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46화 (46/195)

46화 Chapter 13. 누구냐 넌(1)

“선생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채이진이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따로 할 말이 있나?’

과거에는 없던 상황.

하지만 시현이 당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딩동!

[system : 관리자가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시스템창이 떠올랐기 때문.

‘어떻게 된 거야?’

[SORA : 파악하는 중입니다만, 시스템의 예측을 벗어난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환자 경과는 예측은 초 단위까지 가능하면서 이건 왜…….’

시스템과 혼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이었다.

‘예측을 벗어났다면…… 지금 이 상황?’

[SORA :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차트’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으로 아마도 사용자가 쏠ㄹ…….]

시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교수님들 말씀 잘 들으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아마도 시스템은 환자 진료에만 특화된 것 같았다.

‘잠깐만, 그럼 소개팅 퀘스트는 뭔데? 그건 괜찮고?’

시현은 ER에 환자가 몰린 탓에 놓쳤던 소개팅 퀘스트를 떠올렸다.

[SORA : 좋은 지적입니다. 사용자의 역량이 다소 부족한 것은 사실이나 해당 퀘스트는 ‘구조화된 면담’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맙소사.’

구조화된 면담(Structured interview)

정신과적 평가를 위한 방법의 일종으로 사전에 준비된 표준화된 질문이 사용되는 면담이다.

마치 대본처럼 모든 환자들에게 똑같은 질문이 주어진다.

- 최근 일주일 동안 잠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입니까?

- 지금 하고 계신 일에 대해 만족하고 있습니까?

- 귀하의 일 평균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몇 시간입니까?

면담하는 사람에 따른 편차를 줄이고 일관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깊은 수준의 면담을 하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다.

‘설문지 들고 소개팅을 할 뻔했다.’

[SORA : 아울러 적절한 행동 양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의사 결정 보조 도구’도 제공해드릴 예정입니다.]

‘그 도구라는 게 설마…… 아니겠지?’

동료 레지던트 채이진이(가) 당신에게 시간이 있는지 묻습니다.

1. 시간이요? 당연히 되죠!

2. 시간 없어요. 허튼수작 부리지 말아요.

3. 무슨 일인데요?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잠깐이지만 시현의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이 스쳤다.

‘혹시 몰라. 강성진이라면 충분히…….’

[SORA : 관리자께서는 사용자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환자 진료할 때만 부탁드린다고 완곡하…… 아니, 확실하게 말씀드려줘.’

[SORA : 전달하겠습니다.]

다행히도 우려했던 시스템 창은 뜨지 않았다.

“아, 오늘 오프신데 제가 또 부담을 드릴 뻔했네요. 그럼 나중에…….”

시현이 머뭇거리자 채이진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선 좀 걸을까요? 날씨도 좋은데.”

5월의 밤.

월요일을 앞둔 피로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과거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첫 오프의 밤이었다.

* * *

“다들 왜 병원 밥을 싫어하죠? 전 한국대 있을 때보다 맛있어서 좋았는데.”

한참을 걷다 채이진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사실 삼아대병원 구내식당은 유명 외식업체에서 운영하여 밥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음식보다는 풀당직 기간 동안 삼시 세끼를 다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던 것이 문제였다.

“분위기 때문이겠죠. 내년에 당직 줄어들면 병원 밥이 다시 맛있어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럴까요? 아무튼, 삼아대병원으로 오길 잘한 것 같네요. 처음엔 낯설었는데 의국 분위기도 괜찮고 교수님들도 젠틀하시고…….”

채이진 말마따나 같은 내과 1년차인 서혁상이나 연정서 모두 무던한 친구들이었다.

“내과 친구들 다 좋죠. 가끔 남혜미 선생님 같은 분들이 있어서 좀 어렵지만.”

“그래요? 다들 남 선생님 어려워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 라.

지금껏 남혜미가 받았던 평가 중에 가장 후한 편에 속했다.

‘내과 동료들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러 부른 건 아닐 테고.’

채이진의 의중이 궁금해질 때 즈음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문.

광화문 사거리와 청계광장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는 길.

과거 시현이 즐겨 걷던 산책로였다.

“커피 드실래요?”

“좋죠. 어차피 늦게까지 일도 해야 하는데.”

환자들에겐 늦은 시간 카페인 섭취를 만류하면서도 시현 자신은 밤늦도록 커피를 달고 살았다.

시간이 없어서 못 잤을 뿐, 불면증에 시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채이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인턴 때 종종 가던 도넛 가게였다.

‘여기도 그대로네.’

시현은 늘 앉던 대로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시청 앞 광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정신과 참 잘 어울려요. 학생 때부터 생각하셨나요?”

“네, 본과 3학년 때 진철영 교수님 강의가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아, 진철영 교수님…… 강의 너무 잘하시죠. 아빠 학회 따라갔다가 들은 적 있어요.”

채종우 교수를 따라 학부 때부터 정신과 학회에 많이 다녀본 모양이다.

“근데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강의 내용만은 아니었어요.”

“네? 그게 무슨…….”

- 왜 정신과에 지원하셨나요?

병원 입사 면접은 물론이고 심지어 소개팅을 나가도 늘 듣던 질문이었다.

상황마다 이런저런 대답들을 하곤 했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 * *

삼아대학교 의과대학 강의실.

“여러분, 정신과의 가장 큰 장점이 뭔 줄 아세요?”

진철영의 질문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 삶의 질이 다른 과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 한 환자를 깊게 볼 수 있습니다.

- 피를 안 봐도 됩니다.

몇몇 적극적인 학생들이 질문에 답변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답변들 해주었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진철영이 잠시 뜸을 들이자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정신과는 웬만해서는 망하기도 쉽지 않아요. 볼펜하고 A4 용지만 있으면 평생 할 수 있습니다.”

뭔가 심오한 답변을 기대했던 학생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요즘에야 ‘정재영(정신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이라고 해서 인기과 대열에 합류한 상황이지만, 시현이 학생 때만 하더라도 정신과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관심 있는 학생들은 폴리클 선택 실습 많이들 신청하시고. 다음 시간에 봅시다.”

‘망하지 않는다, 라. 완전 좋은데?’

전공을 정할 때 정신과를 1순위에 놓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 * *

“그게 이유였다고요?”

채이진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성향을 뭐라고 하더라…… Harm avoidance(위험을 회피하는 성향) 맞죠?”

“네, 생각해보니까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불안이 높았던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해보네요.”

그동안 앞으로 뇌과학 분야가 유망해질 거라는 둥 적성에 맞아서 선택했다는 둥 적당한 대답을 내놓곤 했었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선생님은 내과 지원한 이유가 따로 있으세요? 그것도 한국대가 아닌 삼아대병원 내과에…….”

이번에는 시현이 채이진에게 물었다.

“오빠가 한국대병원에 있었어요. 과는 NS(신경외과)였구요.”

“지금은 군의관이신가요? 아니면 펠로우?”

채이진의 오빠에 대해서는 과거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법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족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그게…….”

채이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3년차 때 돌아가셨어요. 병원 당직실에서.”

“아, 그런 일이…….”

“SCD(급성 심장사)였던 것 같아요.”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의료인, 특히 레지던트 과로사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신문 기사에 오르내리곤 했다.

몇 해 전 한국대병원 신경외과에서 젊은 레지던트 한 명이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어렴풋이 본 것 같았는데, 그게 채이진의 오빠일 줄이야.

“오빠 성격이 좀 옵세(완벽 추구적인 성격)한 면이 있었거든요. 가뜩이나 일도 바쁜데 꼼꼼하게 하려니까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가족분들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가뜩이나 힘든데 이걸 산재로 보느냐 마느냐 가지고도 마음고생 많이 하셨죠.”

채이진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삼아대병원으로 온 건 오빠분 때문에…….”

“아뇨. 꼭 오빠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교수 자제면서 한국대에 남아 마이너 과에 지원하지 않고 삼아대병원으로 온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선생님, 스토킹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심리로 그러는 걸까요?”

얼마간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가 서먹해질 때쯤 채이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어떤?”

“모르겠어요. 이게 스토킹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있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전부터 병동 스테이션에 음료수나 간식을 놓고 가는 사람이 생겼어요.”

“보호자들 중에 간식 챙겨주시는 분 아닐까요?”

“네. 이상하게 제가 오프일 땐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상한 일이네요. 우연일 수도 있는 거니까 우선은…….”

시현이 안심시키듯 말했으나 다음 채이진의 말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ER 당직실까지 메모지 붙은 커피가 따라왔다는 게 문제예요.”

“그 정도면 CCTV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보안팀에 문의해서 확인해봤는데 딱히 의심되는 사람을 못 찾겠다고 해요.”

단순히 환자 보호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의사 당직표는 물론 병원 레지던트의 동선까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혹시 색정 망상이 있는 환자도 그럴 수 있나요?”

색정 망상(Erotic delusion)

상대가 자신을 열렬히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망상으로, 단순히 연락을 자주 하고 선물을 보내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감시하고 따라다니며 접촉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색정 망상은 보통 여성에서 더 흔하죠. 메모는 무슨 내용인가요?”

“처음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만나보지 않겠냐고 자꾸 물어봐요.”

“흠…… 그건 좀 많이 무서웠을 것 같은데요?”

누군가 자신의 당직 스케쥴까지 체크하고 있다는 건 소름 끼칠만한 일이다.

“그렇죠? 하지 말라고 의사를 분명히 전하고 싶은데 전할 방법도 없고…… 오히려 요즘에는 당직 때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1년차가 병원에 있는 게 더 편할 정도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계속 관찰한다……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 있겠어.’

치밀하게 계산된 움직임.

단순한 망상장애 환자와는 다른…….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시현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채이진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위이이잉.

“이게 어떻게…….”

채이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병원인가요? 이 시간에 무슨 일로…….”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핸드폰 화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알 수 없음]

그리고 익명으로 보낸 사진.

놀랍게도 거기에는 지금 두 사람이 앉아있는 카페 건물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위이이잉.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문자.

<다른 놈이랑 그렇게 노니까 좋아?>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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