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Chapter 12. 오늘은 좀 한가하네(4)
“이거, 금방 나오는 검사가 아닌데.”
시현이 낸 오더를 확인한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검사실에 부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과 최대한 빨리 뽑아달라고요. 어쩌면 응급으로 혈액투석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혈액투석(Hemodialysis).
환자의 혈액을 몸 밖으로 빼낸 뒤, 투석기로 독성물질과 노폐물을 제거하는 과정.
“투, 투석까지요?”
“아마 환자가 복용한 약물은…….”
“무슨 피검사를 또 한다는 거예요?”
시현이 간호사에게 뭔가 설명하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보호자가 말했다.
“선생님, 저희 그냥 퇴원하면 안 되나요? 우리 애가 홧김에 수면제 몇 알 먹은 것 가지고…….”
“수면제도 문제지만 혹시 다른 약을 먹었을 수도 있어서 파악해야 합니다.”
“어휴. 그동안 얘가 하도 쇼를 많이 해서…… 관심받으려고 그런 걸 거예요.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지 싶은데요.”
여유로운 표정의 보호자.
보아하니 종종 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가볍게만 볼 상태가 아닙니다. 어쩌면 중환자실로 가셔야 할 수도 있어요.”
“중, 중환자실이요? 그건 너무 과잉 진료 아닌가요?”
보호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약이 흡수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조금 지나면 지금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은데…….”
“정 그러시면 혈액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1시간만 더 지켜보시죠.”
보호자를 대하는 시현의 태도에 노련함이 묻어났다.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해.’
[치료진척도 0/100 퇴원까지 7일 20시간 30분 11초]
분명 입원이 필요한 환자였다.
특히 과량복용한 약물이 시현이 의심한 종류라면 더더욱.
삐- 삐-
그때였다.
시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환자의 바이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혈압, 맥박 그리고 산소포화도 모니터에 빨간 불이 깜빡거렸다.
“선생님, 환자 BP 80/60으로 떨어집니다. Saturation(산소포화도)도요!”
“보호자님, 환자분은 응급의학과 선생님하고 같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퇴원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보호자가 그제야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입원해서 경과를 봐야 합니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거봐 내 말 맞잖아! - 경과 예측에 성공하여 보호자의 신뢰가 급격하게 높아졌습니다. (어려움 난이도, +500P)]
[system : 비번에 포인트를 획득하여 100% 추가 지급됩니다. (+500P)]
* * *
“후우. 난리 난리였는데 그래도 좀 정리가 되네.”
간호기록을 쓰느라 정신없던 차지 간호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딩동!
[응급실의 최애 - 응급실 인턴들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
[말리그는 확실히 아니네! - 응급실 간호사들의 호감도 대폭 상승. 응급실 회식 참석 확률이 상승합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system : 비번에 포인트를 획득하여 100% 추가 지급됩니다. (+2,000P)]
시현이 합류하고 응급실 분위기는 안정된 듯했으나 아직도 2명의 환자가 남아있었다.
특히 설현수가 초진하고 있는 네 번째 환자가 문제였다.
시현은 당직표를 올려다보고 경악했다.
‘또 저 사람이야?’
[내과 R3 남혜미]
그녀는 지금의 시현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최강의 말리그였다.
* * *
설현수가 환자 보고를 시작했다.
“51세 남자 환자 박병일 님, 불안과 초조감을 주소로 방문하셨습니다. 평소 매일 소주 2~3병 정도 지속적인 음주 있으셨고…….”
시현이 익히 알고 있는 환자로 회귀 전에도 불안과 초조 증상으로 응급실에 왔던 환자였다
[박병일 남/53 인턴 설현수/ R1 천시현]
[치료진척도 0/100 퇴원까지 10일 10시간 35분 16초]
“환자 마지막 음주는 언제 했죠?”
“저 그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설현수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만성적으로 음주하던 환자가 불안을 호소하면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것은 알코올 금단입니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술을 끊은 게 언제부터였냐는 거죠.”
박병일 환자는 최근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갑자기 술을 끊으면서 알코올 금단 증상이 생긴 상태였다.
“지금 증상이라면 이틀, 아니 3일 정도로 보이는데요.”
“맞아요! 속 쓰리다고 술 안 먹은 지 한 3일 됐어요.”
환자가 걱정된다며 따라온 노모가 대신 대답했다.
‘이 환자도 만만치 않아.’
알코올 금단은 대부분 환자에서 경미한 증상으로 끝나지만, 일부 환자에게는 치명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알코올 금단 발작.
그리고 알코올 금단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진전섬망(Delirium tremens).
지금 눈앞에 누워있는 이 환자가 곧 겪게 될 상황이었다.
특히 진전섬망은 심한 떨림과 의식 저하가 동반되어 제대로 조치하지 못하면 환자가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바로 로라제팜(안정제의 일종) 1A 근육주사 해주세요.”
삐 - 삐 -
시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환자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활력 징후 모니터가 연신 경고음을 내보내고 있었다.
[혈압 180/100mmHg 맥박수 130/min]
“아이고. 병일아, 정신 차려라…….”
노모가 환자의 손을 꼭 쥐었으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로라제팜 1A IM 추가할게요! 티아민(비타민 B1) IV도 같이요!”
시현은 오더를 내리며 환자의 바이탈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좀 더 잘해 볼게요.’
삐- 삐-
하지만 시현의 바람과는 달리 바이탈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내과적인 상태가…… 간경화가 심해.’
간경화(Liver cirrhosis)
간 손상이 누적되어 간이 딱딱해지고 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복수가 차고 황달이 생기며 심하면 피를 토하기도 한다.
정신과적으로 초조감을 줄이고 알코올 금단 증상을 호전시킨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과 협진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오늘 내과 당직이 3년차 남혜미 선생이었다는 것이다.
돌아올 답을 미리 알았지만, 시현은 남혜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정신과 1년차 천시현입니다. 응급실에서 협진 부탁드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어떤 환자예요?”
“알코올 금단 증상을 주소로 방문하신 53세 남자 환자분으로, 평소 LC(간경변)와…….”
시현은 최대한 공손하게 환자 상태를 보고했다.
이렇게 마음 졸이며 노티를 하고 있자니 다시 인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선생님 말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주증상이 알코올 금단이라면서요? 제 환자는 아니지 않나요?”
벽을 마주한 기분.
역시나 상대는 남혜미였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것 같은 환자 차트에 자신의 이름 올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선생님, 혈구 수치도 다 떨어져 있고 전해질도 다 안 맞습니다. 검사 결과 보시고 처방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제가 왜 그 환자를 봐야 하죠?“
“…….”
“선생님은 의사 아닌가요? 의사라면 그런 상황에서 기본적인 판단은 해야죠. 아무튼, 제가 볼 환자는 아닌 것 같은데. 오늘 응급실 온 것도 급성 알코올 금단 문제 때문이잖아요?”
역시나 명불 허전.
도무지 환자를 볼 생각이 없는듯했다.
“…….”
“솔직히 그 정도 바이탈이면 스테이블(안정) 한 거고…… 알코올 만성 병원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환자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뭐? 스테이블? 퍽이나 스테이블 하겠다.’
아직까지 심한 섬망 증상은 없었지만, 환자의 바이탈은 여전히 널을 뛰고 있었다.
과거에는 다행히 다른 레지던트가 당직이어서 내과적인 처방을 해주었고 조언도 해주었다.
하지만 남혜미는 달랐다.
4년 전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유리하게 시작했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왜 하필 남혜미인 거야? 다행히 아직까지 발작은 없는데…….’
침상에 엉거주춤 몸을 기댄 노모가 환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다른 보호자에게 도움을 청하려는지 느릿느릿 구형 폴더폰의 버튼을 누르는 모습.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시현이 미리 조치한 덕분에 심한 증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노모가 집에서 돌볼 수 있는 컨디션은 아니었다.
이대로 퇴실 지시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보호자님. 우선 발작은 막았으니까 조금 기다려 보시면 병실 알아볼게요.”
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과적 상태가 좋지 않아 정신과 병동으로 바로 입원시키기에는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김민홍에게 한 번 부탁해보기로 했다.
그때였다.
“형! 어머니!”
환자와 보호자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연락을 받고 온 환자의 동생인 듯했다.
“어? 저분은?”
옆에서 다른 환자를 보고 있던 황진호가 갑자기 90도로 인사를 했다.
가운을 걸치고 헐레벌떡 뛰어온 중년의 의사.
소화기내과 주임 과장 박종일이었다.
“어머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형은 왜 이렇고요?”
“아니…… 너 있는 병원이라 내가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큰아들이 알코올 중독이라고 하면 혹여 교수로 근무하는 작은아들에게 누가 될까 싶어 평소 삼아대병원을 찾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환자 상태가 나빠지자 급한 대로 응급실을 왔고 결국 박종일 교수를 부른 것이었다.
“어휴 진작 연락을 주셨어야지…… 혼자 오시면 어떡해요?”
박종일 교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천시현 선생님이 담당의던데,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환자분은 금주 3일째에 Alcohol withdrawal(알코올 금단) 증상으로 방문하셨습니다. 초조감이 심한 데다 DT(진전섬망)로 갈 수도 있어서 로라제팜 총 2 앰플 투여했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심한 떨림은 멈춘 것 같네요.”
박종일이 침상에 누워있는 자신의 형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일단 바이탈이 안정되면 PO(경구 약제)로 바꿔서 불안과 수면을 조절할 생각입니다.”
1년차답지 않은 명료한 답변.
처치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박종일 교수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 내과에서는 누가 보고 있나요? 아무래도 정신과에서 단독으로 보기에는 무리라고 보는데.”
“내과 컨택은…….”
이어진 질문에 시현이 말끝을 흐렸다.
3년차 남혜미가 콜을 튕겼습니다…….
라고 하면 고자질밖에 더 되겠는가.
“내과 컨택…… 은?”
박종일은 이내 시현의 표정에서 모든 것을 파악했다.
응급실 당직 판을 흘끔 쳐다본 뒤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 남혜미 선생?”
- 네! 교수님! 어떤 일이십니까?
수화기 너머로 아까와는 다른 공손하고 발랄한 목소리.
곁에서 지켜보던 황진호가 몸서리를 쳤다.
“응급실로 내려오세요.”
“네? 그게 무슨…….”
“지금 당장.”
미간을 잔뜩 구긴 박종일이 냉소를 띠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