”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시현을 향했다.
※ 이 작품은 창작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집단, 지명 사건 등은 실존하는 것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작품 내 등장하는 의학 지식은 작품에 맞추어 재구성 및 각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