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39화 (39/195)

39화 Chapter 11. 동상이몽(5)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리서치 센터 연구원, 강서현이었다.

“잠깐 앉아도 되죠?”

그녀는 같이 있던 일행을 먼저 보내고는 시현의 건너편에 앉았다.

“연구원님은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병원에서 밤샘을 하는 인턴들과 레지던트들.

연구소 직원을 본 건 처음이었다.

“IM 바이오 사람들하고 미팅이 있었어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늦어졌네요. 선생님은 오늘 당직인가요?”

“네, 응급실에 환자가 있어서요. IM 바이오라면…… 조현병 치료제 ASP-9022 때문에 온 건가요?”

“아뇨. 다른 건 때문이에요. 사실 요즘 IM 바이오가 좀 시끄럽거든요.”

강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짙은 피로감이 묻어났다.

늦은 시간까지 회의를 진행했다는 것 자체가 뭔가 답이 없는 문제를 논의하다 나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회사에 무슨 일이 있나요?”

시현이 나서서 이인임 부부를 설득한 덕에 적대적 인수합병까지 피한 상황.

원래대로라면 신약 파이프라인이 주목을 받으며 승승장구해야 할 회사였다.

문제가 많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회사에서 최근에 위궤양 치료제로 임상 시험 중이던 후보 물질이 있거든요, 근데 피험자 중 한 명이 최근 간암을 진단받은 거예요. 전이도 있다고 하고요.”

“위궤양 치료제가 간암을 유발한다는 건 처음 듣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임상 시험과는 무관한 질병으로 제약회사를 걸고넘어지는 상황 같았다.

“그리고 전이가 있다는 건 병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라는 걸 의미합니다. 환자분이 몰랐을 뿐, 임상 시험을 시작한 시점에 이미 간암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맞아요. 환자가 B형 간염 보균자인 데다 평소에 술을 워낙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확실히 새로 시작한 약물 때문에 암이 생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그런 내용들로 충분히 해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시현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삼아 리서치 센터는 연간 수천 명의 피험자를 관리하는 연구 시설.

이 정도 일로 늦은 시간까지 회의를 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대상자분이 전혀 말이 안 통하는 분인가 봐요. 언론사 통해서 이슈화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이런 문제는 관련성이 없다고 해도 논란이 되면 무조건 회사만 손해에요.”

“하지만 그 케이스 한 건만으로는 별문제 없을 겁니다. IM바이오에서 보유하고 있는 파이프라인(신약후보물질) 가치만 해도 앞으로 수천억은 될 거니까요.”

시현은 무덤덤하게 이야기했으나 강서현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IM바이오에서 가능성 있는 신약 후보 물질들을 보유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신과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설령 정신과 쪽 약물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임상 전 단계에 있는 약물들.

레지던트가 아닌 교수라고 해도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은 신약개발 쪽으로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군요. 하지만, 회사에 별다른 영향이 없을 거라는 말……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요즘 무슨 일인지 IM바이오와 기술 이전 계약을 철회하겠다는 회사들이 연달아 나오고 있어요. 당장은 별문제가 없겠지만,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 투자금 유치가 힘들어지죠.”

‘이래서는 나아진 게 없잖아. 환자도 회사도…….’

시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적대적 인수합병만 피했을 뿐, 회사 사정은 더 나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말순 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과거의 경험을 활용해서 새로운 치료를 시도했음에도 결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아무튼, IM 쪽에서는 이런 분위기도 반전시킬 겸 새로운 임상 연구를 시도해보고 싶은 것 같아요. 선생님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뭐든 말씀해주세요.”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겸손이 지나신 것 같은데요? 뭐, 아무래도 좋아요. 반대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강서현은 시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연구와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요. 전 이만 가볼게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

다음 순간, 시현의 뇌리에 이말순 환자의 얼굴이 스쳤다.

* * *

“야! 황진호 선생 나오라고 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약을 처방해줬어?”

이른 아침부터 병동이 어수선했다.

지난주 퇴원했던 환자 보호자가 예정에도 없이 병동에 방문한 것.

“무슨 일이세요? 약에 문제가 있나요?”

황진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았다.

“아니, 우리 정민이가 불면증이 심해서 병원엘 입원한 건데 지금 이 약이 맞는 거요?”

흥분한 보호자가 황진호의 눈앞에서 약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네. 입원 중에 이 약으로 잠도 잘 주무시고 기분도 안정이 되셔서 퇴원하셨는데, 혹시 증상이 나빠져서 찾아오신 건가요?”

“증상은 둘째 문제고! 이 약이 맞는 거냐고 내가 묻잖소!”

병원에 와서 증상이 둘째 문제라니.

황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 여기서 이러시면 어떡해요?”

뒤늦게 나타난 환자가 보호자를 말렸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어제 아빠가 여기 처방전을 검색해보시더니 ‘조현병약’이 들어 있다면서 약 처방이 잘못된 거 아니냐고 화를 내시더라고요. 저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는데 자꾸…….”

환자가 난처한 듯 아랫입술을 물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습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황 선생, 무슨 일인가?”

보호자에게 뭔가 설명하려는데, 때마침 회진을 올라온 진철영 교수가 그를 불렀다.

“저,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마침 저희 회진시간이라서요.”

“잘못된 약을 처방해놓고 제대로 해명도 안 하고 어딜 내빼는 거야? 이거 우리 딸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휴. 아빤 가만히 좀 계세요. 선생님, 어서 다녀오세요.”

보호자를 가까스로 말리는 환자를 뒤로 한 채 황진호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 * *

“밖에 지난주에 퇴원한 고정민 환자 보호자 아닌가?”

진땀을 흘리는 황진호를 향해 진철영이 물었다.

“네, 약물 관련해서 문의하러 오신 것 같습니다.”

“문의? 문의라고 하기에는 좀 거친데. 무슨 내용으로?”

“퇴원 처방에 퀘티아핀 25mg가 들어있었습니다. 그걸 조현병약으로 알고 계셔서 항의차 방문하신 것 같습니다.”

퀘티아핀.

처음에는 조현병 치료제로 개발이 되었으나 실제로는 용도가 매우 다양한 약이었다.

양극성 장애, 우울증, 불안장애 그리고 불면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최근에는 조현병에 쓰이는 경우보다 그 외의 용도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25mg이면 최소 용량인데. 혹시 부작용이 있었나?”

“부작용 때문에 오신 건 아닙니다.”

퀘티아핀의 경우 조현병 환자들에는 1,200mg 이상 처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불면증 조절을 위해서는 25mg 내외를 주로 처방하는 편.

부작용이 있다 한들 이른 아침에 병원에 찾아올 만큼 심하지는 않을 터였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조현병 치료제라는 설명이 제일 첫 줄에 나오니. 이거야 원.”

진철영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회진 시작하기 전에 가서 잘 설명해드리도록 해요.”

“네, 교수님.”

“지금 용량으로는 한 달 분을 한꺼번에 복용해도 하루 최대 용량이 안된다는 설명도 꼭 드리고.”

회의실을 나서는 황진호의 뒤통수에 대고 진철영이 한마디 보탰다.

“나중에 외래 진료 보게 되면 종종 겪는 일입니다. 환자도 보호자도 자기가 먹는 약에 관심이 많다 보니 다들 열심히 찾아보거든.”

진철영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퀘티아핀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이런 상황을 예측했을까?”

그리고 레지던트들을 보며 물었다.

‘아마 몰랐을 겁니다.’

지금 시점에서 퀘티아핀 제제는 1정당 25mg부터 시작하지만, 몇 년 뒤에는 그의 절반인 12.5mg 제형도 출시된다.

그렇게 적은 용량에도 효과를 보는 환자들이 있기 때문.

어쩌면 먼 훗날에는 그의 절반인 6.25mg 제형이 새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 약을 처음 개발한 연구원조차도 이런 흐름을 예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잘 찾아보면 그런 예들이 많아요. 전에는 고혈압 환자들에게 처방하던 미녹시딜이 지금은 탈모약으로 쓰이고 있으니까.”

진철영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탈모와는 거리가 먼 미중년인 그가 미녹시딜 스프레이를 쓸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그 미녹시딜도 원래는 위궤양 치료제로 개발되었다고 해. 소화기 쪽 약이 순환기 내과를 거쳐서 피부과까지 오게 된 거지.”

“원래는 위장약이었습니까?”

김민홍이 놀랍다는 듯 반문했다.

“그래. 하지만 위장약으로서는 히트를 치지 못했지. 약이라는 게 일단 만들어지면 어떻게든 제 용도를 찾아간다는 생각이 들어.”

‘제 용도를 찾아간다. 제 용도를…….’

진철영의 마지막 말이 시현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통화 괜찮으세요?”

회진이 끝나자마자 시현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먼저 전화를 다 주시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건으로요.”

수화기 너머 강서현의 목소리에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 * *

며칠 뒤.

리서치 센터 대회의실.

지난 리서치 미팅 때와는 달리 오늘 회의는 리서치 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이광섭 과장님, 반갑습니다.”

강병우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이광섭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센터장님. 예상보다 빨리 뵙게 되었습니다.”

이광섭이 멋쩍은 웃음을 띠며 그 손을 맞잡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자리를 가득 메운 연구원들을 둘러보자 이광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어제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예정에 없던 자리였다.

- 과장님, ECT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말순 환자의 병동 담당의인 시현이 따로 찾아와 의외의 제안을 하기 전까지는.

기껏해야 의무기록을 검토해서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약물들 중 하나를 쓰겠지 생각했는데, 시현이 준비한 것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착석해주십시오. 오늘 자리는 항정신병 약물 ASP-9022의 본격적인 임상 시험에 앞서 예비연구 계획에 대해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내가 잠잠해지자 강서현이 곧바로 메인 화면에 슬라이드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오늘 발표는 정신과 레지던트 천시현 선생님이 해주시겠습니다.”

“뭐? 레지던트? 교수가 아니고?”

“우리 지금 레지던트 발표 듣자고 스케쥴 다 미루고 모인 거야?”

“레지던트가 연구에 대해 뭘 안다고.”

연구원들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정신과 1년차 천시현입니다. 일단 증례부터 보시겠습니다. 최근 2달 전부터 시작된 환청과 피해망상을 주소로 방문한 71세 여자 환자입니다.”

시현은 그런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말순 환자에 대한 발표를 이어나갔다.

“기존 치료에서는 근긴장 이상, 정좌불능 그리고 QT prolongation 등 이상 반응이 관찰되었으며…….”

주증상과 경과 그리고 기존 치료로 인한 부작용.

임상 의사가 아닌 사람이 들어도 새로운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공을 들인 모습이었다.

발표가 진행될수록 청중들의 비아냥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래서 전기경련치료(ECT)를 고려하던 중 그 전단계로 ASP-9022를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일단은 케이스 리포트 수준이 되겠지만, 좋은 결과를 낸다면 앞으로 피험자 수를 늘려 후속 연구를 진행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질문 있습니다.”

청중들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일전에 사석에서 따로 만났던 리서치 센터 수석 연구원 임정석이었다.

“지난 회의 때는 분명 ASP-9022의 부작용이 심해 항정신병 약물로서 투여하기 어려울 거라는 의견을 주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저희 내부 회의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얻었고요.”

연구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시현이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가 궁금한 듯했다.

“맞습니다. 분명 그렇게 말씀드렸었지요. 그래서 이번 예비연구에서는 기존 계획보다 더 낮은 용량에서 시작해볼까 합니다.”

“하지만, 용량을 낮추면 분명 항정신병효과가 떨어질 거라고…….”

“아, 그 부분을 마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현이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슬라이드를 띄웠다.

[새로운 기전의 항우울제 ASP-9022]

“지금부터 ASP-9022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시현의 말에 청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항정신병약물이 아닌 ‘항우울제’로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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