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chapter 12. 오늘은 좀 한가하네(2)
“어, 진호야.”
“역사적인 첫 오픈데 뭐 하고 있어?”
예상외로 황진호의 목소리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쇼핑도 하고 이제 머리도 좀 자를까 생각하고 있어. 무슨 일이야?”
“아니. 일도 별로 없고…… 웬만한 건 어제 네가 다 해놨더라?"
”어쩌다 보니…… 병동에 오래 있게 됐어.“
일단 대충 얼버무렸다.
포인트 얻느라 병동일을 다 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크으. 내가 동기를 진짜 잘 뒀다니까. 덕분에 병동도 응급실도 오늘은 좀 ‘한가’하네. 하하하.“
“…….”
그의 다음 말에 시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녀석이 또 무슨 불길한 소리를…….’
사실 황진호는 유독 환자를 많이 타는 사람, 소위 ‘환타’로 유명했다.
‘악명이 높다고 해야 하겠지?’
특히나 황진호의 ‘오늘은 좀 한가하네.’ 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어디서 환자를 소환해 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진호야 너 그 말…….”
“무슨 말?”
시현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꿈틀댔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화창했던 오전 날씨가 무색하게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혹시 오늘인가?’
이 무렵의 주말 당직이었다.
혼자서는 감당 못 할 만큼 환자가 몰려왔던 날.
‘거의 응급실에서 도망칠 뻔했지.’
지금도 생각만 하면 손에 땀이 쥐어지는.
정황상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 같았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면 시현이 아닌 황진호가 대신 당직을 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현아 지난번에 소개해 주기로 했던 친구 있잖아…….”
황진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소개팅 이야기를 꺼냈다.
“걔 이모님이 우리 병원에 입원하셔서 이따 온다는데. 잠깐 볼래?”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곧 있으면…….’
아는 게 병이라고.
막상 비번인 시현의 속만 타들어 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것 같다. 다음 주 케이스 발표 준비도 해야 해서 이따 다시 들어갈 거야.”
확실히 지금은 때가 아니다.
만나자마자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다시 환자 보러 가는 전개가 불 보듯 뻔했으니까.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고 해야겠네.”
“요즘 은근히 환자 많아. 저녁까지 미리 먹어두는 게 좋을걸?”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에이, 설마! 지금까진 응급실에 콜 한 개도 없었어.”
황진호의 말투에서 여유마저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 이렇게 ‘한가’한데.”
‘진호야 제발.’
이걸로 두 번째.
황진호의 마법은 완성 직전이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만 했다.
* * *
“당신이 뭔데 날 막아? 나 여기서 나갈 거야! 얼른 안 비켜?”
“환자분, 진정하세요. 여기 병원입니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두 눈이 튀어나올 듯한 기세로 보안요원을 노려보았다.
“이거 놓으라고 개X끼들아! 이것들이 사람을 풀어서 미행까지 해? 여기 원장 나오라고 해! 당장!!!”
남자는 보안요원을 밀치며 목에 핏대를 올랐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황진호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병원을 잘못 찾아왔나.’
단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왔을 뿐인데, 그사이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노티 드리겠습니다. 27세 여자환자분으로 처방받은 약 보름치를 한꺼번에 먹고 의식 저하되어 방문하였습니다. 환자는…….”
보안요원과 대치 중인 남자는 시작에 불과했다.
“30세 여자환자분 호흡곤란을 동반한 공황발작을 주소로 방문하였습니다. 검사상 특이 소견은 없었으나 진정이 되지 않고…….”
끊이지 않는 노티.
심지어 또 다른 인턴이 지금 막 초진을 시작한 환자도 주증상이 불안 초조감이다.
“야, 내가 먼저야!”
“내 환자가 더 급하다고!”
인턴들이 황진호가 앉아있는 스테이션 주변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인턴 김영은 / R1 황진호]
[인턴 김원기 / R1 황진호]
[인턴 석동신 / R1 황진호]
……
……
[인턴 설현수 / 담당의 미지정]
‘말도 안 돼.’
시현과 통화하고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응급실에 환자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정신과 환자를 연달아 노티하는 것만으로도 드문 일인데, 한 명 한 명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위이이잉.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데 휴대폰까지 울려댔다.
“네, 황진호입니다.”
- 선생님, 9병동인데요. 903호 환자분 낙상으로 머리를 부딪치셔서…….
“대낮에 낙상이라고요? 환자 의식은요?”
이 와중에 병동 호출까지.
‘망했다.’
망해도 너무나 완벽히 망해버렸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바로 전날 엄마가 차려준 집밥이 눈에 어른거렸다.
“오늘 무슨 날이야? 무슨 NP(NeuroPsychiatry, 정신과) 환자들이 이렇게 많아?”
응급실 차지 간호사가 툴툴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게요. 누구 내공이 이렇게 부실한지.”
내공.
의료진 사이에서 운과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은어.
- 야, 너 내공 정말 좋다. 어떻게 밤에 콜이 하나도 없어?
운 좋게 모든 당직을 수월하게 넘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 김 쌤은 내공이 완전 구린 것 같아요. 무슨 환자가 이렇게 끝도 없이 오는지…….
가는 곳마다 환자를 몰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저 환자 어떻게 진정 좀 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무서워요…….”
“선생님, 환자가 숨이 안 쉬어진다고 합니다. 산소포화도는 100프로 인데요…….”
“선생님, 환자분 드시는 약인데 이게 뭘까요? 약제팀이 자리를 비웠어요.”
처방을 입력하기 위해 PC 앞에 앉았으나 동시에 몰려드는 요청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선생님, 신환 노티 드리겠습니다. 불안과 전신 떨림을 주소로 방문하신 51세 남자 환자분…….”
거기에 새로운 노티까지.
‘뭘 먼저 해야…….’
그의 멘탈이 승천을 앞두고 있었다.
“진호야.”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을 걸었다.
“앞으로 한가하다는 말은 하지 말자.”
“시현아!!”
황진호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군대 첫 휴가에 애인을 만나도 이렇게 반가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좀 전에 병동에서 콜이 왔었는데. 903호 할머니가 넘어지셔서 머리를 부딪치셨다고…….”
병동에서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하필이면 오늘 생기다니.
황진호는 진정한 환타였다.
“방금 병동 다녀왔어. 할머니 크게 다치시진 않았더라고. 의식도 명료하시고.”
시현이 싱긋 웃으며 시스템 창을 닫았다.
“일단 Brain CT 찍기로 하고 촬영실에 보냈어. 괜찮을 거야.”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 비록 오프는 날렸지만 첫 오프를 포기한 썰은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불철주야 - 비번 기간에 진료에 참여하여 100%의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좋아.’
시현은 급하게 회복 포션을 추가로 구입한 뒤 바로 사용했다.
포션 사용과 함께 목과 어깨를 돌리자 피로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참에 이것도?’
이번에는 존재감 포션을 터치했다.
환자 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날이 아니면 언제 또 써보겠는가.
가운 뒤로 터지는 후광을 느끼며 시현은 환자를 향해 걸어갔다.
* * *
피해망상 환자가 고성을 질러대자 보안요원 두 명이 더 내려왔다.
“어휴 이게 무슨 난리야.”
뒤숭숭한 분위기에 차지간호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 저기 시현 쌤 아니에요?”
“그러네. 오늘 당직 아닌데?”
“오프인데 환자 봐주는 거 저 처음 봤어요. 오늘따라 눈에 확 띄는데…… 기분 탓인가?”
간호사들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시현을 쳐다보았다.
‘액팅아웃, 급성 약물중독 그리고 공황장애. 마지막으로 온 환자는…….’
‘세상의 모든 차트’를 통해 환자 파악은 모두 끝낸 상태였다.
“시현아, 일단 저 환자 내가 볼게. 김원기 선생님도 도와줘요.”
“네, 알겠습니다!”
황진호가 가리킨 쪽에는 피해망상 환자와 보안요원들이 실랑이하고 있었다.
[김광호 남/30 인턴 김원기 / R1 황진호]
“저 환자 덩치가…… 팔이 허벅지만 하네요.”
“그, 그러네.”
선뜻 발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대로 둘 수도 없다.
황진호와 김원기 그리고 추가로 내려온 보안요원들이 환자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김광호님, 진정하세요. 여기 병원입니다.”
“너희들 어디서 나온 놈들이야? 나, 이 병원 오래 다녔어! 정말 병원 직원 맞아? x발 꺼져!”
보안요원의 말에 김광호는 욕설을 퍼부었다.
피해망상이 심한 나머지 병원 보안요원을 어느 기관에서 나온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선 안정제 투여를 하겠습니다.”
“어디 한번 해봐! 내가 한 놈은 꼭 데리고 간다!”
황진호, 김원기 그리고 보안요원들.
총 5명의 장정들이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김광호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할로페리돌 1앰플(항정신병 약물의 일종), 로라제팜 1앰플(진정제의 일종) IM (Intramuscular, 근육주사) 준비해주세요.”
“네, 선생님!”
황진호의 말에 응급실 간호사 박혜선이 진정제를 주사기에 옮겨 담았다.
여기까지는 정해진 수순.
“씨클루전(격리) 필요할 겁니다. 안정실 비워 두세요.”
“네!”
진정제를 투여 후 환자를 보호 감시할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 환자 강박 중에 보안요원분들이 다쳤습니다. 한 분은 안와 골절로 안과에서 수술 예정이고 다른 한 분은 치아가 부러져서…….
과거 시현은 주말에 응급실을 방문했던 환자들을 보고하느라 진땀을 뺐다.
비록 1년차라고는 해도 응급실에서는 정신과 전체를 대표하는 의사.
사고에 대한 문책을 피할 수 없었다.
‘종합격투기 선수라고 했었지.’
환자의 우람한 어깨와 쫙쫙 갈라진 전완부 근육이 눈에 띄었다.
일반적으로 일대 다수라면 다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다.
의료진은 환자가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게 붙잡고 주사까지 해야하는 반면, 환자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발버둥친다.
다칠 확률이 높은 쪽은 당연히 의료진 쪽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팔다리를 동시에 잡을 테니까 박혜선 선생님이 IM 바로 해주세요.”
황진호가 박혜선에게 말했다.
“자, 신호하면 바로 잡을게요. 하나, 둘, ㅅ…….”
“잠깐만요.”
보안요원들이 달려들기 직전에 시현이 그들을 말렸다.
“시현아, 갑자기 왜…….”
황진호가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김광호 님, 진정하시고 잠시만 침상에 앉아서 대기해주세요.”
“뭐? 진정? 당신들이 주사 놓는다고 달려드는데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잠시면 됩니다. 갈 때 가더라도 진철영 교수님은 뵙고 가시죠.”
“교수님이 오신다고……요?”
진철영의 이름이 나오자 단박에 김광호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광호군 왔나.”
때마침 등 뒤에서 환자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진철영이 서 있었다.
“교수님, 오셨습니까.”
김광호가 진철영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 길길이 날뛰던 피해망상 환자는 온데간데없었다.
“환자분하고 따로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교, 교수님. 그건…….”
그는 괜찮다는 듯 보안요원들을 뒤로 물렸다.
환자와 단둘이 남겨진 상황.
“사정은 우리 레지던트 선생한테 다 들었다.”
“교수님, 저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
“광호군.”
진철영이 단호한 어조로 환자를 불렀다.
“며칠 입원하고 가라.”
“네…….”
진철영이 무심코 툭 던진 한마디에 환자는 군소리 없이 입원을 결정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황진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