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48화 (48/195)

48화 Chapter 13. 누구냐 넌 (3)

‘아…… 졸립다.’

채이진은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오더를 다시 내느라 늦게 자기도 했지만,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스토커 때문에 잠을 설쳤다.

“어제 누가 제 아이디로 로그인해서 처방을 다 지운 것 같아요.”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정보지원실로 달려갔다.

“밤 11시 13분에 로그인했어요. 로그아웃은 11시 30분에 했네요.”

각종 숫자가 난무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정보지원실 팀장 주용대]

각진 얼굴에 스포츠머리.

그리고 우람한 팔 근육이 눈에 띄었다.

“접속 장소도 알 수 있나요?”

“아마 본관 10병동일 겁니다. 여기 IP 적어드릴게요. 가서 확인해보세요.”

문을 나서는 채이진의 뒤통수에 대고 주용대가 한마디 덧붙였다.

“선생님, 그러니까 비번을 사번으로만 하지 마시고…… 대문자 소문자 다 넣으시고 특수기호까지도 넣으시면 좋고요. 업무 끝나시면 로그아웃도 확실히…….”

“네…….”

팀장의 잔소리에 채이진은 도망치듯 정보지원실을 빠져나왔다.

“보나 마나 qwer1234 이런 거 썼을 거야. 그치?”

주용대가 커피믹스 봉지로 종이컵을 저으며 말했다.

“요즘 그런 일이 많은가 봅니다. 아까도 누가 비슷한 거 물어보고 가셨는데…….”

채이진이 나가자 전날 야간 당직 직원이 말했다.

“그래? 신입 레지던트 대상 개인정보보호 교육 일정을 잡아야겠군.”

“네, 알겠습니다.”

“슬라이드는 자네가 좀 만들어봐.”

“제, 제가요?”

당직 직원의 얼굴에 후회막급의 표정이 스쳤다.

낮게 중얼거리는 입 모양과 함께.

“응? 자네 방금 뭐라고…….”

“아, 아닙니다. 장소는 A회의실로 예약할까요?”

“대회의실이 좋겠어. 이왕이면 전직원 대상으로 하자고.”

그의 말에 당직 직원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본관 10병동.

소화기 내과 병동으로 채이진의 환자 대부분이 여기에 입원하고 있었다.

‘이 번호가 아닌데…….’

몇 번을 찾았지만, 스테이션 공용 PC 중에는 정보지원팀에서 알려준 IP가 없었다.

“여기 스테이션 말고 병동에 다른 PC가 또 있나요?”

채이진이 옆자리에 앉은 간호사에게 물었다.

“없을 것 같은데요? 쌤들 당직실에 한 대 있잖아요?”

“거긴 확인했어요.”

“아, 맞다. 간호 카트에 딸린 노트북이 있어요!”

병동간호사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마침 1005호 병실에 들어가 있는 간호 카트가 눈에 들어왔다.

병실을 돌며 처방도 확인하고 수시로 간호기록을 작성할 수 있도록 카트에는 노트북 트레이가 달려있었다.

‘이거다.’

노트북의 IP를 확인하자 채이진의 눈이 커졌다.

‘대체 누가?’

오더를 지우느라 간호 카트를 20분이나 붙들고 있었다면 눈에 띄었을 법도 한데 막상 확인할 길은 없었다.

“외부인이 저 노트북을 쓰지는 않았겠죠?”

“글쎄요. 어제 나이트 번(23시 ~ 7시 근무)들한테 확인해볼게요.”

인계를 마친 어제 근무자들이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다시는 환자들 오더에 이상한 짓은 못하겠지.’

비밀번호도 바꿨고 스테이션 PC를 외부인이 쓰지 못하게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더는 환자 문제로 채이진을 괴롭힐 요소는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아니, 검사가 취소됐으면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스트레쳐카(환자이송용 침상)를 타고 온 환자가 간호사실에 대고 소리쳤다.

[김민대 남/56 R1 채이진 / Prof. 박종일]

“MRI실 내려갔는데 검사 취소됐다면서 다른 환자 찍고 있던데, 어떻게 된 거예요?”

보호자 또한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담당 간호사가 보호자를 진정시키며 MRI실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 레지던트가 어젯밤에 전화로 검사 취소했다고 하는데요?”

통화를 마친 간호사가 채이진을 보며 물었다.

MRI는 촬영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검사였다.

오더만 낸다고 뚝딱 찍을 수 있는 게 아니고 검사실과 따로 일정조율을 해야 했다.

늘 검사가 밀려있는 만큼 취소가 뜨자마자 다른 환자가 스케쥴을 비집고 들어왔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런 전화를 한 적이 없는데…….”

“일 처리를 이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삼아의료원이라고 해서 믿고 왔는데!!!”

보호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른 일정으로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오더를 지운 것도 모자라 담당의 사칭까지. 너무도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무슨 일인가?”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박종일이 회진 시간에 맞춰 병동에 도착했다.

“오더 하나로 사람이 죽고 사는 곳이 병원입니다. 본인 계정관리에 더 신경을 쓰도록 하세요.”

대략적인 상황을 들은 박종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단순히 업무량이 많은 것은 잠을 줄여가며 하면 된다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방해하려는 사람이 있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위이이잉.

“네, 내과 채이진입니다.”

“정보지원실 주용대 인데요. 어젯밤에 아까 알려드린 PC에서 원격지원 요청이 있었어요. 원격지원을 한 곳은…….”

채이진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외부에서 원격으로 병동 PC를 조작했다면 10병동만 의심할 게 아니었다.

통화가 끝나갈 무렵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시현 선생님이 여긴 왜…….’

시현과 나이트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간호사 한 명이 대화하고 있었다.

“이수지 간호사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아까부터 계속 싱글벙글 이시네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복으로 갈아입고 퇴근하려던 이수지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

이수지가 얼버무리자 시현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런데 어제 왜 그러셨어요?”

시현의 눈에 분노가 타올랐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느끼며 이수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

“일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누가 시킨 건가요?”

시현이 재차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뭘 했다고…….”

이수지는 자신에게 쏠리는 이목이 부담스러운지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으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현은 이수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이야기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NP과(정신과. Neuro-Psychiatry 의 준말.) 선생님이 내과 병동에 웬일이래?”

수간호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담당 환자도 없는데 혹시 수지 보러 온 거?”

“둘이 뭐 있는 거 아냐?”

“수지가 좀 예쁘긴 하잖아? 삼각관계 아닐까?”

병동에 있던 모닝 근무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어머, 천쌤 또 왔네요? 체력도 좋지…….”

“다음에도 종종 놀러 오세요.”

반면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나이트 근무 간호사들은 떠나려는 시현을 굳이 불러서 인사를 하고 친한 척을 했다.

‘간호사들 반응이 왜…… 원래 저렇게 친했나?’

채이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 * *

6시간 전.

[system : 일일 퀘스트 3Km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0.1/3Km)]

모두가 잠든 새벽. 시현은 일일 퀘스트로 하루를 시작했다.

“카라멜 마끼야또 5잔 그리고 진열대에 있는 것들 종류별로 다 주세요.”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24시간 카페.

시현은 음료 여러 잔과 케이크, 스콘, 쿠키류를 잔뜩 산 뒤 가장 먼저 정보지원실에 들렀다.

입원 병동과 응급실에서 24시간 환자를 진료하기 때문에 정보지원실에는 당직 1명이 늘 상주하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책상에 발을 올리고 모바일 게임을 하던 당직 사원이 화들짝 놀라며 시현을 맞았다.

“이거 드시고 하세요.”

시현이 내민 간식에 사원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더가 통째로 날아갔습니다. 누가 장난을 치는 것 같은데…… 접속 IP 좀 확인해 주십시오.”

“바로 봐 드릴게요. 10병동인 것 같은데…… 여기 IP 적어드릴게요. 어? 근데 이거… 무선 IP네요?”

“네. 고맙습니다.”

시현은 정보지원실을 나와 곧장 10병동을 향했다.

병동 입구에 들어서자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ORA : 존재감 포션 사용을 추천합니다.]

‘좋아. 그리고 카이트만의 안경도.’

[SORA : 카이트만의 안경 1일 구독권을 사용합니다.]

제법 출혈이 컸지만, 최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버프를 받은 시현이 양손 가득 간식을 들고 10병동 스테이션을 향했다.

“어머, 인턴 선생님! 여긴 웬일이세요? 아, 이젠 정신과 선생님이시네요?”

인턴 때 내과를 돌며 안면을 튼 간호사가 반갑게 시현을 맞았다.

“여기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와, 맛있겠다! 고마워요, 선생님.”

근무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새벽 3시.

웬만한 일들을 다 끝내고 쉬어가는 타이밍에 맞춰 간식을 사 들고 오는 사람을 반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존재감 포션 효과까지.

[system : 사용자에 대한 10병동 간호사들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피아식별 기능이 비활성화 상태였음에도 간호사들의 등 뒤에서 녹색 오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크 좋다! 선생님 여기 담당 환자 있어요? 우린 내과 환자들밖에 없는데?”

간호사 중 한 명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물었다.

“아뇨. 담당은 없는데 교수님 지인분께서 입원해 계세요. 코골이가 심하다고 하셔서…… 수면무호흡이 있나 한 번 보러 왔어요.”

“아, 그러셨구나…….”

당연히 적당히 둘러댄 말이다.

10병동의 경우 재원 환자만 해도 100명이 훨씬 넘는다.

병실마다 수면무호흡 환자들이 한둘은 있을 터.

마침 간호 카트가 있는 1005호에서 우렁차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노트북으로 접속한 것 같은데…….’

이 병동에 무선 IP라고는 간호 카트에 달린 노트북뿐이다.

간혹 레지던트 중에서 개인 노트북을 병원에 등록해서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남의 오더 지우는 일에 개인 노트북을 쓰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1005호 환자분인데……. 세츄레이션 모니터(산소포화도 측정기) 잠깐 쓸게요. 산소포화도가 얼마까지 떨어지는지 보려고요.”

시현은 병실로 들어가서 코골이가 심한 남자 환자의 검지에 모니터를 물렸다.

그리고 동시에 카트 위에 있는 노트북을 켜 IP를 확인했다.

‘여기서 오더를 지웠어. 이제 범인만 찾으면…….’

스테이션의 간호사들은 뜻밖의 티타임을 맞아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시현이 스테이션으로 돌아오자 간호사들이 말을 붙였다.

“선생님도 좀 드시고 하세요.”

“웬일이니. 이 시간에…… 응급도 아닌데 새벽에 올라와서 환자 보는 레지던트 선생님 처음 봤어요.”

“그러게요. 마침 배고팠는데 우리 내과 선생님들이 좀 이랬으면 좋겠다.”

크루아상을 우물거리며 제법 연차가 있어 보이는 간호사가 말했다.

시현은 이미 이 병동의 최애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저 병실에 있는 노트북은 자주 쓰시나요? 간호기록 입력하라고 설치한 것 같은데.”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시현이 자연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어휴. 저걸 누가 써요. 스테이션에서 오더 보고 다 준비해서 가지.”

“맞아요. 저거 느려 터져서 잘 안 써요.”

“최근에 쓰신 분 있을까요?”

카이트만의 안경 효과로 간호사들의 얼굴에 수많은 점들과 표시선들이 떠오른 상황.

시현이 조심스레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아뇨.”

“저도요. 잘 안 써요.”

“다들 잘 안 쓰시는 것 같던데요? 저도 최근엔 써본 적이 없어요.”

딩동!

[system : 간호사 이수지가 거짓을 말합니다.]

‘이 사람이 왜?’

시청역에서 만난 스토커는 분명 남자였다.

이번 일과 별개라고 하기엔 채이진의 성격상 간호사들에게 원망을 살 스타일도 아니었다.

설령 사이가 나쁘더라도 이런 식으로 골탕을 먹이는 것도 부적절하다.

오더가 사라지면 담당 간호사들 또한 먹기 때문.

‘그렇다면…….’

누군가 시켜서 했다.

남은 가설은 그것 하나였다.

‘그런데 대체 누가…….’

존재감 포션의 효과가 끝난 것인지 어느새 간호사들은 각자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지야, 너 요즘 ‘그 선생님’이랑 잘 되고 있다는 거 진짜야? 소문에…….”

순간 과거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 선생님?’

왜 이제야 생각이 났을까.

과거 2년차 때 병원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병원 내 스캔들.

퍼즐 조각이 조금씩 맞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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