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Chapter 11. 동상이몽(6)
“지금부터 ASP-9022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항정신병약물이 아닌 항우울제로서요.”
시현의 말에 술렁이는 청중들.
“잠깐만요. 항우울제라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ASP-9022는 항정신병 약물로 개발된 약물입니다.”
수석 연구원 임정석 또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항정신병약물(Antipsychotics)은 애초에 환청과 망상 등 정신병적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약물.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항우울제(Antidepressant)와는 작동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용어 공부부터 다시 하고 와야 할 것 같은데.”
“레지던트라더니 항우울제와 항정신병약물을 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아까 발표는 좀 잘하는 것 같던데. 윗년차가 기록한 차트를 그냥 읽은 건가?”
또다시 시작된 웅성거림.
“ASP-9022는 치료 용량에서 도파민 수용체를 차단합니다. 오히려 우울 증상을 악화시킬 수도 있어요.”
“도파민 기능을 강화하는 항우울제는 봤어도 차단하는 항우울제는 지금껏 본 적이 없습니다.”
몇몇 연구원들은 직접적으로 볼멘소리를 냈다.
“맞습니다. 초기 연구계획서대로라면 항우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타겟 수용체와 목표 용량을 조절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지만, 여전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절반 용량으로 시작하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거라면 치료 효과가 떨어져서 적절하지 않다고 이미 결론이 났습니다.”
보다 못한 임정석도 한마디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ASP-9022을 몇 mg부터 시작할 계획입니까?”
“시작 용량을 기존의 10분의 1 수준으로 낮출 생각입니다.”
시현의 다음 말에 회의실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10mg가 아니고 1mg요?”
피식.
아까 시현에게 반대의견을 냈던 연구원 중 한 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절반 용량에서도 효과가 없을 것이 확실시되는 마당에 용량을 10분의 1수준으로 낮춘다면?
부작용은 없을지 몰라도 어떤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상식이었다.
“이것 보세요. 천 선생님. 그 정도 용량으로 도대체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그의 마이크에 불이 들어오고, 시현을 향해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흥미로운 발상인 것 같습니다. 계속해보세요.”
뜻밖에도 리서치 센터장 강병우가 시현의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초기 계획에서는 ASP-9022를 30mg 이상의 고용량으로 투여하도록 했습니다. 도파민 D2 수용체를 80% 이상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었죠.”
시현이 화면에 약물의 분자식과 수용체 친화도를 띄우며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약물치료의 목적을 수용체 차단이 아닌, 도파민 시스템의 균형 유지에 둔다면 어떻겠습니까?”
“균형 유지라면…… 과잉 활성화된 부분은 억제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준다는 의미입니까?”
시현의 말에 강병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ASP-9022는 도파민 수용체에 부분 길항제(partial antagonist)지만, 매우 낮은 용량으로 사용할 경우 도파민 기능을 촉진하는 구간이 분명 있다고 봅니다.”
도파민 기능을 차단하기 위해 개발된 약물로 도파민을 활성화한다니.
생각지도 못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울감은 호전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10mg가 아닌 1mg로 시작해서는 환청과 망상을 치료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강병우의 질문에 시현은 대답 대신 환자의 진단명이 적힌 슬라이드를 띄웠다.
[Major Depressive Disorder, Severe With Psychotic Features]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한 심한 주요 우울장애.
“환자의 경과 기록을 봤을 때, 환청은 우울증이 심할 때만 일시적으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기분 증상 없이 환청이 단독으로 관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울감이 호전되면 환청과 망상 또한 함께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정신병적 증상보다 기분 증상에 초점을 맞춘 접근.
환자의 병력(病歷)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파악한 의사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환자분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습니다. 보호자들도 협조적이지 않고요. 최대한 빨리 새로운 약물을 투여하고 싶습니다.”
‘같은 약도 쓰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저용량에서의 항우울 효과만으로 치료해보겠다는 건가.’
몇몇 연구원들이 시현의 말에 수긍하는 사이.
“좋은 제안이지만, 저희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임정석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가능성은 있어 보여. 하지만…….’
임상시험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회사 측과 시험 프로토콜 변경에 대해서도 다시 상의해야 했고, 임상연구심의위원회 승인도 필요했다.
애초에 써보고 싶다고 바로바로 쓸 수 있는 약이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지금 입원 중인 환자에게 바로 투여하기에는…….”
임정석이 시현의 제안을 거절하려는 찰나.
또다시 강병우의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다.
“좋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요. 정신과와 같이 연구할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센터장님, 그렇게 간단한 일이…….”
임정석이 놀란 눈으로 리서치 센터장 강병우를 바라보았다.
“환자 1명을 대상으로 하는 예비연구인데 굳이 복잡하게 할 거 있나요?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니고 환자 살리자고 하는 일인데.”
“…….”
응급상황을 자주 접하는 신경외과 의사라 판단이 빠른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절차가 늦어질 것 같으면 내 사비로라도 도와줄 테니 신속하게 진행해보세요.”
그야말로 전폭적인 지지.
임정석으로서도 더는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강서현 팀장은 IRB(임상연구심의위원회) 관련 서류 잘 챙겨주세요.”
“네, 최대한 빨리 승인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강서현이 연단에 서 있는 시현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 * *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아빠 보기엔 어땠어요?”
강서현이 강병우를 향해 물었다.
“뭐, 1년차 치고는 똑똑한 것 같기는 하던데. 그래 봐야 연구 경험은 별로 없는 친구 아닌가?”
평소 교과서적인 지식보다 임상 경험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였다.
수술 술기에 대해 아무리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한들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환자를 살릴 수 없는 것 아닌가.
연구에서도 마찬가지.
약리학적인 지식이 뛰어나다 한들 제대로 된 연구를 수행해본 적이 없는 시현의 의견에는 애초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죠. 그렇긴 한데…….”
“일단 네 말대로 밀어주긴 했다만, 그 녀석 믿을만한 거냐?”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의외의 대답에 강병우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도 왠지 믿어보고 싶은 느낌은 있어요. 연구자로서의 직감이랄까요?”
뭐? 직감?
늘 과학적 근거와 통계적 유의성을 따지던 냉철한 연구원은 어디로 간 걸까.
강병우는 자신도 모르던 딸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엄마가 힘들어하시는데…… 다른 치료는 없을까요? ”
막내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경과가 좋지 않아 죄송합니다. 지금은 아직 시장에 출시되지 않은 약물들 중에서 환자분께 도움이 될 약물이 있는지 찾고 있습니다.”
“정식 출시 전이라면 국민건강보험 적용은 되는 건가요? 비급여라고 너무 비싼 건 아니고요?”
큰며느리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걱정의 포인트가 조금 다른 것 같기는 했지만.
“아닙니다. 정식 출시 전이니 임상 시험의 형태로 제공될 겁니다. 환자분께서 동의만 하신다면요.”
“우리 어머님을 상대로 실험을 하겠다는 거예요?”
“충분히 안전할 거라고 자신합니다. 이미 동물 실험에서 안정성이 검증된 약물이기도 하고 최근에 시작 용량을 대폭 낮추기로 해서 부작용도 거의 없을 겁니다.”
“아직 검증도 안 된 치료법을 어떻게 믿어요?”
환자의 큰며느리가 팔짱을 낀 채 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임상 연구에 참여하시면 치료비 대부분을 연구비에서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엄청 좋은 기회인 거네요! 안전한 약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니! 아가씨, 한 번 해보는 거 어때요? 그 임상 시험이란 거.”
일단 한 명은 설득.
“아무리 그래도…… 혹시 지난번처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그러나 또 다른 보호자인 막내딸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제가 아직 1년차라 퇴근한 듯 보여도 병원에서 자는 날이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있으면 바로 달려올 겁니다.”
“그래요. 한번 해볼게요. 우리 젊은 선생님이 열심히 알아봐 주신 것 같은데.”
결국 환자가 딸을 안심시키며 시현이 내민 동의서에 사인했다.
딩동!
또다시 떠오른 알림창.
내용을 확인한 시현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system : 이말순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16/100 -> 35/100]
치료 전략을 결정한 것만으로 정체되었던 진척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 * *
일주일 뒤.
[치료 진척도 35/100 -> 44/100]
[치료 진척도 44/100 -> 57/100]
…
…
[치료 진척도 63/100 -> 78/100]
임상 시험에 참여한 후로 환자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우울감이 사라지면서 환청과 망상도 잦아들기 시작했고.
특별히 부작용도 없는 상태.
이제는 퇴원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케이스 컨퍼런스 시작하겠습니다. 71세 여자 환자 이말순 님, 응급실 방문 당시 심한 우울감과 그에 동반되는 환청과 망상을 주소로…….”
매주 금요일에 진행하는 증례 토의 시간.
시현은 자신 있게 이말순 환자의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과거에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자의 퇴원했던 환자였으나, 이제는 국내 어느 병원에서도 받을 수 없는 치료를 통해 크게 호전된 상태였다.
“그래. 담당의 선생은 환자 치료하면서 어떤 전략이 주효했다고 보고 있나요?”
이광섭 교수의 마지막 질문에 시현은 그간 시도했던 치료들을 이야기했다.
일단 약물 선택에서 운이 좋았다.
IM바이오 그리고 리서치 센터와의 인연 덕분에 이말순 환자도 ASP-9022도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약도 약이었지만 보호자들 면담에도 신경을 썼고, 고령 환자임에도 최대한 눈높이를 맞춰 인지행동 치료도 했다.
“어려운 환자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주 훌륭하게 치료를 잘했군요.”
“이 정도면 우리 과 주간 컨퍼런스에서 발표할 게 아니라 다음 추계 학회에 발표해야 할 내용 같은데.”
교수들의 반응도 좋았고.
“이건 내가 봤어도 답이 안 나올 환자 같은데.”
“어떻게 신약을 써볼 생각을…….”
“형편이 좋지 않은 환자였는데 임상시험으로 그것까지 해결했네.”
선배 레지던트들도 감탄한 눈치였다.
평소 같았으면 증례 발표 내용을 두고 이것저것 시비를 걸었을 최지훈도 오늘만큼은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요. 환자분 이야기도 직접 들어보도록 하죠.”
이광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턴이 이말순 환자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케이스 컨퍼런스의 진짜 주인공인 환자가 치료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병실이 답답하셨을 텐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아주 좋습니다. 지나고 나니까 그땐 왜 그렇게 힘들었나 싶게 좋아요.”
우울감이 사라지자 환자는 입원 당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간호사님들도 그렇고…… 우리 선생님이 애써주셔서 지금 많이 좋아졌습니다.”
환자가 시현을 향해 미소지었다.
담당의에 대한 신뢰가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라포(치료적 관계) 형성이 아주 좋아.’
그 모습에 이광섭의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담당의 선생님이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은데. 어떤 치료가 가장 도움이 많이 되셨습니까? 이번에 시도한 약물이…….”
“글쎄요. 저는 우리 선생님이 맨날 당직이라 병원에 살다시피 한다고 해서 너무 좋았어요.”
“네? 그게 무슨…….”
의외의 반응에 이광섭이 반문했다.
“아무 때나 부르면 온다고 하는데. 아들 같고 손자 같고 얼마나 마음이 놓이던지.”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 치료에 성공하였습니다. 어쨌든 환자가 나아졌으니 그것으로 됐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5,000P)]
환자의 마지막 말에 시현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이번 케이스 준비하면서 신약에 대한 경험도 쌓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환자분이 담당의 선생님을 굉장히 신뢰하는 것 같네요. 보기 좋습니다.”
이광섭의 클로징 멘트로 케이스 발표는 끝이 났다.
회의실 밖에서 퇴원 준비를 마치고 환자를 기다리는 보호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감각.
아직 발표되지 않은 신약보다.
갈고 닦은 면담 기술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를 남긴 채.
이말순 환자는 병동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