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38화 (38/195)

38화 Chapter 11. 동상이몽(4)

“이말순 환자분이 흉부 불편감 호소하셔서요. BP(혈압)도 조금 낮으시고요.”

이선지의 말에 시현은 곧장 병실 쪽으로 달려갔다.

* * *

“이말순 님, 괜찮으세요?”

회진 돌 때까지만 하더라도 퇴원을 이야기할 정도로 호전된 환자가 별안간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요.”

힘겹게 대답하는 환자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EKG(심전도) 준비해주세요!”

“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턴이 심전도계를 끌고 왔다.

심근경색과 같은 응급상황이라면 빠른 조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이이잉.

서둘러 환자의 사지와 흉곽에 전극을 붙이고 버튼을 누르자, 모눈종이에 심장의 전기적 활성도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출력되어 나왔다.

‘QT prolongation(QT 간격 지연)!!!’

심전도를 구성하는 Q wave에서 T wave까지의 간격이 정상보다 확연히 늘어난 소견.

심장 박동에 필요한 신호 전달이 원활하지 않다는 의미로, 부정맥으로 이어져 심한 경우 급사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

“저희 엄마 괜찮으신 건가요? 왜 이렇게 되신 거예요?”

보호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마도 지금 드시고계신 약이……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분명 입원 당일에 촬영한 심전도는 정상이었다.

입원 후 달라진 거라고는 약물 투여뿐.

효과가 있는 약을 어렵게 찾았는데, 이 또한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중단해야 할 상황이었다.

“약이요? 그 약 쓰고 엄마 많이 좋아지셨는데 도대체 왜…….”

“매우 드물지만, 항정신병 약물이 심장 박동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약물은 일단 중단하고 다른 치료를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현이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럼 퇴원도 미뤄지는 건가요?”

보호자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네. 지금은 퇴원이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시현이 심전도 결과지를 이광섭 교수에게 건넸다.

약물로 인한 QT 간격 지연.

그 또한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쳤다.

“흠… 아무래도 처음 생각했던 대로 ECT를 고려해야겠군.”

“그게 뭔가요?”

“비약물적 치료방법인데 쉽게 말씀드리면, 뇌에 전기자극을 주는 치료입니다.”

“전, 전기충격을요?”

보호자가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정확히는 전류를 흘려 경련을 유발하는 치료지만, 거기까지 설명했다가는 까무러칠 기세였다.

“그거 안전한 건가요? 부작용은요? 아니, 너무 비싸지는 않나요?”

“대체로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입니다. 전신마취를 해야 하니 부작용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광섭이 안심시키듯 말했으나 보호자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천시현 선생, 잠깐 따로 보지.”

“네, 과장님.”

시현은 이광섭을 따라 병동을 나섰다.

* * *

“심전도 이상이라니. 이런 환자도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이광섭이 교수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죄송합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시현이 고개를 숙였다.

“천시현 선생 나무라려고 부른 거 아냐. 이런 부작용은 애초에 예측이 어렵지.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대응하는 수밖에.”

‘그럼 무슨 일로?’

문득 이광섭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그와의 독대는 과거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으니까.

“이 환자, 잘 치료해서 케이스 리포트를 해보면 어떻겠나? 늦은 나이에 발병한 환청도 그렇고 약물 치료에 대한 반응도 그렇고 굉장히 드문 경우인데.”

“케이스 리포트라면… 논문으로 내보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정도면 대한신경정신의학회지에 충분히 실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면 국제 학술지에 투고해도 좋고.”

1년차 초반에 논문 작성이라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대한신경정신의학회지라면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였다.

“…….”

“어렵겠나? 하긴, 아직 한참 과에 적응할 시기이긴 하지. 정 그렇다면 최지훈 선생에게 써보라고…….”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에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던 찰나.

“한번 해보겠습니다.”

돌연 시현이 논문 투고에 의욕을 보였다.

“그 증례 보고, 제가 꼭 하고 싶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겠어? 윗년차들에게 도움을…….”

“일단 제목은 ‘정신병적 우울증 양상을 보이는 고령 환자에서의 ECT 증례 보고’로 해도 되겠습니까?”

그럴듯한 제목까지 뽑아둔 걸 보면 어떤 내용으로 쓸지도 정해둔 것 같았다.

“으음. 괜찮을 것 같네만.”

“매우 흥미로운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정신병적 양상을 동반한 우울증으로만 봤었는데, 지금 보니 VLOSLP(Very Late Onset Schizophrenia-Like Psychosis)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VLOSLP라고?”

이광섭이 놀라서 되물었다.

전문의들에게도 낯선 용어를 이제 막 1년차가 된 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VLOSLP는 ‘매우 늦은 발병을 보이는 조현병과 유사한 정신증’을 뜻하는 말로, 아직 정식 번역어가 없을 정도로 생소한 개념이었기 때문이었다.

‘환자만 잘 보는 게 아니라 이 정도 식견이라니…….’

최소 4년차.

아니, 펠로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듬직한 1년차였다.

거기에 최근 리서치 미팅에서 보여준 모습까지 생각하면 실제 역량은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일단 그렇게 진행하면 좋겠어. 혹시 혼자 진행하기 어려우면 시니어들에게 도움도 청하고. 담당 4년차가 최지훈 선생이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학회 심사 준비로 바쁠 시즌이라 최대한 제 선에서 해보겠습니다.”

이광섭이 말하는 중에 시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담당의로서 환자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굳이 다른 레지던트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 알겠네. 어서 가서 마저 일 보도록 해.”

“네, 과장님.”

시현은 이강섭에게 꾸벅 인사한 뒤 교수실을 나섰다.

‘선배 배려할 줄도 알고. 근래 보기 드문 친구로군.’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이광섭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

병동으로 가는 길.

“휴. 큰일 날 뻔했네.”

시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논문 쓰는 일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다.

정작 견디기 힘든 일은 따로 있었다.

일은 하나도 안 하면서 2 저자에 숟가락을 얹으려 드는 최지훈을 보는 것.

- 내가 네 담당 4년차인데, 같이 본 환자니까 당연히 이름은 올려야 하는 것 아냐?

그가 할 법한 대사가 뇌리를 스쳤다.

‘같이 보기는 무슨…… 내가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시현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담당의 선생님 이제야 오셨네!”

병동에 들어서자 보호자가 기다렸다는 시현을 향해 다가왔다.

입원 당일에 만났던 환자의 며느리였다.

“선생님, 이말순 환자 보호자가 아까부터 찾으셨어요.”

간호사가 작게 소곤거렸다.

“어머님이 무슨 수술을 한다고 하는데 그건 또 뭔가요?”

“수술은 아니고, ECT라고 해서 수술방에 내려가서 하는 치료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아무튼 비싼…… 아니, 부작용이 심한 치료 아닌가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

“약 쓰고 많이 좋아졌다고 하시던데, 그냥 이대로 치료하다가 퇴원하시면 되는 걸 너무 과잉진료하시는 거 아녜요?”

돈 드는 치료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눈치.

보호자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약물 효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심전도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지금 처방을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다른 약 쓰면 되죠. 아니, 우리나라에 제약회사가 몇 갠데… 그중에 맞는 약 하나 찾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어렵죠. 많이.’

과거 경험까지 더하면, 시중에 있는 약들 가운데 웬만한 건 다 시도해봤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어려운 건 환자의 경제적인 상황 그리고 협조적이지 않은 보호자들이었다.

“보호자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불필요하게 입원 기간을 늘리지 않는 방향으로 고민해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현으로서도 뾰족한 대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 * *

보호자들이 돌아가고.

다시 텅 빈 면담실.

시현은 교과서를 펼쳤다.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옆에 끼고 보느라 손때를 많이 탔지만, 이 시기에는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책이나 다름없는 신판 교과서였다.

고령에서 처음 나타나는 환청과 망상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

치매, 섬망 그리고 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였다.

지금으로서는 치매나 섬망이 의심되는 소견은 없으니 일단 우울증에 동반된 환청과 망상으로 보고 있지만, 혹여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아까 보던 거 다시 띄워줘.’

[SORA : 이말순 환자 차트를 출력합니다.]

시현은 또다시 허공에 떠오른 기록들을 살폈다.

면담 내용뿐 아니라 혈액검사와 영상 판독지까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기록을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SORA : 모든 기록을 열람하였습니다.]

입원 동안 온갖 약물의 부작용만 실컷 경험하다가 충분히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퇴원했던 환자였다.

‘방법이 없나…….’

이번엔 뭔가 더 나은 치료를 하기를 고대했으나, 결과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맞지 않는 약물들을 미리 배제한 덕에 환자가 약물 부작용에 덜 시달렸다는 것 말고는.

[SORA : 사용자의 피로도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SORA와 대면하고 있지 않았지만, 왠지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회복 포…….’

포션을 써볼까 잠시 망설였으나 지금 시현이 경험하는 것은 육체적 피로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 * *

[10 : 00 PM]

응급실 환자도 뜸하고 병동 환자들도 잠자리에 들어 모처럼 한가한 시간이었다.

“주문하신 카라멜마끼야또에 샷 추가 나왔습니다.”

원내 카페에 들른 시현은 음료를 받아들고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조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삼아대병원이었다.

병원 일은 잠시 잊고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봄밤에 잘 가꿔진 수목원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영 기분이 편치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안다면 모든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가?

모든 환자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자신이 만났던 환자들에게 훨씬 나은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여태껏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깨지는 데는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충분히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를 했음에도 이말순 환자의 경과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문득 전문의 시험 전날 봤던 마지막 환자를 떠올렸다.

알 수 없는 세력이 가족들을 납치하고 자신을 망상 환자로 몰아 입원시켰다고 주장하던 환자.

만약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고 망상장애 환자가 아니라는 걸 일찌감치 안다고 한들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일개 대학병원의 레지던트에 불과한 자신이 그의 편에 서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무력한 기분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를 한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시현을 불렀다.

※ 이 작품은 창작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집단, 지명 사건 등은 실존하는 것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작품 내 등장하는 의학 지식은 작품에 맞추어 재구성 및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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