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49화 (49/195)

49화 Chapter 13. 누구냐 넌 (4)

* * *

회귀 전 2년차 봄.

“환자들 대부분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에 주변에 신호를 보냅니다.”

아침 회진 시작에 앞서 진철영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10병동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주변에 힘들어하는 동료는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삼아대병원에서 일하던 한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병동 RN 이수지.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이었다.

의료인의 자살률은 일반인구보다 높다.

특히 여성 간호사의 자살률은 그중에서도 특히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0병동 일이 많아도 너무 많기는 했어.

- 새로 온 수쌤이 너무 태운 거 아냐?

- 평소에 불면증이 심했다던데? 교대근무가 문제야 문제.

병원 특유의 태움 문화에서부터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이수지의 죽음을 놓고 여러 말들이 돌았다.

소문이라는 것이 늘 그렇지만, 그중에는 일부 자극적인 내용도 있었다.

- 레지던트하고 결혼 이야기 오고 가다 파혼한 거 들었어? 그 집 엄마가 보통이 아니었나 봐.

- 그 남자도 문제야. 집착이 심해서 수지를 엄청 괴롭혔다는데. 헤어지려고 하면 협박하고…… 무슨 동영상이 있었다던데? 내가 수지 동기한테 들은 거야.

- 그게 문제가 아니야. ER 차지한테 들었는데 응급실에 들어갈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다는 거야. 뭔가 처치가 잘못된 거 아닐까?

하지만 결국 죽은 이는 말이 없었고 별다른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무성한 소문만을 남긴 채 이수지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져 갔다.

* * *

‘그 선생님이라면?’

이수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늘 언급되던 사람이 있었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김정현.

겉으론 타과 레지던트들은 물론 인턴들과도 잘 지내는 듯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늘 거리감이 느껴지던 사람.

‘이수지가 독단으로 일을 꾸민 게 아니라면…….’

가장 유력한 스토킹 용의자이기도 했다.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

[카이트만의 안경 16 : 53 : 23]

시현은 일단 숙소로 돌아가 나이트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 * *

다시 아침 간호사 교대 시간.

“어제 왜 그러셨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모르겠는데요?”

[system : 이수지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김정현 선생님이 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현이 이수지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듯 말했다.

“무턱대고 감싸다가는 간호사님이 피해를 볼 겁니다.”

“…….”

이수지는 놀란 눈으로 입만 뻐끔거렸다.

“잘 생각해보시고 연락 주세요.”

이수지는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병동을 떠났다.

시현은 스테이션에서 환자 검사결과를 리뷰하던 박종일 교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뒤 병동을 나섰다.

“채 선생 동기 맞지? 저 친구 응급실에서 일도 잘하더니 인사성도 바르네.”

박종일 교수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예요?’

궁금증이 쌓여만 가는 채이진 이었다.

* * *

9병동 아침 회진.

“1년차 선생님들 고생 많았다.”

진철영이 주말 응급실 방문환자 명단을 살펴보며 말했다.

“어제 당직이 황 선생이었나? 광호 군은 올라와서 별일 없었고?”

어제 응급실을 통해 입원한 김광호 환자의 나이는 30세.

그럼에도 진철영은 여전히 그를 ‘광호 군’으로 불렀다.

“네, 교수님. 병동에서 특별히 공격적인 행동 없었습니다. 저녁부터 Olanzapine 10mg(항정신병약의 일종.) 투여 시작했습니다.”

황진호의 보고를 받고 진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Olanzapine을 선택한 이유는?”

“외래에서 오랫동안 드시던 약이고…… 그동안 환자 경과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되어 다시 선택했습니다.”

“오늘부터 Aripiprazole로 교체하고 Olanzapine은 나중에 외래에서 쓰는 것으로 합시다.”

“네, 교수님.”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래 보시던 환자라서 그런가?’

평소 진철영은 입원환자 치료에 대해선 대부분 레지던트에게 일임하곤 했다.

이렇게 약물 종류와 용량까지 정해주는 일은 드물다.

“황 선생, 이 환자 진단이 뭐라고 생각해?”

“외래기록에 따르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피해망상이 주된 문제였지만, 중간중간 조증 삽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현정동장애, 아형은 bipolar type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군.”

진철영이 황진호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원하는 동안 면담 충실히 해보고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네, 교수님.”

“질문이나 코멘트 있나?”

진철영이 테이블에 앉은 레지던트들의 면면을 보며 물었다.

“공격적인 환자를 면담할 때 어떻게 해야 효과적인지가 궁금합니다. 면담 기술이라던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황 선생은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황진호의 질문에 진철영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기술? 그런 문제가 아니야.’

황진호 딴에는 단 한마디로 난폭한 환자를 진정시키고 자의로 입원하게 만드는 요령이 궁금했을 테지만, 진철영이 보여준 것은 면담 내용이나 기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거지.’

환자와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치료적 관계를 맺어온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그저 진철영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진단과 치료만 보지 말고 다른 것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네, 교수님.”

진단과 치료 말고 다른 것?

진철영은 선문답 같은 말을 남긴 채 회진을 마쳤다.

* * *

“하나, 둘, 셋, 넷…… 이거 ER 노트 좀 봐라. 누구 내공이 이렇게 부실한 거야?”

회진이 끝나고 김석용이 응급실 내원 환자들의 차트를 살펴보며 말했다.

“한 명 한 명이 만만치 않은 환자들 같은데?”

“네, 그래도 시현이가 병원 근처에 있어서 잘 마무리했습니다.”

황진호가 시현이 앉은 쪽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운이 좋았죠. 마침 교수님이 병원에 잠깐 들르셨더라구요.”

“김광호 환자는 그렇다 치고…… 약물 중독 환자는 리튬 레벨이 왜 이렇게 높아?”

“처음엔 환자가 약 적게 먹은 줄 알고 저희 과로 노티 됐다가 응급의학과로 트랜스퍼(전과) 했습니다.”

“그래, 이 정도를 처리할 수 있으면 뭐…… 이제 믿고 맡겨도 되겠다.”

김석용이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생님, 그런데 응급의학과 김정현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정현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석용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현이야…… 나도 그렇게 친하지는 않긴 한데. 일도 그럭저럭하고 무난한 친구지. 근데 그거 알아? 걔가 의외로 여자 관계가 복잡…….”

“김정현 선생님이요? 그럴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김석용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황진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치? 인물이 막 잘생긴 건 아닌데 학생 때부터 보면 그렇게 정현이한테 매달리는 여자들이 많더라고.”

“혹시 그게 말로만 듣던 옴므파탈 아닐까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황진호가 김석용의 말에 급 관심을 보였다.

“근데 지나고 보니까 이상하게 사귀는 사람마다 뭔가 불안정한 느낌이 있었어. 2축 문제(Axis 2, 과거 다축진단 체계에서 성격 문제나 지적 장애 등을 기술하는 영역)가 있는 것 같달까. 이건 설명하기가 좀 어렵네.”

김석용이 적당한 어휘를 찾느라 턱 끝을 매만지고 있었다.

“의외로 지지적인 스타일인가 보네요. 아니면 단호하게 말을 못 해서 여지를 남겨두시나?”

‘지지적이라고?’

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과거의 김정현과 이수지의 관계를 생각하면 절대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소문이야 늘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이수지는 김정현과 사귀면서 온갖 힘든 일들을 겪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위이이잉.

되려 이수지가 김정현과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 이유가 궁금해질 무렵 시현의 전화기가 울렸다.

<선생님, 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너무 억울합니다.>

이수지로부터의 문자.

<김정현 선생님과 따로 이야기 해봤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불길한 예감이 시현의 뇌리를 스쳤다.

* * *

당일 22:00 PM 응급실.

“DI (Drug intoxification, 약물 중독) 의심되는 환자입니다. 간호사 기숙사에서 의식 저하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인턴이 급박하게 노티를 하고 있었다.

“상태는요?”

“Stuporous mental state(의식 혼미 상태) 이고 BP (혈압) 90/60 입니다. 평소 스틸녹스, 아티반 그리고 인데놀을 처방받았던 것이 확인됩니다.”

[이수지 여/25 인턴 김원기/ - ]

약물 과량 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수지였다.

“일단 라인(수액)부터 잡아주세요. BP, Saturation(산소 포화도) 모니터링 할게요. 중환자실 병실 있는지 알아보시고요.”

응급의학과 1년차 이철원이 말했다.

환자가 병동 간호사인 것을 알고 꽤 놀랐으나, 노련하게 오더를 입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뜻밖의 소란에 당직실에 있던 레지던트 한 명이 스테이션으로 나왔다.

[응급의학과 R2 김정현]

“DI 환자분이시고 의식 저하된 상태입니다. 약물은…….”

“수지야! 이게 무슨…….”

김정현은 이철원의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수지를 알아보았다.

“선생님, 이 환자 제가 볼게요. 약은 이게 전부인가요?”

김정현이 이수지의 룸메이트들에게 물었다.

“네. 확인된 것은 이것뿐이에요. 그런데 도즈(용량)를 얼마 먹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혹시 휴대폰 있나요? 유서나 따로 남긴 기록은요?”

“여기 가져 왔어요. 유서 같은 건 없었고요. 저희한테도 평소랑 다른 내색은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이수지의 룸메이트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간호사로서 수도 없이 많은 환자를 봐왔지만, 같은 방 동료가 의식이 저하된 채로 누워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순간 김정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단 말이지.’

극히 짧은 시간 동안의 표정 변화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딩동!

[system : 레지던트 김정현의 주된 감정은 ‘행복’입니다.]

시현이 응급실에 들어서자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새벽에 활성화해둔 카이트만의 안경 효과가 아직 남아있었고, 사람들의 표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행복이라니…….’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미간을 찌푸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김정현의 모습에서 순간순간 드러나는 진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이걸로 확실해졌네.’

일반적인 공감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절대로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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