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Chapter 10. 리서치 미팅(4)
‘또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며칠 전 최세영에게 들었던 말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벌써부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된 느낌이었다.
* * *
리서치 센터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병원에서 10여 분 떨어진 일식집이었다.
‘여기는 무슨…….’
실내 연못에는 물고기가 노닐고 인공 암반에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 사람이 미리 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병우 교수와 강서현 그리고 처음 보는 중년 남자였다.
“어서 오게. 며칠 전에는 실례가 많았네.”
강병우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시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쪽은 저희 리서치 센터 수석 연구원님이세요.”
“반갑습니다. 임정석입니다.”
수석 연구원.
강서현이 책임 연구원인 것을 생각하면 자기 상급자를 데려온 셈이었다.
“정신과 1년차 천시현입니다.”
그룹 회장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외부 기관이었다.
병원 내에서야 인턴과 함께 가장 어린 축에 드는 시현이었지만 위축될 필요는 없었다.
“배고플 텐데, 음식부터 들지.”
강병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이 상에 올랐다.
과거 레지던트 생활을 통틀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대접이었다.
“요즘 레지던트 선생님들 근무여건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힘들지?”
“저희 교수님들도 의국 선생님들도 다들 좋은 분들이라 할만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시니어인 이광섭, 진철영 교수를 비롯하여 주니어 교수, 펠로우, 레지던트 고년차까지.
삼아대병원 정신과는 대체로 분위기가 좋은 편이었다.
최지훈이 좀 밉상이긴 한데, 그마저도 다른 과에 가면, 빌런 축에도 못 낄 인물이었다.
“그래. 정신과 교수님들 다들 점잖은 분들이시지. 다 좋은데…… 연구 욕심이 너무 없는 게 흠이랄까.”
환자들의 병원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연구 실적은 대외적인 과의 위상과 관련이 있었다.
삼아대병원 정신과의 의료진 수준이나 치료 프로그램은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할 수는 있었지만, 연구 실적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우리 천시현 선생님 같은 레지던트들이 많이 들어오면, 앞으로는 좋아질지도 모르지.”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그날 천 선생이 이야기했던 거 우리 내부 회의에서도 다시 이야기해봤어.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더군.”
내부 회의에서 무슨 말을 들었던 것일까.
강병우의 태도가 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맞습니다. 단순히 후보 물질을 소개하는 형식적인 자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질적인 피드백을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저도 좀 놀랐습니다.”
리서치 센터 수석 연구원, 임정석도 시현을 치켜세웠다.
‘왜 이러실까. 적응 안 되게.’
“앞으로 우리 센터 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느낀 건 젊은 레지던트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시현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강서현이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임상 연구라는 게 최소 3년인데, 지금 시니어 레지던트들은 전문의 취득하시면 다 나가실 수도 있으니까요.”
논문의 최종 책임자인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는 센터장이나 주임 교수급이 담당하지만, 한 편의 논문이 탄생하기까지 실무에는 레지던트들이 관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오늘 부르신 건?”
“아, 다른 뜻은 없어요. 그때 미처 못 나눈 이야기도 좀 하고…….”
강서현이 시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천시현 선생님과 좀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요.”
쿨럭. 쿨럭.
사레라도 들린 것일까.
강병우가 갑자기 마시던 사케잔을 내려놓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공부와 연구밖에 모르던 딸이 누군가에게 저런 식의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 보았다.
“사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때 다 드렸습니다. 중도탈락률이 높아서 임상 연구가 중단될 수 있다…… 그 이상의 의견은 없습니다.”
시현이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그런……가요?”
강서현이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자 이번에는 임정석이 물었다.
“그렇다면 일단 시작 용량을 낮추고 최종 목표 용량도 조절하면 어떻겠습니까?”
“노인과 같이 약물 부작용에 민감한 환자군을 치료할 때, 낮은 용량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증량하는 건 효과적인 전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계획을 조금 수정해서 절반 용량으로 시작…….”
“하지만, 조현병 약물 ASP-9022에 있어서는 그렇게 좋은 전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현의 말에 임정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높은 용량을 써야만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용량을 낮추면 치료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큽니다.”
가능성이 큰 정도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과거 임상 시험에서도 참가자들이 부작용을 호소하면 일단 약물을 감량하고 좀 더 천천히 증량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과는 실패였다.
약물을 감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환청과 피해망상의 악화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늘어났기 때문.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환자들은 연구를 중단하고 기존 치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 약물의 치료적 범위가 매우 좁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치료적 범위(therapeutic window).
모든 약물은 적정 농도에서 치료적 효능을 갖는다.
특정 농도에 미치지 못하면 효과가 떨어지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독성으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한다.
이 범위가 넓은 약물의 경우 적당히 처방해도 효과를 볼 수 있는 환자들이 많다.
반면, 이 범위가 좁으면 약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환자가 줄어든다. 조금만 용량이 모자라도 효과가 없고, 조금만 넘쳐도 부작용에 시달리기 때문.
“그렇다면, ASP-9022는 임상 의사 입장에서 처방하기 매우 까다로운 약물이 되겠군요.”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시현의 말에 임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회의 때 잠깐 슬라이드를 보고 알 수 있는 내용인 건가? 이런 수준의 통찰이라니…….’
리서치 센터의 수석 연구원이 되기까지 그 또한 다양한 기관에서 연구 실적을 쌓았다.
제법 규모 있는 대학병원들과 협업도 했고 각 분야의 대가로 알려진 교수들과 일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후보 물질의 약리학적인 프로파일만 보고 이 정도의 의견을 낼 수 있는 의사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이 약물을 기술 이전을 하려던 회사 입장에서는 조금 서운할 수도 있겠군요. 저희야 이 연구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다행이지만.”
강서현이 시현에게 말했다.
“마침 오늘 회사 관계자분이 오신다고 하셨는데…….”
드르륵.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닫이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의 중년 남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대, 대표님께서 어떻게?”
실무자만 보내도 충분한 자리에 대표라니.
그를 본 강서현은 조금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우리 회사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들러봤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불편한 것은 아니신지 걱정입니다. 허허허.”
“그럴 리가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은 그의 첫 마디는 더더욱 뜻밖이었다.
“천시현 선생님, 반갑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그가 시현에게 명함을 건넸다.
㈜IM바이오 CEO 곽정수.
얼마 전 입원했던 이인임 환자의 남편이자, ASP-9022를 개발한 회사의 대표이사였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단순한 지인 그 이상이라는 느낌이었다.
리서치 센터장인 강병우보다 수석 연구원인 임정석보다 불과 레지던트 1년차인 시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걸 보면.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신가요?”
“아, 그건…….”
순간 시현이 머뭇거렸다.
환자의 보호자를 사석에서 만난 상황.
진료 중 알게 된 모든 것에 대해 외부에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제가 최근에 여기 천 선생님에게 조언을 좀 받았습니다.”
그 모습에 곽정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언…… 이요?”
“네, 저희 사업에 대해서요. 덕분에 저희가 큰 화를 면했지요.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 허허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듯했다.
‘회사 대표에게 대체 무슨 조언을?’
강서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저희 ASP-9022는 정신과와 같이 임상 진행하기로 결정 난 건가요? 이렇게 정신과 선생님도 와 계신 걸 보니…….”
곽정수는 근 며칠간의 상황을 보고받지 못한 듯 보였다.
“저, 그게…….”
강서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최근 미팅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을 전달했다.
약물 용량 설정이 어려움이 있다는 말부터 치료적으로 활용하기가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말까지.
그녀의 설명을 듣고 난 곽정수의 표정에 실망감이 번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도 논의 중입니다. 가능성 있는 후보 물질을 놓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용량을 줄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과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곽정수가 이번에는 시현에게 물었다.
“아직까지 과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도 개인적으로 오게 된 거고요.”
“흐음.”
신약개발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임상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도 최종적으로 폐기되는 후보 물질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데, 시작부터 이래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사실 이번에 회사에 위기가 좀 있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지분 싸움에 휘말려서 회사가 만신창이가 될 뻔했지요.”
곽정수가 술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한고비 넘겨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최근에는 회사 내부에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고가 터지질 않나…… 투자하겠다고 하던 쪽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투자 철회를 하질 않나…….”
피인수되고 사명을 바꾼 후 승승장구하던 모습만 기억하던 시현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뭔가 도움이 되고 싶기는 한데.’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임상 시험의 시행착오를 줄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도움을 줄 방법이 없었다.
이래서는 피인수되는 것보다 좋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곽정수의 한숨으로 분위기가 무거워진 가운데, 임정석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입을 뗐다.
“천시현 선생님, 선생님은 비록 1년차이긴 하지만 연구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 뭔가 역할을 하실 것으로 기대가 되는데…… 실제 연구가 시작된다면 주로 어떤 역할을 맡게 되시나요?”
“저는…….”
시현의 말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아마도…… 검사 결과지가 나오면 그걸 엑셀에 옮겨 입력하는 작업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엑셀… 입력이라고요?”
“네, 아무래도 실무는 선생님들이 하시는 거고 저희는 아직 1년차니까요.”
그 대답에 임정석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