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52화 (52/195)

52화 Chapter 14. 덫 (2)

이예림의 몸에서 그을린 냄새가 났다.

그렇다고 화재 현장에서 구조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번개탄입니까?”

“네. 차량 내에서 피운 것 같습니다.”

구급 대원의 대답에 조광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근처를 지나던 경찰차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의식이 없었습니다.”

“ABGA(동맥혈검사) 바로 나갑시다.”

“네, 교수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곁에 있던 인턴이 헤파린으로 코팅된 실린지를 들고 환자의 손목에서 채혈을 시작했다.

“김정현 선생은 고압산소치료 준비해.”

“네, 교수님.”

“BP(혈압) 잘 안 잡히니까 빨리 라인부터 달아요. 서두릅시다.”

조광필의 지시에 응급실 의료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산화탄소 중독…….’

일명 연탄가스 중독으로도 널리 알려진 상태로, 밀폐된 공간에서 불을 피울 때 종종 발생한다.

일산화탄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뇌에 산소 공급이 되지 않아 의식을 잃고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른다.

합병증을 줄이기 위해 순도 높은 고압의 산소로 치료를 시도하지만 뇌손상과 같은 후유증이 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예림을 병원에서 본 것이 불과 몇 주 전이었다.

이인임 환자의 남편, 곽정수 대표와 같이 있던 그녀의 모습에서 우울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화려한 옷차림.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외모. 자신감 넘치던 그 말투까지.

극단적인 선택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신원미상 F / ? R2 김정현 / Prof. 조광필]

[치료 진척도 7/100 퇴원까지 남은 시간 7일 12시간]

“신원미상이라던데, 혹시 아는 게 있나?”

조광필이 시현에게 물었다.

자살 시도로 응급실에 온 환자들은 퇴원 전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 그 때문에 환자에 대해 시현이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모르는 분입니다.”

“그렇군. 이런 상황은 ‘예전’에는 없었다는 거지?”

시현은 일단 말을 아꼈다.

진료한 환자와 보호자의 신상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습관 때문이기도 했고, 막상 이예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기도 했다.

“그것참…… 이상하군.”

조광필이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이런 선택을 할 이유가…….’

이인임의 남편과 불륜 관계인 것이 들켜 곤란했다고 하더라도 가명을 쓰고 잠적까지 한 상태라 별다른 문제가 될 리 없었다.

수상한 구석이 많아 보였지만, 일단은 의식도 없었고 고압산소치료가 급한 상황.

‘후유증 없이 회복했으면 좋겠는데.’

이 또한 회귀 후 새로 생긴 케이스.

자신의 환자를 괴롭게 한 상간녀에 불과했지만, 막상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시현은 무거운 마음으로 응급실을 나섰다.

* * *

신관 1층 로비.

당직 때마다 시현이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읍급실 입구와 가까운 데다 호출을 받고 병동에 가기에도 좋은 위치.

출입구 셔터가 내려가고 드문드문 불이 켜진 로비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전에 없던 일들이 부쩍 늘었어.’

시현은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과거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할수록 필연적으로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발생한다.

이것이 누적되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얻는 이점이 점점 줄어든다.

심지어 오늘처럼 완전히 새로운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살기에는 후회가 남을 일들이 너무 많았다.

‘우선은 환자 열심히 보고 공부 많이 하는 수밖에 없나?’

생각해보면 어려운 환자를 잘 치료한다던가 치료 경과를 단축시키는 것처럼 본업과 관련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는 별다른 페널티가 없었다.

‘그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지.’

이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어느덧 자정.

시현은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 선생님도 ER에서 환자보고 오는 길이에요?”

마침 노티를 받고 응급실 환자를 보러 가는 채이진과 마주쳤다.

늦은 밤 응급실에 환자 보러 내려온 사람답지 않게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네. 10 병동 이수지 간호사가 DI(drug intoxification, 약물 중독)로 왔었습니다.”

“이수지 간호사가요? 무슨 일이에요?.”

불과 오늘 아침까지도 봤던 사람이 응급실에 누워있다니.

채이진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침에 우리 병동에서 둘이 무슨 이야기 하는 것 같던데…… 혹시 그 일 때문인가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시현은 즉답을 피했다.

이수지에 대해 그리고 김정현과 스토킹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당장은 감이 오지 않았다.

“아! 우리 다음 오프 때 쇼핑 하기로 했잖아요. 그때 더 이야기해주세요.”

“미리 말씀드린다는 게 깜빡했어요. 당분간은 심사 준비 때문에 오프에도 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이 시점에 채이진과 가까워지는 것 또한 회귀 전과 다른 전개.

‘관리자가 아쉬워하겠군.’

어떤 이유에선지 강성진은 채이진을 유독 좋아하는 것 같았다.

채이진과 조금이라도 잘 되는 기미가 보이면 시스템을 강제로 구동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도우려 했으니까.

‘변수를 만들지 않으면서 후회를 줄이는 방법이…….’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다.

황진호에게도 채이진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

‘잠을 안 자고 일을 하더니 이상한 망상이 생겼다고 생각하겠지.’

1년차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철저하게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천시현 선생님?”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그는 IM바이오의 곽정수 대표였다.

“대표님이 여긴 어떻게?”

“지은이…… 아니 예림이는 좀 어떻습니까?”

‘아내분하고 다시 잘 지내보겠다더니.’

이 시간에 레지던트 숙소 앞까지 찾아온 걸 보면 아직 마음 정리가 안 된 것이 분명했다.

“제 담당이 아니라서 잘은 모릅니다. 응급의학과에서 고압산소치료 중이라고 하니까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시현은 가볍게 목례하고 서둘러 숙소를 향했다.

이예림도 곽정수도 과거에는 없던 인물들.

예측 불가능한 접점들을 더 늘려가고 싶지 않았다.

“차에서 번개탄을 피웠다고 하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자살이 아닙니다!”

보호자가 숙소로 들어가는 시현의 뒤에 대고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시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오후에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쫓기고 있는 것 같다고요. 전에 같이 쓰던 커플 앱을 켜놓을 테니 꼭 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경찰에 신고 하신 것도…… 대표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순찰하던 경찰차가 번개탄 피운 차를 우연히 발견할 확률은 극히 낮다.

곽정수 대표가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고 이예림을 찾도록 종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시에 119에도 신고를 해서 빠른 대처를 할 수 있었다.

‘두 분…… 정말 진심이셨군요.’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이 문제일 뿐.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 제일 먼저 의지할 수 있는 관계였다.

결국 그 덕분에 이예림은 목숨을 건졌다.

“어떤 상황인 줄은 알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우선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게…… 예림이가 이야기한 게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이 병원에서 치료받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천 선생님에게 꼭 드릴 말씀이 있다고도 했어요.”

“그게 무슨 내용인가요?”

이 커플의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식 불명인 이예림이 자신에게 할 말이란 게 뭔지 몹시도 궁금했다.

“저도 어떤 것 때문인지 물어봤는데 나중에 꼭 직접 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분명 중요한 내용일 거예요. 이예림 환자 잘 좀 부탁드립니다.”

[system : 곽정수 대표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그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이내 응급실 쪽으로 걸어갔다.

‘뭐지 이건? 신종 환자 청탁 수법인가?’

간혹 환자를 잘 봐 달라고 병동에 음료수와 간식을 사 오는 보호자들은 있었지만,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으니 잘 부탁한다고 하는 보호자는 처음이었다.

‘응급실 이예림 환자 차트 띄워줘.’

숙소로 돌아온 시현은 환자 기록부터 살폈다.

[SORA : 의식은 여전히 혼미하지만 다른 활력 징후는 안정적입니다.]

SORA는 응급실 차트를 보여주는 동시에 요약된 정보를 덧붙여 알려주었다.

병원장님의 비서도 이보다 유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은 지켜봐야 할 것 같고.’

막상 보호자의 말을 듣고 나니 그 할 말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이예림의 전략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일 퀘스트 - 병동 장악을 완료하였습니다! (28/ 28)]

회진 준비를 마친 시현은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이예림의 차트부터 확인했다.

‘혈압도 정상이고 맥박도 빠르지 않아.’

심전도와 혈액검사에서도 특이 소견은 없었다.

아직은 응급의학과 환자라서 중환자실에서 치료하고 있지만 어쩌면 조만간 정신과로 전과 될 수도 있었다.

“이 환자는 누구야?”

타과 컨설트를 확인하던 최지훈이 시현에게 물었다.

“어제 응급실에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입원한 환자인데 우선은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그래? 응급의학과에서 전과 하겠대?”

“아직까지 별다른 말은 없습니다. 혹시 올 수도 있어서 미리 보고 있었습니다.”

‘일을 잘하긴 하네.’

1년차가 타과 환자 기록까지 살피고 있다는 것에 최지훈은 내심 놀란 눈치였다.

담당 4년차로서 시현의 일 처리에는 지적할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1년차답지 않게 노련한 데다 환자 치료 계획을 세울 때도 시현의 의견이 최신 지견인 경우가 많았다.

내실을 따져본다면 삼아대 병원 정신과 레지던트 중 전문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였다.

4년차 초입에 들어선 김민홍과 최지훈과 비교하더라도 전문의 시험 전날까지 공부하고 돌아온 시현이 1년 정도 앞서 있는 셈이었다.

“혹시 전과 의뢰 오면 간단히 초진하고 3년차 선생님이 보도록 배정할게. 하도영 선생님 볼 차례인가?”

옆에서 최지훈과 시현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민홍이 말했다.

“선생님, 이 환자 제가 보고 싶습니다.”

“네가? 스키조(조현병) 바이폴라(양극성장애) 환자 보기도 바쁜데 왜 굳이 이 환자를…….”

“최근에 늘고 있는 자살 시도 방법이라서 MRI 찍고 심리검사 한 결과 가지고 케이스 리포트 해보려고요.”

“케이스 리포트를 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괜찮습니다. 이번 주에 환자분들 많이 퇴원하셔서 여유가 있습니다.”

이예림의 할 말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담당 환자로 면담실에서 이야기하면 불필요한 이목은 끌지 않아도 된다.

“알겠다. 그렇게 하도록 해.”

‘얜 도대체 뭐 하는 놈일까?’

그 의도를 알 리 없는 김민홍은 멍한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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