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32화 (32/195)

32화 Chapter 10. 리서치 미팅(2)

“그래요. 제일 바쁜 1년차 선생님. 우리 팀과 같이 일하는 거 정말 무리인가요? 이 연구, 어떻게 생각합니까?”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시현을 향했다.

‘왜 하필이면 불똥이…….’

지금의 역량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만, 덥석 받아들일 수는 없다.

과장인 이광섭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뭐, 레지던트 선생님 처우 문제라면 병동 축소로 자연히 해결될 문제 아닙니까? 환자 보는 로딩이 줄면 그만큼 연구 인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거니까요.”

강병우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연구와 교육 또한 레지던트의 업무 중 하나이긴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업무는 환자를 진료하고 전문의로서의 역량을 기르는 것이었다.

‘과거엔 분명…….’

이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광섭의 선택은 이미 알고 있다.

- 이거 이번에 리서치 센터하고 같이 하는 연구 데이터야. 오늘 내로 입력해서 메일로 보내줘.

일과 틈틈이 엑셀과 SPSS(통계프로그램)에 결과값을 입력하기도 했고.

- 임상 시험 환자들한테 연락 오면 바로 보고해. 이상 반응 대응 메뉴얼대로 해야 하니까. 당직 때 전화 놓치지 말고!

응급실 환자 보느라 임상 시험 환자 연락을 못 받아 야단을 맞기도 했으니까.

조현병 치료제 ASP-9022와 항우울제 AD-2608.

이광섭은 결국 두 치료제에 관한 임상 연구를 수락했다.

‘이런 사정이 있었어.’

로얄 중의 로얄인 강병우가 병상 수를 가지고 압박해오니 거절하기 어려웠을 터.

“사실 정신과가 응급 수술이 있는 과도 아니고, 일과 중에 조금씩 환자 평가하고 데이터 입력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천시현 선생님?”

이제는 그 압박이 시현을 향했다.

말단 1년차의 의견이 얼마나 중요할까 싶지만.

긍정하면 1년차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걸 왜 어려워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부정하면 과장부터 1년차까지 한결같이 연구에 의욕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 분명했다.

“개인적으로, 연구 수행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생각한 끝에 시현이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임상 연구가 쉽다니!”

옆에서 듣고 있던 김민홍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렇지!’

반면 강병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직 근무가 가장 많고 병원에 살다시피 하는 1년차가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밀어붙이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하지만, 이 연구를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진 시현의 말은 그 기대에 제대로 찬물을 끼얹었다.

“의미 있는 결과가 안 나온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동물 실험에서는 분명…….”

강병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시현이 말했다.

“자료 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연구원님, 조현병 치료제 ASP-9022 슬라이드 다시 열어주시겠습니까?”

“네? 아, 네…….”

강서현이 얼떨결에 슬라이드를 다시 띄웠다.

“저희 과가 이 연구에 참여할 수 있을지 없을지, 1년차인 제가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시현은 잠시 뜸을 들이며 화면에 떠오른 분자식과 수용체 친화도를 살폈다.

“그래도 한 사람의 의사로서, 이 연구의 디자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연구 설계에 문제가 있다고?

- 그걸 1년차가 어떻게 지적을 해?

- 내가 보기에는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

회의실이 술렁였다.

“정확히 어떤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시죠? 지적하신 의도가 궁금하네요. 이제 막 레지던트를 시작하신 것으로 아는데 연구 경험은 있으신가요?”

강서현 또한 비아냥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저, 저는 센터장님께서 1년차 의견을 여쭤보셔서 생각대로 답한 것뿐입니다.”

“…….”

“굳이 1년차를 지명해서 물어보시면서 경험이 없다고 비난하시면…….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시현이 짐짓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저는 그런 뜻이 아니고…….”

당황한 표정의 강병우와 강서현.

- 굳이 1년차를 지목해놓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까는 거야?

- 센터장이 잘못했네. 잘못했어.

- 와…… 이건 못 참지.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저는 정신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임상 경험도 연구 경험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술렁거림이 가라앉자 시현이 강서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의견을 듣기도 전에 말하는 사람의 경험부터 운운하는 것이 연구자로서 적절하지 않은 태도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시키면 뭐든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는 1년차 특유의 태도를 노리고 한 질문이었는데,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변해 버렸다.

‘저 녀석이…….’

강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연구자로서의 태도까지 운운하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여기서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면 연구 자체가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 부분은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연구에 대한 천시현 선생님 의견이 궁금하네요. 진심으로요.”

‘일단 들어보고 하나하나 반박해주지.’

강서현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연구 디자인에 대해서는 외부 자문까지 받은 상황.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한들 문제점을 찾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현이 시선이 다시 ASP-9022의 분자식을 향했다.

과거 리서치 센터에서 추천한 두 후보 물질은 결과적으로 효과를 내는 데 실패했다.

- 중도 탈락률이 너무 높습니다. 대부분은 부작용 때문이고요.

특히 ASP-9022의 경우 약물의 용량 설정에 문제가 있었다.

시작 용량(starting dose)과 증량 속도를 높게 설정한 나머지 치료 효과가 나오기도 전에 부작용으로 환자들이 대거 탈락했기 때문.

얼마 지나지 않아 임상 시험은 중단되었다.

‘이왕 진행할 거라면 성과를 내야만 해.’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단 연구의 시험군에서…….”

시현의 회의실 마이크에 다시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ORA : 추천 아이템이 있습니다.]

‘무슨 아이템?’

뜻밖의 메시지에 시현이 반문했다.

환자를 보는 상황도,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야 할 상황도 아니다.

잠이 부족하거나 피로감이 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템 이름을 확인한 순간, 시현은 곧바로 ‘사용’을 터치했다.

[존재감 포션(D) - 자체 발광 효과가 짧은 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사용자의 설득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1,000P)]

화아악.

가뜩이나 주목을 받고 있던 상황.

시현의 등 뒤로 후광이 켜졌다.

포션 효과가 더해지자 시현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ASP-9022의 경우 시작 용량을 10mg으로 하고 주당 10mg씩, 6주 차에 60mg까지 증량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이렇게 설정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걸 지적한다고?’

강서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부 회의에서도 최대 용량이 다소 높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시현이 정확히 그 점을 파고들었다.

“해당 약물의 경우 도파민 수용체에 작용하여 치료 효과를 냅니다. 적정 수용체 점유율을 달성하려면 그 용량으로 쓰는 것이 맞습니다.”

동물 실험에서 별다른 부작용이 없었던 용량인 만큼, 강서현은 그리 어렵지 않게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어진 다음 질문은 그녀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도파민 수용체, 정확히는 D2 receptor를 타켓으로 하셨다는 것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수용체 점유율을 93% 이상으로 설정하셨더군요. 시판되고 있는 다른 약물들에 비해 상당히 높다고 생각됩니다만.”

“그건…….”

강서현이 순간 움찔했다.

“혹시 이 약물…… 도파민 수용체에 대한 부분 효현제(Partial agonist)인가요?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요.”

맙소사.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는 무슨 1년차 수준이…….’

한국에서 의대 입시 경쟁이 과열돼있다는 말도 삼아대병원의 의료 수준이 꽤 높다는 말도 들었지만, 이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전에 근무하던 다국적 제약회사의 수석 연구원의 코멘트를 듣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네, 맞습니다. 일반적인 항정신병약물은 D2 수용체를 억제하는 쪽으로 작동하지만, 이 약물은 낮은 용량에서는 되려 D2 수용체를 활성화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최종 용량을 높게 설정할 수밖에 없는…….”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바로 그 부분입니다.”

시현의 말에 청중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약물이 가진 프로파일이라면, 지금 용량에서 정좌불능(Akathisia)과 근긴장이상(Dystonia)이 나타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어진 설명에 몇몇 교수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반면 대다수 연구원들과 레지던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니어인 김민홍과 최지훈조차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동안 시현은 또 다른 문제를 언급했다.

“그리고 높은 용량만큼이나 우려되는 부분이 지나치게 긴 반감기입니다. 96시간 정도로 보이는데요. 맞습니까?”

반감기(half life).

체내에 투여된 약물 농도가 절반으로 떨어지는 시간을 의미하는 말로, 길면 길수록 몸에 머무르는 기간이 길어진다.

만약 약물 부작용이 발생한다면, 그 부작용에 환자가 오래 시달려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아까 말씀드린 부작용이 최대 1달 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그런 사례가 단 한 건이라도 발생한다면, 연구를 더는 진행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

시현의 말이 끝나자 강서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기세등등하던 강병우도 마찬가지.

‘지금 연구 계획으로는 어려울 겁니다.’

후보 물질이 실제 의약품으로 개발되어 시판될 확률은 수천분의 일.

성공만 한다면야 그야말로 대박이지만, 확률적으로는 도박에 가깝다.

현존하는 조현병 치료제 중 가장 효과가 뛰어난 약물을 물었을 때, 대다수 전문가들은 클로자핀(Clozapine)을 꼽는다.

하지만 그 클로자핀이 1950년대에 개발된 약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반세기가 훨씬 넘도록 그 효과를 뛰어넘는 약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

신경계통에 작용하는 약물 개발이 쉽지 않다는 방증(傍證)이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면 좋겠습니다. 리서치 센터 내부적으로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광섭의 중재로 회의는 흐지부지 끝이 났다.

“천 선생, 오늘 아주 인상적이었어.”

“감사합니다, 교수님.”

회의실을 나가는데 진철영이 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덕분에 골치 아픈 일 하나 미루게 됐군.”

이광섭이 거들었다.

두 시니어 교수들로부터 동시에 칭찬을 받다니.

과거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딩동!

[system : 사용자에 대한 이광섭 과장의 신뢰도가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system : 사용자에 대한 진철영 교수의 신뢰도가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치프는 의국원들 저녁 좀 챙겨주세요. 맥주도 한잔하고.”

“감사합니다!”

이광섭이 김민홍에게 건넨 황금색 카드가 영롱한 자태를 뽐냈다.

‘일단 한 턴은 넘긴 것 같은데.’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강병우가 뭔가를 해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또 무슨 일거리를 만들어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 * *

쾅!

강병우가 신경질적으로 중역 책상을 내리쳤다.

“왜 다들 해보기도 전에 안 된다고만 하는 거야? 지들이 해봤어? 응? 해봤냐고!”

“아, 아빠…….”

“전공의들 일이 많아지면 안 된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안 된다. 이거 원,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글 사람들이네!”

“…….”

강병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강서현은 아까 회의실에서 시현이 했던 말들을 곱씹고 있었다.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그 레지던트 선생님이 했던 말이요. 부작용으로 중도 탈락률이 높아질 거라는 이야기.”

“그걸 신경 쓰는 게냐? 이미 전임상(pre-clinical) 단계에서 다 해보고 적절하다고 판단 난 걸 제까짓 놈이 뭘 안다고! 보나 마나 일하기 싫으니까 어설픈 지식으로 둘러댄 말이겠지.”

강병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으나 강서현의 표정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어설픈 지식? 아니야 그건 분명…….’

신약의 약리적 특성은 아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 필드에서 연구를 체험해본 사람이 할 법한 코멘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