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36화 (36/195)

36화 Chapter 11. 동상이몽(2)

면담실에 들어온 환자와 보호자.

‘예전과 똑같아.’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단발 파마머리.

가무잡잡한 피부톤에 주름진 얼굴.

그리고 구부정한 어깨.

전반적으로 실제 나이에 비해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병동 담당의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선생님. 나 좀 어서 낫게 해주세요.”

환자는 시현을 붙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이말순 여/71 R1 천시현 / 담당 교수 이광섭]

딩동!

[SORA : ‘세상의 모든 차트’에서 진료 기록을 불러옵니다.]

면담을 시작하자 과거 시현이 작성했던 기록들이 떠올랐다.

‘고마워.’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환자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는 일.

진료 중 의무기록 작성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는 시스템의 도움으로 과거 자신이 작성했던 기록을 들고 환자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이말순 님, 어떻게 불편해서 오시게 됐을까요?”

“음……. 그러니까 귀에서 막 소리가 들려요. 막 죽인다고 하고 방에다가 뱀을 푼다고 하고…….”

[2달 전부터 시작된 위협적인 내용의 환청]

“이게 다 업보지. 그동안 너무 잘못 살았어. 이제는 갈 때가 된 것 같아.”

[죄책 망상에 가까운 자책]

“어휴, 엄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선생님, 저희 엄마가 답답하다고 숨도 못 쉬겠다고 하시고 밤에는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는 것 같아요. 가슴도 두근거린다고 하시고요.”

[심계항진 및 호흡 곤란]

[우울한 기분 및 불면]

일단 환자와 보호자가 말하는 내용들은 과거 기록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오늘 저녁부터는 잘 주무실 수 있게 약물 처방해드릴게요. 초조감이 심하면 주사제도 쓸 수 있고요.”

시현이 일단 환자를 안심시켰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걸까요? 선생님, 저희 엄마 괜찮겠죠?”

보호자로 온 환자의 딸이 물었다.

환자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빼다 박아 환자의 30년 전 모습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은 모습이었다.

“일단 원인 평가가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뇌 MRI 촬영부터 혈액검사 그리고 신경인지검사도 필요할 것 같고요.”

“아, 그렇군요…….”

보호자가 말끝을 흐리며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비용이 걱정되는 거겠지.’

상태가 심각해 보이니 일단 대학병원으로 모시고는 왔는데, 각종 검사에 병실료까지 하면 입원비가 상당할 터였다.

[Brain MRI – 뇌 실질의 경한 위축 및 경한 뇌실 확장]

[신경인지검사 – 주관적인 기억력 저하 호소. 나이와 교육 연수를 고려했을 때 정상에 가까운 소견]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과거 검사 결과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알고 있어도 똑같은 검사를 다시 해야 하다니.’

검사 자체를 생략한다면 교수나 시니어들이 보기에는 꼭 해야만 하는 검사를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일 터.

‘그렇다고 검사를 안 할 수도 없고.’

다른 무엇보다 원인 평가가 중요한 환자인데, 아무런 평가 없이 덜컥 약을 쓰는 것도 이상했다.

이광섭 교수나 최지훈으로부터 지적이 들어올 것이 뻔했다.

“필수적인 검사 위주로 최소한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꼭 필요한 건 다 해주세요. 비용이야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요.”

똑똑똑.

바로 그때, 누군가가 면담실로 들어왔다.

오피스 정장에 서류 가방.

뿔태 안경을 쓴 깐깐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아, 언니 오셨어요?”

보호자가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아가씨, 오랜만. 어머님, 저 왔어요.”

중년 여성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리에 앉았다.

‘큰 며느리였던가. 무슨 대학병원에서 일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회귀 전에도 몇 번 병동에 방문해서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던 사람이라 기억에 남는다.

“잠 조금 못 주무시는 건데 굳이 입원까지…… 어머님 답답하실 텐데.”

며느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딸에게 핀잔을 주었다.

역시나 환자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담당 레지던트신가요? 어머님 상태는 어떤가요?”

“어제 입원하셨고 오늘 첫 면담입니다. 아직 뭐라 말씀드릴 단계는 아니고 일단 평가가 필요…….”

다짜고짜 묻는 태도가 거슬렸지만, 시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평가라면…… 검사 아닌가요? CT나 MRI 같은?”

“네, 그렇습니다. 영상의학적 검사도 포함됩니다.”

“그럼 하는 김에 이것저것 검사 충분히 잘 해보시고 진단서 좀 잘 써주세요. F001 코드 들어가게요.”

F001.

알츠하이머 치매를 뜻하는 질병 분류 코드였다.

“치매 진단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저희가 임의로 붙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검사 결과에 따라서…….”

“어휴,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드리잖아요!”

“…….”

“간호사실에 물어보니까 아직 1년차 선생님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가 너무 팍팍하시네요. 환자 생각해서 융통성 있게 좀 처리해주시면 안 되겠어요?”

간혹 진단서 좀 잘 써달라고 사정하는 보호자는 봤어도 이렇게 뻔뻔하게 요구하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아가, 선생님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라.”

“맞아요, 언니. 그리고 엄마가 기억력이 조금 떨어지기는 했어도 아직 치매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보다 못한 환자와 딸이 며느리를 말렸다.

“아가씨는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예전에 어머님 치매 보험 들어둔 거 있죠? 병원비라도 거기서 보장받아야 할 것 아니에요? 형편도 넉넉하지 않은데.”

“그거 지난달에 아범이 형편 어렵다고…… 해약해서 주지 않았니?”

“…….”

순간 보호자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그랬었나요? 그거 어떻게 해약 취소는 안 되나…….”

며느리는 뒤늦게 뭔가 생각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기억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검사는 더 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치매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

시현의 말에 며느리는 얼굴을 붉혔으나 돈 걱정하지 말고 치료받으라거나 작게나마 병원비를 보태겠다는 말 따위는 전혀 없었다.

‘환자 가족력 출력해줘.’

[SORA : 이말순 환자의 가족력을 출력합니다.]

시현은 ‘세상의 모든 차트’에 기록된 내용을 살폈다.

7남매 중 여섯째.

젊어서 남편과 사별.

슬하에 아들 셋과 딸 하나.

환자는 평생 반찬 가게를 하면서 4남매를 키웠으나, 정작 자신의 노후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렵게 키운 만큼 자녀들이라도 환자를 잘 챙겼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다들 효도와는 거리가 먼 위인들이었다.

그나마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온 막내딸이 가장 지지적인 편이기는 했는데.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어.’

다만 워낙 불안이 높아서 환자를 안심시켜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꼭 필요한 검사 위주로 신속하게 진행하도록 하고 다인실이 나면 빨리 옮길 수 있도록 간호사실에 얘기해 두겠습니다.”

시현은 서둘러 보호자 면담을 마쳤다.

‘이번에도 전혀 도움은 안 되겠어.’

며느리가 병문안을 오고 난 뒤 환자의 표정이 더욱 나빠진 것 같았다.

고령 환자일수록 가족 지지가 중요한데, 이말순 환자는 기댈 곳이 전혀 없어 보였다.

* * *

“그래, 환자 면담은 해봤나?”

오후 회진차 들른 이광섭이 시현에게 물었다.

“네, 우울과 불안이 매우 높은 수준이고 Psychotic sx.(환청이나 망상과 같은 정신병적 증상)이 동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치료 계획은?”

“초조감이 심해서 일단 항불안제를 투여했습니다만, 주 치료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검토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생각해보겠다고?”

이광섭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시현이 판단을 미루는 모습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비록 1년차였지만,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고 대답도 늘 정답에 가까웠다.

“고민할 게 뭐 있어? 정신병적 양상이 동반된 심한 우울증에는 항우울제와 항정신병 약물을 함께 쓰는 게 1차 치료인 거 몰라?”

“…….”

오랜만에 건수를 잡았다는 듯 4년차 최지훈이 시현을 비난하고 나섰다.

“담당 교수님 회진인데, 모르겠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면 어떡해? 일단 가이드라인 대로…….”

“본원에 방문하기 전 local(규모가 비교적 작은 현지 병원)에서 시도했던 약물들입니다.”

시현이 회의실 스크린에 슬라이드 한 장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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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설프리드 50mg – 근긴장 이상으로 중단]

[퀘티아핀 12.5mg – 주간 졸음 및 어지러움으로 중단]

[올란자핀 1.25mg - 혈당 상승으로 중단]

[리스페리돈 0.25mg - 심한 떨림으로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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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본원에 입원하기 전, 개인병원에서 여러 항정신병 약물을 투여했으나 부작용으로 인해 유지가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편의상 개인병원이라고 했을 뿐, 회귀 전 시현이 작성했던 차트의 내용을 옮겨적은 것이었다.

“흐음.”

이광섭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화면을 응시했다.

“이게 어떻게…….”

최지훈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시작 용량을 처음부터 너무 높게 잡았다거나 약물을 급하게 증량해서 부작용이 생겼다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슬라이드에 적힌 약물들은 최소 용량의 절반 이하였다.

더는 감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낮은 용량이었던 것.

- 엄마는 소화제만 잘못 드셔도 손떨림이 생기는 체질이거든요.

과거 보호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환자를 진료할 때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약물 부작용이었다.

다른 환자들이 복용하는 용량에 훨씬 못 미치는 용량으로 시작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봐도 만만치가 않네.’

정신과 약물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적정 용량으로 충분한 기간 치료해야만 한다.

부작용이 심해 낮은 용량을 쓸 수밖에 없고 그마저도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면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아직 안 써본 약물이… 그래! 팔리페리돈은 어때? 서방형 제제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최지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팔리페리돈은, 가장 낮은 제형이 3mg부터 시작하고 삼투압에 의해 서서히 방출되는 제품 특성상 잘라서 복용할 수도 없습니다. 리스페리돈 0.25mg도 힘들어하셔서 아무래도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클로자핀은? 추체외로 부작용이 심한 경우니까 좋은 옵션일 것 같은데.”

“퀘티아핀 12.5mg도 진정작용으로 중단한 바 있습니다. 혈당 상승에도 유의해야 하고요.”

“…….”

몇 가지를 더 제안했지만 역시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애초에 최지훈이 잠깐 고민한 정도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면 시현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광섭이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대화 내용만으로 보면 누가 4년차이고 누가 1년차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요. 최근 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케이스 같은데, 잘 상의해서 적절한 치료법을 찾아봅시다.”

“네! 과장님!”

“다만, 치료 방법을 결정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서도 안 됩니다. 노인일수록 초조감을 견디기가 힘든 법이니까.”

이광섭은 간단한 코멘트를 끝으로 회진을 마쳤다.

- 시니어들이 1년차들 잘 살펴봐 주세요.

학기 초가 되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

언제부턴가 그 말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군.’

말은 ‘상의’라고 했지만 정작 궁금한 것은 시현이 내릴 결론이었다.

※ 이 작품은 창작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집단, 지명 사건 등은 실존하는 것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작품 내 등장하는 의학 지식은 작품에 맞추어 재구성 및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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