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Chapter 12. 오늘은 좀 한가하네(1)
5월의 첫 주말.
과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풀당직이 풀려가는 시기.
띠띠띠띠 띠리링-
“내가 돌아왔도다.”
경쾌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황진호가 의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 BUSWAY
첫 번째 오프를 마치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아직 아침 전이지? 이거 먹어.”
황진호가 샌드위치와 탄산음료를 건넸다.
“고마워. 바깥 공기 쐬고 오니까 얼굴이 좋아 보이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푸석푸석했던 얼굴에 수분크림을 바른 것 같은 광채가 돌고 있었다.
“집에 갔더니 엄마가 잔칫상을 차려 놓으셨더라.”
픽스턴 기간까지 생각하면 무려 2달 만의 ‘외박’이었다. 병원에서 고생하는 차남이 안쓰러웠는지 어머님은 매 끼니 최선을 다해 황진호를 먹였다고 했다.
“어제 별일 없었지?”
황진호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어, 905호 할아버지 섬망이 있어서 lab(혈액검사) 나갔어. 일단 특이 소견은 없었고. 응급실도 잠잠했어.”
“다행이네. 어서 나가봐. 밖은 봄이다, 봄.”
당직 인계를 마친 뒤 시현은 황진호에게 등 떠밀려 바로 숙소를 나섰다.
* * *
‘진짜 봄이네.’
따뜻하면서도 미세먼지가 없는 근래 보기 드문 화창한 날.
병원 앞 건널목을 건너자 봄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옷을 좀 사야겠어.’
늘 입던 셔츠와 두툼한 정장 바지 그리고 회색 모직 재킷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뉴월드 백화점 가주세요.”
시현이 탄 택시는 명동의 한 백화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나 혼자만 겨울이었어…….’
백화점 1층을 가득 메운 값비싼 화장품 냄새와 세련된 옷차림의 사람들 가운데서 시현은 슬그머니 모직 재킷을 벗어 팔에 걸었다.
예전 같으면 최대한 빠르게 쇼핑을 마친 뒤에 잠을 자거나 주간 환자 보고서를 작성하러 갔겠지만, 오늘은 첫 오프치고 여유가 있었다.
‘고맙다. 다나아생명과학.’
그리고 돈도 있었다.
김민홍과 함께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덕분에 시현의 월급 통장은 과거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일단 봄 바지를 서너 벌 고른 뒤 기장 수선이 되는 동안 재킷을 보러 다녔다.
- 20XX S/S 신상
평소 같았으면 부담스러운 가격대의 브랜드였지만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서 오세요. 이 재킷 너~무 잘 나왔죠?”
“네, 입어볼 수 있을까요? 사이즈는…….”
들고 있던 겨울옷은 내려놓고 점원이 권해주는 옷을 걸쳤다.
가볍고 매끄러운 옷감.
무엇보다 핏이 마음에 들었다.
“어머! 고객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런가요?”
“그럼요. 훤칠하셔서 아무거나 잘 받으실 것 같긴 하지만요!”
점원은 홈쇼핑 쇼호스트가 빙의한 듯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 Staff 노소을
[system : 점원 노소을이 거짓을 말합니다. (99.9%)]
카이트만의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마치 알림창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구독권을 쓸까.’
순간 망설였지만, 옷이 잘 어울리는지를 확인하는데 5천 포인트는 너무 큰 지출이었다.
‘좀 직설적으로 말해줄 사람 없나. 시간도 절약할 겸.’
[SORA : 다른 브랜드 방문을 추천합니다.]
그 생각에 반응이라도 하듯 SORA가 시스템창을 띄웠다.
‘어, 그래…….’
“저 다른 곳도 좀 보고 올게요.”
“아, 네.”
남성복매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SORA는 쉴 새 없이 알림창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머, 고객님 얼굴 톤에 딱 맞네요.”
“그런가요?”
[SORA : 사용자 피부톤과 맞지 않는 컬러 매칭입니다.]
“이 옷 입으시니까 정말 어려 보이세요. 대학생인 줄 알겠어요!”
“저도 그런 것 같…….”
[SORA : 펠로우 2년차 수준으로 평가됩니다.]
“…….”
분명 악의는 없을 텐데.
알림창으로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너무 잘 어울려요. 여자 친구분이 좋아하시겠어요.”
“…….”
[SORA : …….]
‘더 이상은 못 보겠다.’
역시나 시현은 느긋한 쇼핑과는 거리가 멀었다.
[SORA : 사용자 성향과 맞지 않는 환경 효과로 체력 소모가 가속화됩니다.]
‘그런 것 같네.’
시현은 매장 한쪽에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회복 포션을 들이켰다.
‘그냥…… 이걸로 하자.’
약간의 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 재킷과 흰색 셔츠.
결국, 고르고 골라 소파 옆 마네킹이 입고 있던 옷 조합 그대로였다.
[SORA : 트렌드와 범용성을 두루 충족하는 적절한 옷 선택입니다.]
오늘 처음 듣는 긍정적인 평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옷이라는 게 꼭 오래 고른다고 좋고 대충 고른다고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이다.
[SORA : 옷 수선이 완료될 시간입니다.]
‘그래, 고마워.’
SORA의 말에 처음 바지를 산 매장으로 가려는데, 건너편에서 걸어오던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지? 혹시 환자인가?’
묘하게 낯이 익지만, 그렇다고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무심코 지나쳐 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시현을 불러 세웠다.
“천시현…… 선생님?”
“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자신과 눈을 마주쳤던 여자가 서 있었다.
까만 단발머리에 자연스러운 화장을 한 그녀는 하늘거리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누구…… 아, 채이진 선생님.”
가운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당직 때마다 쓰고 있던 동그란 안경을 벗으니 채이진은 아주 딴사람이 되어있었다.
“선생님도 오프셨군요.”
“아, 네. 옷 좀 사느라고…….”
“지난번에 전화 주셨는데 도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응급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다행히 그분은 흉부외과로 전과해서 잘 치료받고 계세요.”
본인 환자 CPR 하기도 바쁜데 다른 과 환자를 어떻게 챙기겠는가.
시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는 사람이니?”
채이진과 이야기하는데 등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빠. 우리 병원 정신과 선생님이에요.”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시현의 눈이 커졌다.
채이진에게 말을 걸어온 중년 남성은 시현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한국대학교 병원 정신과 과장이자 현 한국불안의학회 회장 채종우.
‘채 교수님이 이진이하고?’
두 사람이 부녀지간이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네. 선생님은 저를 어떻게 아시고?”
처음 보는 타 병원 레지던트가 자신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자 채종우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아차.’
그와 처음 알게 된 것은 회귀 전의 4년차 때였다.
시현이 치프였을 때 불안의학회 연수교육을 삼아대병원에서 진행했는데, 당시에 행사 준비를 하면서 처음 안면을 텄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는 아직 채종우와 별다른 접점이 없는 상황.
의아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삼아대병원 정신과 1년차 천시현입니다. 연초에 신규 레지던트 연수교육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아, 그랬군요. 한 번 보고도 기억을 하시고 천 선생님이 눈썰미가 좋으시네.”
‘잊기 힘든 외모시긴 하죠.’
채종우는 의사 중에서도 보기 드문 거구였다.
풍채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만으로 분노조절장애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불안의학회 소개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이번 춘계 학술대회에도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오, 그래요? 전공의 선생님들도 많이 오셨으면 좋겠군요. 허허허.”
불안의학회는 이 시기까지 신생학회에 속했다.
자신이 회장을 맡은 학회에 젊은 레지던트들이 관심을 가진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잠깐만, 천시현 선생님이라고 했나요?”
“네, 교수님.”
“아! 그리고 보니 이광섭 교수님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채종우가 뒤늦게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시현이 어리둥절한 사이, 채종우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마침 점심시간인데 천 선생님도 함께 하시죠.”
“아빠, 괜히 부담 주지 마세요. 선생님,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갑작스러운 식사 제안에 채이진만 중간에서 난처해졌다.
“부담은 무슨. 정신과 하면 앞으로 계속 볼 사인데. 근처에 맛있는 초밥집 있는데 거기 갑시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 병원에…….”
시현이 적당히 핑계를 대며 물러서는데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채종우 교수가 사용자에게 미약한 호감을 갖습니다. (어려움 난이도, +500P)]
“네, 교수님.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감사합니다.”
“그거 봐. 천 선생도 좋다고 하잖아? 허허허.”
채종우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현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 * *
“많이 들어요. 부족하면 더 시키고.”
“잘 먹겠습니다.”
채종우의 성격이 사교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초면에 같이 점심을 먹게 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얼마 전에 이광섭 교수님이랑 식사했는데, 천시현 선생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저희 과장님… 께서요?”
시현이 놀라서 되물었다.
의아하기는 채이진도 마찬가지.
“얼마 전에 신약 예비 연구에서 한 건 제대로 했다고 하던데. 천시현 선생은 학부 때 생물학 쪽을 따로 전공했나요?”
“아닙니다. 의예과로 입학했습니다.”
“오, 그렇단 말이죠. 별다른 연구 경험도 없었을 텐데…… 아무튼 대단해요. 환자 보기도 바쁜 시간인데 연구까지.”
1년차답지 않은 역량에 혹 생물학을 전공하고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입학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진이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응급실에서 Alcoholic LC(알코올성 간경변) 환자 같이 봐줬다고 하던데.”
“네, 기억납니다. 알코올 금단 발작이 있던 환자분이셨습니다.”
“이진이가 선생님 칭찬 많이 했어요. 그 환자 복강 내 출혈 있는 거 모르고 항응고제 썼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덕분에 환자 안 놓쳤다고.”
옆에서 묵묵히 초밥을 먹고 있던 채이진이 얼굴을 붉혔다.
“아빠! 그 얘긴 왜…….”
“난 이진이가 한국대병원에 남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극구 삼아대로 가더라고.”
“내가 편하려고 그런 거예요. 한국대에 있었으면 얼마나 눈치 보고 살았겠어요?”
채이진이 볼멘소리를 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 모교를 떠나 다른 병원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일.
오히려 아빠 찬스를 이용해서 인기과에 들어갈 생각을 하는 것이 더 일반적인 선택일 수도 있었다.
“타교 출신인데도 천시현 선생이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해서 내심 고마웠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학회장에서도 종종 봅시다.”
뜻하지 않은 자리였지만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 * *
“갑자기 밥 먹자고 하셔서 당황하셨죠?”
식사가 끝나고 채종우가 주차장에 차를 가지러 가자 채이진이 물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맛있는 밥도 먹고 감사하죠. 저도 평소에 뵙고 싶던 교수님이셨습니다.”
“저희 아빠를…… 아세요?”
채이진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정신과에 입문한 지 불과 두 달.
다른 병원 교수진에까지 관심을 두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럼요. 우리나라에 rTMS(경두개자기장치료, 난치성 우울증 치료에 쓰임)를 처음 도입하신 분이시잖아요? 공황장애 인지행동치료 프로그램도 만드시고 그리고…….”
“와, 우리 아빠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채이진이 감탄하는 사이 채종우의 차가 도착했다.
“교수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시현의 인사에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점점 멀어져갔다.
‘미리 알고 지내서 나쁠 건 없지.’
ASP-9022 그리고 응급실에서 봤던 환자 덕에 과거보다 3년이나 일찍 채종우와 만나게 되었다.
‘이젠 뭐하지?’
소중한 첫 번째 오프가 아직 반나절이나 남아있었다.
반나절 밖에 안 남은 건가?
아무튼.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R1 황진호]
당직을 서고 있는 황진호의 전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