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47화 (47/195)

47화 Chapter 13. 누구냐 넌 (2)

<다른 놈이랑 그렇게 노니까 좋아?>

익명으로 보낸 메시지.

그리고 측면에서 찍은 카페 건물 사진.

채이진은 이미 하얗게 질려있었다.

‘시청 앞 광장 쪽이야.’

마침 카페 앞 건널목에 녹색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어디 가시게요?”

시현이 몸을 일으키자 채이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잠깐 다녀올게요.”

카페 문을 나서자마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ORA : 추천 아이템이 있습니다.]

‘바로 쓸게.’

설명 따위를 듣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SORA : 가속 포션을 적용합니다.]

시현은 나는 듯 달려 단숨에 길 건너편에 도착했다.

‘어디 있지?’

건널목에서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으나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이 중에 도대체 누가?’

상대가 아직 자리를 뜨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작정하고 사진과 메시지를 보냈다.

제 딴에는 채이진의 당황한 얼굴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겠는가.

사람들 틈에 숨어 키득거리고 있을 스토커를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두근두근.

[system : 사용자의 교감신경계가 극도로 항진되었습니다. 정보 열람 범위가 한시적으로 확장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발끝에서 은은한 빛의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그 물결에 닿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정보창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현의 눈에 들어온 정보창은 기껏해야 십여 개 정도.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을 모두 확인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더 확장할 수 있어? 최대한으로.’

[SORA : 개인력을 확인할 개체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극심한 체력 소모가 예상됩니다.]

‘괜찮아. 해보자.’

[SORA : 정보 열람 범위를 추가 확장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발끝에서 거센 파문이 일었다.

순간 가슴이 요동치고 호흡이 가빠왔다.

정보창의 개수는 빠르게 늘어 갔지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보유하고 있는 포션들을 모조리 사용해도 버티고 서 있는 것이 고작.

이래서는 스토커를 찾기도 전에 쓰러질 지경이다.

‘이십에서 삼십 대 남자들만 남겨줘.’

[SORA : 정보창을 필터링 합니다.]

불필요한 정보창들이 꺼지자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이제 시야에 들어오는 정보창은 30여 개.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도 제외.’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사람들의 정보창이 추가로 꺼졌다.

‘남은 건 10명 정도…….’

줄이고 줄였지만 아직도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한 명씩 붙들고 물어볼 수도 없고…….’

[SORA : 추천아이템이 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던 ‘카이트만의 안경 구독권’이 빛나고 있었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스토커가 맞냐고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판단이었다.

딩동!

시현의 질문에 SORA는 답변 대신 새로운 팝업창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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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트만의 안경 1.0 릴리즈 노트]

1. 거짓 감별 - 문장 단위로 거짓말 확률을 표시합니다.

2. 주 감정 분류 - 기본 감정을 수치화하여 보고합니다.

3. 피아식별(New) - 상대의 호의와 적개심을 시각화합니다. (비활성화 -> 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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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식별?’

줄곧 물음표로 남아있던 세 번째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시현은 ‘피아식별’의 내용을 확인한 즉시 구독권을 사용했다.

어찌 된 사정인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쓰기에 이만한 기능이 없었다.

[SORA : 호의는 녹색, 중립은 노랑, 적개심은 적색 오라로 시각화합니다.]

주위를 지나가는 행인들의 실루엣에 노란빛이 감돌았다.

‘모두 중립인데…….’

유독 한 사람의 오라가 눈에 띄었다.

길 건너에 서 있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그의 등 뒤로 너무도 선명한 적색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저 사람이다.’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 남자는 지하철역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미처 정보창을 확인할 틈도 없이 빠른 반응이었다.

빵빵.

“야, 미X놈아! 뭐 하는 거야!”

난생처음 왕복 8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했다.

운전자들의 분노를 뒤로 한 채 시현은 6번 출구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가속 포션을 사용한 상태였음에도 체력소모가 심한 탓인지 몸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어디지?’

지하철역으로 내려왔으나 그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1, 2호선 탑승구와 수 많은 출구들.

최소한 네 갈래 이상의 길들이었다.

귀갓길을 재촉하는 인파 속에서 정보창을 유지할 힘이 더는 남지 않았다.

‘놓쳤네.’

지하철역으로 뛰어 내려가던 스토커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SORA : 확장된 정보 열람 권한이 중단됩니다.]

[SORA : 카이트만의 안경이 비활성화 됩니다.]

[system : 일시적으로 모든 시스템 기능이 정지됩니다.]

허탈함에 맥이 풀리고 모든 시스템창들이 차례로 꺼져갔다.

행인들을 감싸던 오라들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계단을 오르기도 버거울 정도로 어지럽다.

심부전 환자들이 계단을 오르면 이런 느낌일까?

후우.

다행히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답답했던 숨이 조금씩 트이는 것 같았다.

“선생님, 괜찮아요? 그렇게 갑자기 뛰어가시면…….”

계단 끝에서 들리는 목소리.

시현이 고개를 들자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딩동!

[system : 정보 열람 기능이 부분 활성화됩니다.]

‘어? 아까는 중단 됐다고…….’

[채이진 F/26 삼아대병원 내과 1년차]

“괜찮으세요?”

“네. 일단은요. 숨은 좀 차네요…….”

딩동!

[system : 카이트만의 안경이 부분 활성화됩니다.]

채이진의 말에 대답하던 시현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메시지와 함께 채이진의 실루엣에 뚜렷한 녹색 오라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녹색이다…….’

회귀 전에도 친했고 최근에 더 가까워진 느낌은 있었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또 달랐다.

순수한 호의인지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는 까지는 모르겠지만.

‘시스템 부분 활성화…… 이건 뭐야?’

[SORA : 그 기능만큼은 신속하게 복구해야 한다고 관리자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모든 정보창이 사라지고 중립인들의 노란색 오라도 모두 꺼진 상황.

오직 채이진에게만 남아있는 투명한 녹색 실루엣이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관리자가 채이진을 편애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병원으로 갈까요?”

“네.”

일단 병원 쪽으로 걷기로 했다.

“언제부터 따라오고 있었던 걸까요?”

채이진의 말투에서 걱정이 묻어나왔다.

“어쩌면 병원에서부터 아닐까요?”

“휴. 당분간은 집에 가지 말고 당직만 서라는 뜻인가 보네요.”

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원에만 있으면 안전이야 하겠지만, 삶의 질은 전혀 나아질 것 같지 않았으니까.

‘괜찮으려나.’

스토킹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진료실에서도 종종 봤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심리적 압박감이 생각보다 심했다.

<다른 놈이랑 그렇게 노니까 좋아?>

시현은 스토커가 보낸 문자를 떠올렸다.

바람을 피우는 상대방에게나 보낼 만한 내용이다.

정작 채이진은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색정 망상(erotic delusion)이 맞는 걸까?’

타인이 자신을 사랑하고 믿는 망상이라 원래부터 두 사람이 알던 사이여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두 사람 간에 별다른 접점이 없는 경우에도 생길 수 있다는 얘기.

망상의 대상이 실은 자신을 열렬히 좋아하지만, 병원이라는 보수적인 공간에서 공개 연애를 원치 않아서 감정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스토커가 배신감(?)을 느낄만 해.’

오늘과 같은 돌발 행동이 또 생길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가만…… 예전에는 이걸 어떻게 해결했을까?’

채이진이 스토킹을 당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4년차까지 별다른 소문 없이 무난하게 병원 생활을 했던 걸 보면 이 사건도 분명 잘 대처했을 것이다.

‘혹시 내가?’

어쩌면 자신이 변수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보다 채이진과 가깝게 지냈던 것이 스토커를 자극했을 수도 있고.

시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선생님, 내일부터 어떻게 해볼 생각이세요?”

문득 채이진의 대응이 궁금해졌다.

“우선 점심때 잠깐 시간 내서 경찰서에 신고부터 해야겠죠. 그리고 스테이션에 이야기해서 당직 때 기웃거리는 사람 있는지 봐 달라고 하고…….”

‘효과가 있을까?’

스토킹이 경범죄 취급이나 받던 시절이었다.

무난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이건 내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지도…….’

시현의 속내가 복잡해졌다.

* * *

“너무 걱정 마시고 푹 쉬세요.”

걷다 보니 어느덧 병원 앞이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괜히 저 때문에…….”

난처해하는 채이진을 향해 시현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시간 괜찮으면 다음 오프 때 쇼핑 같이 갈래요?”

“네?”

채이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꼭 쇼핑이 아니어도 좋아요. 그러니까…….”

“말씀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요. 그런데 무리는 하지 마세요.”

채이진이 시현의 계획을 만류하며 말했다.

“그 스토커가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땐 확실히 얼굴을 봐두면 되죠.”

시현이 씩 웃어 보였다.

지하철역에서 그의 정보창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가만 내버려 둔다고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아.’

차라리 정체부터 파악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더 큰 일 생기기 전에.

* * *

정신과 의국.

“어 늦게 들어왔네.”

“응. 채이진 선생님하고 잠깐 이야기하다 왔어.”

“올~ 요즘 분위기 좋은 것 같다? 소개팅은 안 해줘도 되겠네!”

그러고 보니 황진호가 말한 소개팅 퀘스트가 아직 남아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하는 게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

시현이 오늘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너도 조심해라. 그 스토커…… 우리 과 환자 같기도 하고…….”

사건 사고 뉴스에 간혹 정신질환자들이 저지르는 범행이 소개되어서 그렇지 사실 정신과 환자들의 범죄율은 일반인에 비해 높지 않은 편이다.

문제는 어디로 튈지 예측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뿐.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위이이잉.

황진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전화기가 울렸다.

채이진의 문자였다.

<내일 오더(처방)가 다 사라졌어요.>

‘분명 아까 병원에서 나오기 전에 다 냈다고…….’

<누가 다 취소했네요. 그것도 제 아이디로.>

내일 자 처방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난감한 상황이었다.

처방이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내면 되지만 투약과 검사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위험한 경우도 생길 수 있다.

특히나 내과에서는 더더욱.

‘설마… 이것도 그 녀석 짓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하철역에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남몰래 오더까지 지우는 스토킹에 진심인 놈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환자 건드리는 건 좀 아니지.’

시현의 표정이 처음으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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