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Chapter 12. 오늘은 좀 한가하네 (3)
30분 전.
‘응급실 환자 리스트.’
[SORA : 응급실 내원 환자를 출력합니다.]
시현은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스템 창으로 환자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김광호 남/30 인턴 김원기 / R1 황진호]
[치료진척도 7/100 퇴원까지 10일 21시간 37분 21초]
환자 기록을 살펴보던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환자가 입원을 한다고? 응급실에서 안정제만 맞고 자의 퇴원했었는데…….’
확실히 회귀 전의 기억과 맞지 않는 부분이었다.
보안요원들이 애써준 보람도 없이 환자는 약 기운이 가시자마자 병원을 떠났다.
‘자의로 입원할 리가 없어.’
응급실에서부터 집에 가겠다고 난리인데, 제 발로 병동에 올라갈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일단 가능한 방법은 보호 의무자에 의한 동의 입원.
정신과 전문의가 입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직계가족 2명이 동의하면, 환자가 원치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입원할 수 있다.
‘같이 온 보호자들은 입원을 원할 테고.’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 소견이었다.
주말 응급실에는 전문의가 상주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펠로우에게 전화를 해봤으나, 심포지움 참석차 지방에 있다고 했다.
병원으로 복귀하더라도 반나절은 걸릴 듯했다.
‘다른 병원으로 보내야 하나.’
병실 부족이나 의료진 부재로 입원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가능한 다른 병원을 찾아 전원하는 것이 원칙.
하지만 환자 상태를 생각했을 때 받아줄 병원이 없을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차트’를 보면 환자가 어찌어찌 입원은 하는 모양인데,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입원을 한다는 건지…….’
그렇게 주차장을 지나 응급실로 들어가는 길.
본관 옆 교수 연구동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시현의 눈이 커졌다.
‘이 시간에 왜?’
5층 3번째 방.
진철영 교수의 연구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혹시 착각한 것이 아닐까 다시 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실의 불이 꺼졌다.
‘가속 포션.’
[SORA : 가속 포션을 사용합니다.]
시현은 곧바로 연구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교수님이 왜 여기에?”
황진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병원 들어오다가 뵀어. 지인분이 돌아가셨는데 빈소가 우리 병원 장례식장이었대.”
“아… 그렇게 됐구나. 진짜 다행이다.”
환자의 폭력성을 생각하면, 펠로우가 도착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릴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주말 오후.
부르면 달려올 거리에 진철영이 있었던 것도 그것을 시현이 발견한 것도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시현이 환자를 바라보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김광호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치료진척도 7/100 -> 19/100]
입원하기로 결심하더니 별다른 거부감 없이 안정제를 맞고 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행이긴 한데…….’
정신과 의사로서 새로운 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한없이 높고.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한.
‘어떻게 저런 설득이 가능하지?’
보안요원들을 두들겨 팰 정도의 완력을 가진 환자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진철영의 단 한마디에.
평소 그의 외래에서 통원 치료를 하던 환자라 안면이 있다고는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망상이 심해져 현실감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크으 멋지지 않냐? 교수님이 한 마디 딱 하시니까 그 과격한 환자가 차분하게 가라앉고…….”
황진호 또한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지? 뭔가 위엄이 있으면서 카리스마가 넘치는…… 흠흠.”
그는 이내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광호군.”
그리고 이어지는 진철영 교수의 성대모사.
“며칠 입원하고 가라. 어때? 어때?”
……오 제법 그럴듯한데?
시현이 감탄하는 사이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앗, 교수님!”
황진호가 민망한 듯 진철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선생은 따라 하지 마라. 그렇게 하다 다친다.”
진철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정신과 의사라고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니야. 현실 검증력이 떨어지는 환자 1대 1로 붙잡고 설득하려 들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분명 교수님은 1분도 안 걸려서…….”
“1분?”
황진호의 질문에 진철영이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1분이 아니야. 15년이 걸렸지.”
“15년이요?”
황진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광호는 청소년기에 처음 발병한 양극성 장애 환자였다.
심한 조증으로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진철영은 주니어 스텝이었고.
“처음에는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는 환자였다. 약 꾸준히 먹으라고 해도 매번 중단해서 입원도 여러 번 했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약 잘 지어주고 외래 자주 오라고 했지. 본인이 평생 약 먹어야 하는 환자라는 걸 깨닫는 데 5년 걸렸어.”
진철영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모든 조울증 환자가 평생 약을 먹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잦은 재발을 보이는 환자의 경우에는 꾸준한 약물 복용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럼 그 뒤로는 지금까지 잘 치료 받으셨던 건가요?”
황진호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그 뒤로는 술 문제가 있었어. 술 끊으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결국 사고도 쳤고.”
“…….”
“그런데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격투기를 하겠다고 하는 거야.”
조울증에 알코올 문제 그리고 폭력성이 있는 환자가 격투기까지 배운다고?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집에서는 더 큰 사고 친다고 반대를 엄청나게 했는데, 그래도 나는 환자 편들어 줬다. 그나마 운동 시작하고 성적은 내야 하니 술은 끊더라고.”
‘중독이 다른 중독으로…….’
김광호의 경우 알코올 중독이 운동 중독으로 옮아간 듯했다.
“그러면서 한 5년 더 지난 것 같아. 몇 번 재발하고 입퇴원 반복하더니 환자가 약속을 하나 하더라고.”
나중에 진철영 교수가 입원을 권하면 꼭 하겠다고.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무조건 따르겠다는 약속.
조증에 피해망상이 겹친다 해도 그에게 진철영은 신뢰할 수 있는 의사였다.
“알겠지? 그러니까 함부로 따라 하면 안 된다. 공격적인 환자 면담할 때는 안전이 가장 중요해.”
그의 당부에 TV에서 보던 자막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어린이들은 따라 하지 마세요, 라는.
입원 후 필요한 검사 몇 가지를 일러준 뒤, 진철영은 응급실을 떠났다.
“후우. 그래도 ‘제일 힘든 환자’ 잘 입원 시켰다. 그치?”
응급실에서 가장 이목을 끌던 환자가 병동으로 올라간 상황.
황진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글쎄. 아마 아닐걸?’
시현은 그런 황진호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 * *
‘다음은 DI(Drug Intoxification, 약물 과도복용으로 인한 중독상태) 환자…….’
안타깝게도 과거에 진료해본 적이 없던 환자였다.
‘세상의 모든 차트’에도 별다른 기록이 없었다.
유추해보면, 과거에는 다른 병원 응급실로 갔어야 할 환자가 삼아대병원으로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뀐 거라고는 황진호가 시현에게 전화를 걸어 그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말 한마디를 한 것밖에 없었다.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데.’
그것도 무시무시한 이능력.
시스템에도 없는 환자를 끌어들이는 마성의 레지던트.
저쪽에서 공황장애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황진호가 새삼 대단하게 여겨졌다.
시현의 시선이 다시 눈앞의 환자를 향했다.
[이성연 여/27 인턴 김영은 / R1 천시현]
[치료진척도 0/100 퇴원까지 7일 20시간 30분 11초]
이번에도 퇴실이 아닌 퇴원.
응급실을 거쳐 입원이 필요한 케이스였다.
일단 환자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의식이 명료하지 않아 면담은 쉽지 않았다.
“평소에 드시던 약 확인 됐나요?”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과량 복용한 약물의 종류와 용량을 확인하는 것.
허용 범위를 벗어났을 때 특히 위험한 약물들이 처방전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넵. 여기 있습니다.”
담당 인턴이 보호자가 가져온 약봉지와 메모지를 건넸다.
- Escitalopram 5mg
- Depas 0.5mg
- Zolpidem CR 6.25mg
- 성분 미상의 녹색 정제 반 알
“다른 약들은 다 파악이 됐는데 녹색 정제는 쪼개져서 약제팀에서도 식별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청진기 줄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습니다. 인환제약에서 나오는 Aripiprazole 2mg이네요. 반 알이니까 HS(취침 전)로 1mg 복용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시현이 약 봉투를 흘끗 보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뭐지? 약제팀에서도 식별이 어렵다고 했는데.’
시현의 대답에 인턴 김영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호자 말로는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Aripiprazole이라면 정신분열병(조현병의 옛 표현)에 쓰는 약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혹시 다른 약이 아닐까요?
인턴이 혀끝에 맴도는 말을 간신히 주워 삼켰다.
”물론 Aripiprazole은 비정형 항정신병약물 클래스에 속합니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와 주요우울장애에도 적응증이 있죠.”
그녀의 미심쩍은 표정을 보고 시현이 부연 설명했다.
“30mg 이상도 쓸 수 있는 약인데, 1mg 정도를 쓴 걸 보면 우울증 부가요법으로 소량 처방한 것 같네요.”
“아, 제가 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심하는 건 좋은 태도예요. 죄송할 건 없습니다.”
민망해하는 인턴을 뒤로하고 시현은 환자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BP(혈압)는 100/60 정도로 나쁘진 않은데, 의식이 stupor(혼미, 강한 자극에 겨우 반응) 수준이라…….’
환자가 먹었을 법한 약물 용량에 비해 의식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손발은 차고 건조했으며 혀는 바싹 말라 있었다.
‘Dehydration(탈수) 소견까지…….’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평소 드시던 건 정말 이 약뿐인가요?”
“실은…… 이게 예전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에요. 얼마 전에 병원을 옮겼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보호자가 대충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최근 환자 상태를 잘 모른다는 뜻이었다.
“인턴 선생님, 일단 L-tube(비위관) 삽입해주세요. 위세척 시작할 겁니다.”
“넵!”
시현이 오더를 내자 김영은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위세척을 하는 동안 시현은 PC에 앉아 환자의 타과 의무기록을 살피기 시작했다.
‘빈혈에 잦은 설사. TSH(갑상선자극호르몬)도 높아.’
최근 갑상선 기능 저하증으로 몇 차례 내과 진료를 본 것이 확인되었다.
“이성연 환자, sample(혈액채취) 다시 해주세요!”
시현은 황급히 추가 혈액검사를 처방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