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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37화 (37/195)

37화 Chapter 11. 동상이몽(3)

며칠 뒤.

“그래, 이말순 환자 치료 계획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회진 전 회의에서 이광섭이 시현의 의견을 물었다.

“지금으로서는 ECT가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ECT(Electroconvulsive treatment).

전기경련치료를 뜻하는 말로, 환자의 뇌로 전류를 흘려 인위적으로 경련을 유발하는 치료법이다.

약물치료에 반응하지 않거나, 이말순 환자처럼 약물 부작용이 심한 환자에게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었다.

“ECT라…….”

이광섭의 얼굴에 아주 잠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ECT는 수술장에서 전신마취하에 진행하는 치료.

효과적인 치료라고는 하나 그 나름의 리스크는 있었다.

때문에 삼아대병원 정도의 병원에서도 1년에 ECT를 시행하는 케이스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 충분히 해볼 만한 방법인 것 같군.”

이광섭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증상은 심하고 약물치료가 적절하지 않은 환자에게 시도할 수 있는 치료는 많지 않았으니까.

면담을 기반으로 하는 정신치료도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효과가 더디고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환자의 나이를 고려하면 적절하지 않은 선택이다.

지금 상황에서 시현의 대답은 지극히 교과서적이었다.

‘그런데 왜…….’

이광섭은 뭔가 마뜩잖은 표정이다.

80점, 아니 70점 정도 줄 수 있겠다는 표정이랄까.

“ECT가 효과적인 치료인 것은 동의하지만, 주류가 되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전신마취의 합병증과 기억상실과 같은 심한 부작용 때문입니다.”

“맞아. 그리고 또 하나.”

이광섭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정신 약물학의 발달 때문이기도 하지. 이 환자, 약물치료 전략을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약물치료 전략을 조금 더 고민해보라는 주문.

사실 이광섭 과장은 효과보다 안정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타입이었다.

“입원한 지 며칠 안 되어서 시간이 부족했을 거라 생각되는데. 좀 더 관찰해보고 다시 상의합시다.”

‘아직 써보지 않은 약물이 몇 가지 있기는 한데…….’

워낙 부작용에 예민한 체질이라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담당 교수가 우선 약물치료부터 시도하도록 지시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ECT를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이말순 님은 새벽에 어떻던가요?”

시현은 병동에 오자마자 환자 상태부터 챙겼다.

“아직도 많이 불안해하세요. 자다 깼을 때 무섭다고 간호사실 여러 번 오셨어요.”

입원 4일 차.

안정제만으로는 증상을 일부 완화할 수만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환자였다면, 시간을 두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이말순 환자에게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 저희가 형편이 안 좋아서 오래 입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어제 보호자 면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막내딸이 했던 말이었다.

실제로 과거 입원에도 환자는 2주가량 입원 후 증상이 충분히 나아지지 않은 채로 퇴원했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전문의의 역량.

과거의 기록.

그리고 시스템의 도움.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환자분, 오늘은 좀 어떠세요?”

시현이 환자의 침상에 다가가 물었다.

“아직도 소리가 많이 들려요. 병동에 뱀을 풀어 놓는다고 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하고… 진짜로 그러면 어떡해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지금 경험하시는 건 증상일 뿐이에요.”

“어떡하지… 이 일을 어째…….”

안심시키는 말 몇 마디로 가라앉을 불안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 목소리가 그렇게 들리시나요?”

“모르겠어요. 모르는 남자 같은데, 아마도 마귀인 것 같아요. 그동안 내가 너무 잘못 살아서…… 이렇게 벌을 받나 봐요.”

심한 죄책감.

그리고 그런 감정을 반영하는 것 같은 위협적이고 징벌적인 내용의 환청.

일단은 정신병적 양상을 동반한 심한 우울증으로 보였다.

적극적으로 치료제를 때려 부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약물 선택도 못 하고 있다니.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많이 남기셨네요. 입맛이 없으신가요?”

시현의 시선이 환자의 식판을 향했다.

“원래부터 소식하는 편이라서…… 기름진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요.”

“체중 감소도 우울증 증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뭐든 가리지 말고 골고루 드세요.”

시현의 말에 환자는 밥을 몇 술 더 뜨는 듯했지만, 여전히 밥알을 세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물 반찬 몇 가지 그리고 밥 반 공기 정도나 섭취했을까.

다음 순간, 손도 대지 않은 고기반찬이 시현의 눈에 들어왔다.

* * *

또다시 아침 회진.

“이말순 환자는 오늘 좀 어떻던가.”

“우울감이 심합니다. 환청과 죄책망상이 동반되어있습니다.”

보고하는 시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역시 무리인가.’

이광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받기로는 입원 전 다른 정신과에서 여러 약물을 시도했었다고 했다.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의가 이런저런 시도를 했음에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입원한 케이스인데, 1년차가 며칠 만에 뾰족한 수를 찾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군. 약물치료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일단 ECT를면 우선…….”

“오늘부터 지프라시돈(Ziprasidone) 20mg 스타트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광섭의 우려와는 달리 시현은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지프라시돈(Ziprasidone).

항정신병약의 일종으로 조현병과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약물이었다.

“지프라시돈이라면…… 캡슐 제제라 낮은 용량으로 시작하기 더 어렵지 않나?”

최지훈이 반대의견을 냈다.

알약이면 반으로 쪼개기라도 하지.

캡슐은 용량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약에 비해 특별히 이점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데. 지프라시돈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이광섭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환자 식습관을 고려했을 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약리학적 특성도 아니고 식습관으로 약을 선택한다고? 그게 무슨…….”

최지훈이 다시 끼어들었으나 이광섭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환자분은 육류나 기름진 음식은 거의 드시지 않습니다. 채식 위주로 굉장히 소식하는 편이고요.”

시현의 설명에 레지던트들은 ‘그게 뭐?’라는 표정이었다.

“지프라시돈은 음식물과 함께 섭취할 경우 흡수가 100% 증가합니다. 특히 지방이 풍부한 음식과 섭취하면 혈중 농도가 상승한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약물 농도가 높아지는 조건들을 역이용하겠다는 건가?”

“네. 환자분처럼 소식에 저지방 식이를 하시는 경우, 공복에 약물을 복용하도록 하면 부작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적은 용량에도 부작용을 호소하는 상황.

시현은 약물 농도를 더 낮추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좋은 아이디어야! 천시현 선생이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은데 일단 그렇게 해보지.”

이광섭의 얼굴에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 *

“환자분, 오늘부터 공복에 약을 드시게 될 겁니다.”

이른 새벽.

환자들의 아침 식사 시간 전에 시현이 미리 환자를 찾았다.

“빈속에요? 그럼 약이 독하지 않을까요?”

환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괜찮을 겁니다. 오히려 빈속에 드셔야 부작용이 덜 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약물에 예민한 만큼이나 걱정도 많은 환자였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오늘 당직이라서 계속 병원에 있으니까요.”

“당직이면 퇴근을 안 한다는 말씀이세요?”

“네. 실은 제가 1년차라서 퇴근을 거의 못 합니다. 원래 레지던트라는 말이 ‘병원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래요.”

시현이 멋쩍은 듯 웃으며 환자에게 약을 건넸다.

“알겠어요. 일단 그렇게 먹어 볼게요.”

환자는 뭔가 못 미더운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시현이 건네는 약을 받아 들었다.

딩동!

[system : 이말순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8/100 -> 18/100]

‘일단은 이대로.’

오랫동안 10에도 미치지 못하던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처음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 * *

“이말순 님,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회진 일행을 이끌고 병실을 찾은 이광섭이 환자에게 물었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교수님.”

“선생님, 엄마가 엄청 편해지셨다고 해요.”

마침 병실에 있었던 환자의 막내딸도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부작용 때문에 약을 못 써서 문제였지 치료 반응 자체는 나쁘지 않은 듯했다.

“수면 호전되셨고 HAM-D(우울증 평가 척도의 일종)도 15점 정도로 호전 보이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좋아졌군요.”

시현의 보고에 이광섭 또한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아이고. 이상한 소리가 안 들리니까 이제 좀 살겠어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던지…….”

“이제 많이 괜찮아지신 것 같은데, 퇴원해도 될까요?”

좀 이른 타이밍이긴 했지만 벌써 퇴원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천시현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평소 이광섭은 담당의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

역시나 이번에도 시현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충분히 퇴원 고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외박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정도면 나쁘지 않지.’

시현이 보기에도 많이 좋아지긴 했다.

[치료 진척도 45/100 퇴원까지 14일 3시간 20분 25초]

최근 며칠 동안 치료 진척도도 많이 올라왔고.

환자 상태에 비해 퇴원까지 남은 기간이 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일찍 퇴원한다고 하여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래요. 퇴원 일정 조율해보도록 합시다.”

이광섭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딩동!

그때였다.

이광섭이 퇴원을 결정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알림음이 울렸다.

과거에 까다로웠던 환자를 훌륭하게 치료한 것에 대한 보상이리라.

들뜬 마음으로 시스템 창을 열어본 시현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system : 이말순 환자의 생존확률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생존확률 25%]

‘이게 어떻게?’

애초에 목숨이 위태로워 입원한 환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은 우울감도 호전되고 자살사고도 거의 없는 상황 아니던가.

어떤 이유로 생존확률이 떨어지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병동 환자들은 다들 안정 상태군요.”

회진을 마치고, 이광섭이 레지던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말순 님이 걱정이었는데 좋아져서 다행입니다. 천시현 선생,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광섭의 칭찬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환자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음에도 생존확률이 급격하게 낮아진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퇴원하는 길에 사고라도 난다는 건가?’

새로운 알림창이 떠오른 타이밍을 생각해보면 이광섭이 퇴원을 결정하고 난 직후였다.

‘그렇다고 억지로 붙들어 놓을 수도 없고.’

시현의 고민이 깊어가던 찰나.

“선생님, 잠깐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병동 간호사 이선지가 급하게 시현을 찾았다.

“네? 무슨 일로…….”

“이말순 환자분이 흉부 불편감 호소하셔서요. BP(혈압)도 조금 낮으시고요.”

이선지의 말에 시현은 곧장 병실 쪽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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