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Chapter 12. 오늘은 좀 한가하네(5)
남혜미는 박종일 교수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담당의 내과로 바꿔요. 당장! 알겠어요?”
“네, 교수님.”
남혜미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남선생, 대답해봐. 간성 혼수가 올 수도 있는 환자를 1년차가 어떻게 보나? 심지어 내과도 아니고 정신과 선생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천시현 선생이 환자 상태를 너무 가볍게 이야기해서…… 이렇게 안 좋은 줄 알았다면…….”
기껏 내려와서 한다는 게 남 탓이라니.
시현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 일단 타과에서 의뢰가 왔으면 내려와서 직접 보고 말하는 게 맞지!”
박종일의 목에 핏대가 섰다.
환자의 노모가 시현이 내과에 통사정을 하다시피 했다고 이미 이야기한 상황.
애초에 통할 리가 없는 변명이었다.
“죄송합니다. 가족분이신 줄 몰랐습니다.”
“뭐? 내 가족이 아니면 다른 일반 환자는 저렇게 나 몰라라 해도 된다는 거야?”
남혜미가 거듭 고개를 숙였으나 되려 박종일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박교수님…… 저런 면도 있었네.’
평소에는 온화한 편이지만 환자에게 소홀한 레지던트에게는 그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 박종일 교수였다.
“앞으로 응급실 방문 환자 내가 직접 모니터링합니다. 남혜미 선생은 다음 달까지 응급실 당직 연장이니 그리 알고!”
“네? 교수님 어떻게…….”
이쪽을 바라보는 인턴들과 1년차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 교수님, 존경합니다.
- 이왕 하시는 거 와장창 깨주세요.
- 좀 더…… 조금만 더…….
그들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박종일 교수를 응원했다.
비록 음소거 상태였지만.
서로 눈빛만 보고도 마음이 통하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저 남혜미가 저렇게 탈탈 털릴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말리그 계보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상급자에게는 워낙 깍듯했기에 지금껏 이런 일은 없었다.
남혜미에게 치료 계획을 지시한 뒤, 박종일이 시현에게 다가와 말했다.
“천시현 선생님, 고생 많았습니다. 형님은 소화기내과로 입원할 건데 PO(경구) 약제는 어떻게 쓰는 게 좋겠어요?”
‘몰라서 묻는 게 아니야.’
소화기내과는 위장관뿐만 아니라 간담도계 질환도 진료한다.
알코올성 간경변 또한 상당히 흔한 질환으로 내과 의사치고 병동에서 알코올 금단 경련 한 번쯤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터.
박종일은 시현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시험하고 있었다.
“우선 경구약은 아티반 1mg QID(하루 4회)로 투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입원 내내 그렇게 가나요?”
“바이탈 안정되면 벤조디아제핀은 서서히 감량하고 날트랙손(항갈망제의 일종으로 알코올 의존 치료제) 추가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우선 12.5mg 저용량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막힘없는 대답에 지켜보던 황진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만성적인 알코올 섭취는 기분장애와 연관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입원 중에 주기적으로 정신과 면담하실 수 있도록 협진 담당 레지던트와 상의하겠습니다.”
‘똑똑한데 싹싹하기까지…… 교수 재목이야.’
박종일 또한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딩동!
[박병일 남/53 인턴 설수현 / R1 천시현 -> R3 남혜미]
[치료진척도 0->33/100]
환자 담당의 정보도 바뀌었고 치료진척도가 급상승했다.
알코올 금단 발작에 이어지는 진전섬망을 미리 막았고 내과적 처치 또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선수 교체 - 최선을 다해 진료한 환자를 가장 적합한 과로 인계하였습니다. (어려움 난이도 +500P)]
[사이다패스 - 동료 1년차와 인턴들이 당신의 이야기에 열광합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system : 비번에 포인트를 획득하여 100% 추가지급됩니다.(+1,500P)]
응급실에 와서 몇 시간 보낸 것 치고는 두둑한 보상이었다.
* * *
“선생님, 이성연 환자 추가 혈액검사결과 나왔습니다.”
박종일과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차지간호사가 시현을 불렀다.
‘검사결과 띄워줘.’
[SORA : 이성연 환자의 검사결과를 출력합니다.]
[Serum Lithium level 3.6mmol/L]
환자의 혈중 리튬 농도가 통상적인 허용용량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역시 리튬이었어. 이대로 퇴원했다가는…….’
시현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리튬은 수십 년 전부터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약물이었다.
적정 용량을 모니터링 하면서 투여한다면 자살사고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살 도구로 사용되어 치료 용량 이상을 한꺼번에 복용하면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와, 이거 어떡하냐?”
스테이션 PC에서 혈액검사 결과를 확인한 황진호가 아연실색했다.
이성연 환자의 혈중 리튬 농도는 치료 범위 상한의 3배 이상.
이미 시현과 황진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응급투석 진행하고 중환자실 가야 할 것 같다. EM(응급의학과)으로 전과하자.”
리튬은 보호자가 가져온 약봉지에는 없던 약물이었다. 보호자 말대로 환자를 그냥 보냈다면 의료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최근에 병원을 옮겼다고 했을 때 의심하길 잘했어.’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환자가 복용 중인 약물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위험할 법한 약물 몇 가지를 추가 검사한 것이었는데 그 전략이 적중했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의심도 실력이다- 환자를 볼 때만큼은 조금 더 의심해도 좋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system : 비번에 포인트를 획득하여 100% 추가 지급됩니다. (+1,000P)]
‘오늘 도대체 얼마를 번 거야.’
[SORA : 현재까지 총 11,500P입니다.]
시스템창 너머로 흐뭇하게 웃고 있는 SORA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 * *
“오픈데 나 때문에 고생했네.”
황진호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내가 입이 방정이다. 입이…….”
반나절 사이에 확 늙어버린 그였다.
아침에 봤던 광채가 흐르는 피부는 온데간데없었고 다크 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왔다.
7:30 PM
응급실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니 벌써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다.
‘포션이라도 나눠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SORA : 현재 아이템 반출은 불가능합니다.]
‘이 포션들이 다 내 ‘전용’이라는 거지?’
오늘 획득한 포인트로는 각종 포션들을 충분히 구매해놓았다.
2+1 이벤트가 언제 끝날지 몰랐으니까.
넉넉한 포인트와 종류별로 정돈된 포션을 보니 뿌듯함이 몰려왔다.
“시현아 저녁이나 먹자. 이 근처에서 제일 맛있는 거 사줄게.”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지만, 일단 황진호의 손에 이끌려 병원 밖으로 나갔다.
* * *
“천시현 선생님, 오늘 자주 보네요.”
병원 앞 건널목에서 채이진과 다시 만났다.
점심을 같이 먹은 것이 불과 몇 시간 전.
하지만 응급실에서 정신없이 보낸 탓에 체감상 며칠 만에 본 것 같았다.
“일찍 들어오셨네요? 첫 오프신데…….”
“네, 내일 회진 준비 때문에요.”
채이진이 싱긋 웃어 보였다.
“입원환자 50명이래.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누군가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어, 정서야.”
시현의 인턴 동기이자 내과 1년차 연정서였다.
가운을 벗어 팔에 걸친 모습이 일하다 잠깐 나온 것 같았다.
“정서도 당직이었어? 밥 먹으러 가?”
연정서를 보자 황진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생각해보니 둘은 학생 때부터 죽이 잘 맞았다.
“응, 같이 갈래? 우리 바로 앞에서 초밥 먹기로 했는데.”
“그럴까? 그럼…….”
“나 속이 별로 안 좋아. 날것은 좀 그런데.”
황진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시현이 먼저 대답했다.
“그래? 그럼 백반? 뭐 먹지?”
“뭐가 됐든 일단 병원밥만 아니면 괜찮아. 나만 따라와.”
황진호가 대답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병원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 *
잠시 후 병원 근처 식당.
위이이잉. 위이이잉.
채이진과 연정서의 전화기가 동시에 울려대기 시작했다.
“내과 동기방 완전 난린데? 남혜미 선생님, 과장님한테 완전 깨졌다고…….”
연정서가 밥을 먹다 말고 그룹 대화방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어? 천시현 선생님 환자 때문인 것 같은데요?”
대화 내용을 쭉 읽어내려가던 채이진이 시현을 보며 말했다.
“그러네. 시현아, 너 도대체 뭔 짓을 한 거냐?”
“하하. 그 사정이라면 내가 아주 자~알 알지.”
황진호는 신이 나서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알코올성 간경변 환자를 남혜미 선생님이 튕겼는데, 그게 교수님 형님이셨다는 거네?”
“시현아, 너 알면서 일부러 말 안 한 거 맞지? 아주 잘했어! 다들 너무 행복해한다.”
연정서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아니야. 정말 몰랐어.”
시현이 손사래를 쳤으나 이미 연정서에게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 근데 막상 남혜미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화가 많이 난 것 같더라. 찍히면 피곤한 사람인 거 알지? 일단 조심하고.”
“야, 우리 이제 인턴 아니다. 걱정할 것 없어. 안 그러냐 시현아?”
사실 황진호의 말이 맞긴 하다.
이미 타과 레지던트가 된 이상 남혜미가 시현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조치란 거의 없었다.
“맞아요. 혹시 내과 컨설트 필요하시면 저희가 해드릴게요.”
채이진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예전에는 이만큼 친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회귀 후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게 되었고 친구들이 많아졌다.
치료 결과가 좋다 보니 환자들과의 관계도 훨씬 좋아졌다.
“시현아, 전에 말한 내 친구 오늘 안 보길 잘한 것 같다. 둘이 해도 이렇게 바빴는데 너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진짜…….”
황진호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인연이 아닌가 보지.”
“인연은 무슨…… 조만간 주말에 시간 비워둬.”
“그럴까?”
황진호의 말에 소개팅 퀘스트가 갱신되어 윗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소개팅이 있었지.’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존재조차 잊고 지냈던 퀘스트였다.
“와, 1년차 초반인데 벌써…… 정신과 선생님들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그리고 진호 너는 왜 내 소개팅은 안 해주고 시현이만 챙겨?”
“아, 그게…… 알았어! 찾아볼게. 주변에 적당한 사람이 없네.”
연정서의 투정에 황진호는 꽤나 당황한 듯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만나는 분 있으세요?”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황진호는 느닷없이 채이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저는…….”
“어휴, 얘는 뻔할 걸 왜 물어? 우리 이진이가 한국대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았겠어?”
‘정서 여전하네.’
‘우리 이진이'라니. 의국 생활 한 달 만에 벌써 친해진 모양이다.
확실히 연정서의 친화력은 알아줘야 한다.
같은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기들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감상에 빠져있을 새도 없이 연정서와 황진호의 전화기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어? 병동 콜이다.”
“어? 나도. 또 응급실이네.”
오늘 황진호는 내공은 그야말로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오늘은 내가 살게. 시현아, 고마웠어.”
“나도 가봐야 해. 이진아, 이따 봐.”
소화도 다 못 시키고 뛰어가는 두 사람이 안쓰럽기는 했으나 식사가 끝나갈 때 전화가 온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 했다.
두 사람이 급하게 떠나자 또다시 시현과 채이진만 남겨졌다.
“저희도… 일어날까요?”
“네.”
어색한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식당 밖은 가로수에 새순이 돋아나는 포근한 봄밤이었다.
“날씨 좋네요.”
날씨가 좋다고 이야기하는 채이진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내일이 월요일이 아니었다면.
회진 전 파악해야 할 환자가 50명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병원 근처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좋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 정도로 들렸다.
“네… 좋네요. 그럼…….”
채이진에게 인사한 뒤 숙소로 들어가려는 찰나.
“선생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그녀가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