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Chapter 14. 덫 (3)
잠시 후 회진.
“요즘 응급실에 환자들이 많네?”
진철영이 말했다.
“약물 과량복용에…… 이런,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오신 분도 있고.”
“두 분 모두 응급의학과로 입원하셨습니다. 의식 회복하는 대로 면담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최지훈 선생이 잘 봐주도록 하고.”
김민홍이 치프를 맡는 동안 같은 연차인 최지훈이 타과 협진을 담당하고 있었다.
“넵! 교수님!”
그가 자신만만한 말투로 대답했다.
“연탄을 많이 쓰던 시절에는 자살 시도와 무관하게 일산화탄소 중독이 심심치 않게 있었습니다. 저산소증 때문에 뇌손상이 오는 경우가 있죠. 이걸 예측해서 미리 치료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진철영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향후 심한 증상이 발생할 수 있는 환자를 미리 발견해서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치료 성적이 조금이나마 더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좋은 아이디어들 있나요?”
어려운 질문. 이내 정적이 흘렀다.
평소 생각했던 주제도 아니었거니와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관련 내용을 더 조사해서 발표해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어 레지던트들 모두 몸을 사렸다.
“1년차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초기 환자 평가에 뇌 MRI(자기공명영상)를 포함 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참 만에 시현이 입을 열었다.
“오, 좀 더 설명해보세요.”
“창백핵과 같이 저산소증에 취약한 부위에서 초기 병변이 관찰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향후 후유증을 예측할 수 있는 지표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군.”
진철영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 환자 우리 과로 전과 오거든 천 선생이 담당해서 봐도 좋을 것 같은데.”
진철영의 말투에서 시현에 대한 신뢰가 묻어났다.
“황진호 선생도 맡은 환자 잘 보고 있고?”
그는 이번에는 황진호의 환자에 대해 물었다.
“네, 교수님. 응급실 통해 입원한 김광호 환자도 안정 추세입니다.”
“면담은 좀 해봤나?”
진철영이 되물었다.
“네, 치료가 다소 더디더라도 약물 증량은 최소화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네, 최근 대회 준비 중이라고 했습니다. 약물 교체 시 체중도 늘어날 가능성이 있어 일단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먹고 사는 문제니 어쩔 수 없지.”
진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과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 우리 과는 같은 진단이어도 환자마다 처한 상황이 다 다릅니다.”
진철영이 잠시 말을 멈추고 병동 환자 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치료 전략을 짜는데도 가치 판단적인 면이 필요해요. 그래서 진단만큼 그 환자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네, 교수님.”
시현과 황진호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 학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적응을 잘하고 있어.”
진단이 아닌 환자를 본다.
솔직히 예전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었다.
입원이 필요할 정도로 증상이 심한데 빨리 치료해서 내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 며칠 입원하고 가라.
- 네……
진철영이 응급실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장면은 불가능하다.
환자를 보는 시현의 관점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 ‘변수’는 파악했나?
수화기 너머로 중년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갑다 못해 음산한 느낌마저 드는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었다.
“저희 직원 실수로 일을 그르친 것 같습니다.”
- 외부로 노출되어선 안 될 일이네. 뒤탈 없이 처리하도록.
“네. 염려 마십시오.”
환사준이 전화를 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위이이잉.
“그래, 어떻게 됐어?”
환사준은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삼아대병원에 입원해있습니다.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입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충분히 외진 곳인데 지나가는 순찰차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게…….
환사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처리해. 그 여자가 입 열면 우리 다 망하는 수가 있어.”
- 넵. 알아보겠습니다.
“알아보지만 말고 일을 하라고!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환사준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IM바이오…… 이대로 놓치는 건가. 몇 년을 공들인 작업인데…….’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시나리오가 어긋났다. 그 병원에 뭔가가 있어.’
그리고는 이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 *
3일 뒤.
최지훈은 스테이션에 앉아 협진 의뢰서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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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환자는 3일 전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본과 입원 중인 분입니다. 현재 활력 징후 안정적이며 뇌 MRI에서 특이 소견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정신과적 평가 및 치료를 위해 의뢰드리오니 고진선처 바랍니다.
응급의학과 R2 김정현 / Prof. 조광필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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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환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전실 했다는데. 천 선생이 가서 보고와.”
“네, 전과처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협진은 최지훈의 업무이기는 했으나 전과를 한다면 결국 시현이 볼 환자였다.
‘내게 할 말이란 게 뭘까?’
시현은 곧장 이예림이 입원해있는 병실을 향했다.
‘여기도 오래간만이군.’
신관 11병동.
전 병실이 1인실로 구성된 병동이었다.
정재계 인사들이나 유명 연예인들도 종종 이용하는 곳으로 몇몇 병실은 하루 입원료만 수백만 원대였다.
[이예림 F/41 R2 김정현 / Prof. 조광필]
“안녕하세요. 정신과 레지던트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병실에 들어가자 소파에 걸터앉은 이예림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전까지 중환자실에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가 넘치는 얼굴이었다.
“다행히 살아나서 선생님하고 이야기도 하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분위기가 딴판이네.’
짙은 화장에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차분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머리가 좀 띵하고 무겁네요. 저 우울해서 입원한 게 아닌 거 아시죠?”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말하자면 복잡한데…… 간단히 말하면 임무에서 실패하고 꼬리 자르기 당한 거죠.”
[이지은 / SP인베스트먼트 2팀장]
이예림이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맡은 일을 그르치면 죽을 수도 있는 회사라니.
곽정수로부터 이런 사정을 미리 듣지 못했다면 피해망상쯤으로 생각했을 내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실패하면 죽는다니, 너무 가혹한 근무 환경 아닌가요?”
“임무 나름이죠. 이건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임무였거든요.”
실패해서는 ‘안 되는’도 아니고 실패할 수 ‘없는’ 임무?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어떤 일을 맡으셨던 겁니까?”
“따지고 보면 쉬운 일이었어요. 어떤 ‘시나리오’ 안에서 맡은 배역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이예림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스쳤다.
“본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선생님은 정체가 뭐죠?”
그녀의 말에 시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벌써부터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말씀드렸듯이 저는 정신과 레지던트 1년차…….”
“그럼 지난번에 처음 본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이예림이 따지듯 물었다.
“작년에 저희 병원에 피부과 시술받으러 오지 않으셨나요? 저 피부과 인턴 돌 때 뵌 것 같은데, 제가 워낙 사람 얼굴은 잘 기억하는 편이라서요.”
“…….”
이예림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동안 타과 진료 내역을 포함해서 그녀의 차트는 모두 확인했다.
2년 전 응급실에 복통으로 온 적이 있었고 1년 전부터 주기적으로 삼아대병원 피부과 진료를 받고 있었다.
피부과 인턴을 뛴 적은 없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도 없을 테니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예림은 시현이 제대로 된 대화를 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저도 좀 알아봤는데요.”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이예림이 말을 이었다.
“최근에 선생님 주변 레지던트들이 주식 투자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더군요. 담당 환자들도 눈에 띄게 빨리 좋아졌고요. ER 간호사도 한 명 구해줬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거의 스토커 수준. 시현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선생님은 회귀자인가요?”
“회귀자라니…… 너무 비현실적인 생각입니다. 뒷조사를 열심히 하신 것 같습니다만,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요?”
시현의 대답에 이예림이 고개를 저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일하다 보면 가끔 ‘시나리오’를 받을 때가 있어요.”
“시나리오……요?”
“미래의 누군가가 한번 겪었던 일이라고 해두죠. 별다른 변수만 없다면 그대로 실현되는.”
시현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회귀를 경험한 입장에서 이예림이 말하는 ‘시나리오’의 뜻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틀어진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네요.”
시현은 짐짓 무관심한 투로 대답했다.
“부딪쳤기 때문이에요. ‘시나리오’와 다른 ‘시나리오’가.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죠.”
이예림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사에서는 엉뚱한 쪽을 의심하고 있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이번 일이 틀어진 건…… 아마도 선생님 때문인 것 같은데. 아닌가요?”
두근두근.
‘저 페이스에 말려들겠어.’
이예림의 말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카이트만의 안경 준비해줘.’
이런 상황에서 믿을 건 아이템뿐.
[SORA :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합니다.]
[SORA : ‘피아식별 모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역시나 사용자가 위협을 느낄 때 피아식별 모드는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듯했다.
이예림의 실루엣에 노란색 아니, 노란빛이 감도는 녹색 오라가 켜졌다.
일단은 중립. 어쩌면 그 이상.
‘특별히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시현은 점차 안정을 찾고 면담에 임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저도 제가 의예과(본과에 진학하기 전)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땐 참 좋았는데.”
그리고 자신이 회귀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말하는 환자를 어떻게 면담했을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회귀라는 설정은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신경과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지어낸 말이 아닐까요? 사이비 종교에서 교주를 신격화하려고 퍼트리는 그런 것들처럼.”
그리고 과거의 자신이 했을 법한 내용으로 면담을 이어나갔다.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일 수도 있겠군요. 뭐든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실제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요.”
“…….”
방금 말한 내용은 망상에 대한 인지치료 기법으로 자주 쓰이는 ‘대체 해석’ 이었다.
“혹시 정보를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던가 하지는 않던가요?”
마치 자신의 환자가 신종 사기에 당하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양. ‘보통의 정신과 의사’가 던질 법한 질문들의 연속이었다.
‘혹시 헛다리를 짚은 건가? 크게 동요하는 느낌이 없어.’
이예림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회귀자라면 자신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을 캐물어야 하는데, 시현의 반응은 일반적인 의사의 그것과 같았다.
“힘든 일이 많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안정을 취하시는 게 중요한데, 원하신다면 정신과로 전과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정신과 병동은 사고 방지를 위해 폐쇄병동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히려 좋은데요? 나가지도 못하지만 누가 들어오지도 못한다는 말이잖아요?”
[system : 이예림의 주된 감정은 ‘안도’입니다.]
‘하긴 그런 일을 겪었으니.’
폐쇄병동을 반기는 환자는 처음이었다.
“그럼 내일 전실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9병동에서 뵙죠.”
후우.
병실을 나온 시현은 벽에 기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위험했어.’
카이트만의 안경이 아니었다면 이예림에게 한참 휘둘릴 뻔했다.
[치료진척도 57/100 퇴원까지 3일 12시간 17분 33초]
나오기 직전에 확인한 알림창 내용이었다.
‘전실 하고 며칠 뒤에 퇴원 예정.’
애초에 심한 우울증 환자는 아니었기에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