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33화 (33/195)

33화 Chapter 10. 리서치 미팅(3)

같은 시각.

병원 근처 중식당 화란.

“오늘 과장님이 법인카드도 주셨고 맘껏 먹어도 되는 건가요?”

2년차 권진은이 메뉴판을 살피며 물었다.

값비싼 코스요리가 즐비한 첫 번째 페이지였다.

“법인카드? 아닌데? 이거 과장님 개인카드야.”

카드에는 영문으로 이광섭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법인카드로 술 마시는 거 엄청 싫어하시거든.”

“아, 그런 거였어요?”

권진은이 이내 페이지를 넘겨 단품 메뉴를 찾기 시작했다.

“맛있는 거 먹어도 돼. 과장님 엄청 부자시잖아. 가끔 기분 엄청 좋으실 때 이렇게 개인카드 주신다고.”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가운데, 김민홍이 시현에게 물었다.

“시현이가 오늘도 한 건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야? 약리학 공부를 따로 한 건가?”

“오늘 발표 자료…… 예정에도 없던 거였는데 따로 알아보기라도 했어?”

3년차 권원주도 거들었다.

‘좀 곤란한데.’

그저 앞으로 임상 시험에서 벌어질 일을 이야기 한 것뿐이라고 할 수도 없고.

확실히 시현의 오늘 발언은 1년차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아까 그 약, 실은 얼마 전에 진료했던 환자분 회사에서 개발한 거라서요.”

“환자분 회사?”

“네, IM바이오라고 우리 병원 리서치 센터와 연구할 거라고 말해주셔서 따로 찾아봤습니다.”

검색해본 정도로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설명이었다.

“그런 거였어? 그 회사 나도 보고 있었는데. 환자 열심히 보니까 이런 부수입도 생기네?”

김민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권했다.

“그래. 아무튼, 오늘 큰일 했으니까 한 잔 받아!”

딸랑.

시현이 잔을 받는 동안 출입문이 열렸다.

김민홍에게 손을 흔들며 웃는 익숙한 얼굴.

최세영이었다.

“일찍 왔네?”

“웬일이에요? 갑자기 예정에도 없는 회식을 다 하고.”

원래 따로 만나기로 했던 모양.

최세영이 김민홍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알아? 우리 1년차가…….”

김민홍의 이야기를 듣던 최세영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 * *

“술은 내가 살게! 나 요즘 엄청 잘 나가는 거 알지?”

취기가 오른 김민홍이 레지던트들을 향해 말했다.

‘요즘 흐름이 좋긴 했지.’

김민홍의 계좌 사정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나아생명과학으로 대박을 터트린 후 김민홍은 연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흡사 펀드매니저가 회귀한 듯한 기세.

“아까 시현이가 말했던 회사 있잖아. IM바이오! 그 회사가 신약 파이프라인이 얼마나 좋냐면…….”

김민홍은 한참 동안 자신이 공부한 회사들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외부에서 눈독 들일만 해.’

과거에는 이인임의 남편인 곽정수가 회사에서 쫓겨난 뒤 적대적 M&A로 피인수되는 기업이었다.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이번에도…….’

중간에 시현이 없었더라면 부부는 같은 결말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

알짜 회사를 헐값에 인수하려고 했던 세력들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이제 무리하지 말아요. 전세금도 거의 다 모았는데.”

최세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알겠어. 이제부턴 리스크 관리해야지.”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김민홍은 자연스럽게 1년차들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요즘 우리 1년차들 환자도 잘 보고 일도 잘하고 마음에 들어.”

김민홍이 시현과 황진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작년이랑 재작년에도 그런 말 했었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번에는 진짜야. 얘들은 1년차 같지가 않아. 정신과 환자만 잘 보는게 아니고 병동에서 심장압전 환자까지 살려냈다고! 둘이 사이도 좋고 정말 잘하고 있다니까?”

그는 한참 동안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아무튼, 공부 열심히 해서 둘 중 한 명은 꼭 교수로 남아라.”

“그게 저희 마음대로 되나요? 하하하.”

모처럼 좋은 분위기 속에 술이 몇 순배 더 돌았다.

“오늘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올해 들어서 일도 너무 잘 풀리고 기분이 좋아서 그렇지 뭐. 아, 우리 잠깐만 나갔다가 올게.”

김민홍이 씩 웃으며 황진호를 끌어당겼다.

“끊고 있는 거 맞아요?”

“거의 다 됐는데…… 술자리만 오면 이러네. 하하하.”

김민홍이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는 시현과 최세영만 남아있었다.

“천시현 선생님, 요즘도 활약이 대단한 것 같은데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최세영이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치프 선생님 덕분에요.”

“내가 보기에는 선생님 덕분에 다들 편한 것 같은데.”

최세영이 웃어 보였다.

“선생님은 제가 한 말은 까맣게 잊어버린 건가요?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분명 조심…….”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누가 절 지켜본다는 건가요? ‘돌아온 사람’은 또 뭐고요?”

시현이 반문했다.

“뭐, 선생님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죠. 어차피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최세영이 남은 잔을 끝까지 비웠다.

“회귀자들은 왜 다 그런 거죠? 도대체 왜 위험을 자초하는 거예요?”

취기 탓인지 최세영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위험이라뇨.”

“그럼 그냥 가정을 해보죠. 세상에 회귀자…… 그러니까 미래를 살다가 과거로 ‘돌아온 사람’이 있고 선생님이 그 입장이라면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위험한 상황도 피할 수 있고 후회하는 선택도 바꿀 수 있고요. 크게 오를 주식을 미리 살 수도 있겠어요.”

“…….”

대답하다 보니 1년차로 돌아온 후 시현이 해오던 것들이었다.

“맞아요. 얼핏 보기에 천재처럼…… 아니, 천재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모습일 거예요.”

“그 정도로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천재도 ‘돌아온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운이 좋았어요. 투자도 이번에 임상 시험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 것도요.”

“그런가요? 저는 아닌 것 같은데요. 선생님 처음 봤을 때 그 표정이…….”

최세영은 뭔가 말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하는 듯했다.

“예전에 민홍 오빠가 저렇게 좋아하는 거 ‘오랜만’이라고 했을 때 선생님 얼굴이 딱 그랬거든요.”

“제 표정이 어땠었나요?”

“뭐랄까. 과거로 돌아온 사람이 주변 사람들의 옛 모습을 볼 때 보이는 그 표정이랄까요? 저 그거 예전에 본 적 있거든요.”

아주 잠깐, 최세영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

그리움에 슬픔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순간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최세영에게 물었다.

“다른 회귀자를… 보신 적이 있군요?”

그 물음에 최세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여보… 세영아…….

- 아빠? 울어?

- 당신, 무슨 일 있어요?

- 아, 아니. 너무 반가워서…….

- 매일 보는데 뭐가 그렇게 반가워요? 당신도 참.

- 어제저녁에도 봤는데. 아빤 참 이상해.

“꽤 어릴 때 기억인데, 아마 아빠가 조교수 때였을 거예요.”

매일 보는 가족들을 보며 눈물을 글썽인다, 라.

최세영의 말이 시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 아빠 모습을 처음이기도 했고, 그리고 나서부터 아빠가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어떻게 변하신 건가요?”

“원래 아빠는 병원 일밖에 모르시던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엄청 가정적인 분으로 변하셨어요. 가족끼리 놀이공원도 가고…… 제 학예회도 오시고요.”

“뭔가 깨달음이 있으셨던 게 아닐까요? 워라벨이라던가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서요.”

사람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다 회귀자일 수는 없는 노릇.

시현의 생각이 더 일반적이기는 했다.

“꼭 집에서만 그랬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평범한 대학병원 의사였던 아빠가 갑자기 스타교수가 됐으니까요.”

“스타교수라면…….”

“최기태 교수님이요. 어쩜 모르실 수도 있어요.”

스타교수인데 모를 수도 있다니.

묘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그 이름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최기태… 최기태…….’

다음 순간, 학부 시절 들었던 흉부외과 원로 교수의 강의가 뇌리를 스쳤다.

- 최 교수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나라 흉부외과의 역사가 바뀌었을 텐데…… 참 아쉬워요. 여러분도 오늘 제 강의보다 훨씬 더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흉부외과…… 교수님이신가요?”

“네. 어떻게 아시죠? 선생님과는 접점이 없을 텐데요.”

“흉부외과 강의 때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닥터헬기부터 우리 병원 외상센터의 기반을 잡으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최세영은 시현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에 놀란 눈치였다.

“그런데 단순히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만으로 아버님께서 회귀자였다고 단정 짓기에는 뭔가 부족하지 않을까요?”

“……아빤 뭐든 다 알고 계셨어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들부터 우리 가족이 겪게 될 크고 작은 일들까지요. 이건 아빠와 저만 아는 비밀이에요.”

최세영이 시현을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하지만, 본인에 대한 건 모르셨던 것 같네요.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은……. 천재는 단명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이런 말을 해주는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인 것만은 확실했다.

최세영의 표정이 한없이 쓸쓸해 보였다.

“선생님이 회귀자이던 아니던, 너무 많은 걸 바꾸려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

테이블로 돌아온 김민홍이 물었다.

“혹시 김민홍 선생님이 괴롭히는 거 없냐고 묻고 있었지. 이 사람 알고 보면 은근히 말리그 아니에요?”

최세영이 놀리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데? 너희가 설명 좀 해줘.”

“치프 선생님, 사랑합니다. 가르침도 주시고! 돈도 벌게 해주시고!”

황진호가 김민홍의 팔짱을 끼었다.

‘진호… 많이 마셨구나.’

최세영과 이야기하느라 술이 확 깬 시현과 다르게 황진호는 한껏 들뜬 얼굴이었다.

“우리 그만 나가요. 내일 출근들 해야죠!”

최세영이 김민홍과 황진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모든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온다…….’

최세영이 해준 말들을 곱씹으며 시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며칠 뒤.

위이이잉.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

“정신과 1년차 천시현입니다.”

“리서치 센터 강서현입니다. 오늘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뜻밖의 인물이 시현을 찾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연구 관련해서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정신과 의국에 새로운 일거리만 안겨주었을 뿐 결국은 실패한 임상.

그녀와 얽혀 좋을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제 의견은 회의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 따로 만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그래도 잠깐이라도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오늘 당직은 아니신 것으로 확인되는데, 식사라도 같이하면서 이야기하시면…….”

오히려 공손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말투.

며칠 전의 거만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공식적인 당직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다음 기회에…….”

“저희 직원을 보내겠습니다. 만약 병원에 급한 일이 생기면 바로 복귀하실 수 있도록요.”

당직 스케쥴 파악에 따로 사람까지?

이쪽 의견을 구하는데 꽤 진심인 듯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며칠 전 최세영에게 들었던 말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벌써부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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