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Chapter 14. 덫 (4)
* * *
레지던트 숙소.
‘시나리오와 다른 시나리오가 충돌했다, 라.’
병실에서 이예림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광필과 최세영에게 들었던 말들까지.
황진호가 당직인 날이라 산책이라도 하고 들어올까 고민했으나 병원 밖이 두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오늘은 잠이나 푹 자야겠다.’
차트 정리를 후딱 마친 뒤 시현은 곧바로 2층 침대에 누웠다.
[SORA : ‘회복 포션’과 ‘숙면 포션’을 사용합니다.]
피로가 풀리는 느낌과 동시에 나른함이 밀려왔다.
‘이제 오지랖은 그만 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시현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목적지 까지 1.5Km 남았습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 음성이 들린다.
신호등에 녹색 불이 들어온다.
‘여긴?’
너무도 익숙한 운전석.
퇴근 시간대임에도 시현은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번쩍.
반대편 차로에서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화물차.
전조등 불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 안돼.’
핸들을 꺾고 악셀을 밟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쿵. 콰지직.
띠- 띠- 띠- 띠-
“헉헉.”
시현은 차가 구겨지는 끔찍한 소리에 침대에서 튕겨져 나오듯 일어났다.
‘꿈인가?’
‘숙면 포션’을 쓴 이래 처음 경험하는 악몽이었다.
띠- 띠- 띠- 띠-
‘이게 무슨 소리야.’
잠에서 깼음에도 자동차 경적이 아직도 선명하게 들린다.
방향은 신관 쪽.
‘누가 차라도 훔치나?’
흔한 오작동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다시 몸을 눕히는 순간.
- 코드블루 코드블루 신관 1층 주차장
- 코드블루 코드블루 신관 1층 주차장
천장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관 1층에 심정지 환자가?’
환자 발생 장소는 레지던트 숙소 바로 옆이었다.
[6 : 06 AM]
일과 시작 전이라 당직자들만 근무하고 있을 시간.
손 하나라도 더 보태야 했다.
‘가속 포션.’
[SORA : ‘가속 포션’을 사용합니다.]
시현은 곧바로 숙소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 * *
‘이게 무슨 일이야…….’
신관 1층 옥외 주차장의 광경은 시현이 생각한 것과 딴판이었다.
심정지 환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곳에는 보닛이 구겨지고 앞 유리가 완전히 깨진, 검정색 세단이 처참한 몰골로 서 있었다.
‘사람이…… 떨어졌어?’
잠결에 들었던 충돌음과 경적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차량 곳곳에 핏자국이 낭자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타고 핏물이 바닥으로 흘렀다.
‘전에는 없던 일인데…….’
숙소 바로 근처에서 일어난 추락사고.
병동으로 출근하는 길에 반드시 지나칠 수밖에 없는 길목이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삽시간에 몰려든 병원 관계자들 사이로 들것에 실려 나가는 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잠깐만요. 환자 상태는…….”
들것 손잡이를 쥐고 있던 응급구조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흰 포로 덮여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체구가 크지 않은 여성이었다.
다음 순간 들것 밖으로 툭 떨어진 환자의 손목.
파란색 환자 식별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이예림 F/41 82906002]
“11병동 공용 화장실 창문 쪽에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자살 시도 같아요.”
‘그럴 리가.’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자살사고는 커녕 우울감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 꼬리 자르기 당한 거죠.
병실에서 이예림이 무심코 했던 말이었다.
‘설마.’
섬뜩한 전율이 등을 타고 내리는 것을 느끼며, 시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때였다.
“자살 시도로 입원한 환자라 하루라도 빨리 폐쇄 병동으로 전과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어.”
누군가 다가와 시현을 향해 말했다.
“센터장님…….”
“수간호사 말로는 저녁에 천 선생이 환자 면담했다고 하던데.”
들것에 실려 가는 이예림을 바라보며 조광필이 말했다.
“네, 전과 후에 제가 볼 예정이었던 환자라 미리 면담했습니다.”
“별 이야기는 없던가?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말이라던가…….”
“아니요. 그런 말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본인이 번개탄으로 자살 시도를 한 게 아니라 살해당할 뻔했다고 했습니다.”
“살해라니…… 도대체 누가?”
조광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세한 내용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살 동기가 뚜렷하지 않다는 건 확실합니다.”
“동기가 없다, 라.”
조광필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신관 11병동을 올려다보았다.
* * *
“도대체 입원 환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집무실.
중년 남성의 호통 소리가 문밖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쾅!
[삼아대학교병원 원장 원일웅]
그가 중역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그 위에 놓여있던 명패가 살짝 흔들렸다.
“소화기로 창문을 부수다시피 했던데 그러는 동안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저희가 공용 화장실까지는 미처…….”
접객용 소파에 앉은 두 사람, VIP 병동 수간호사와 간호부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번개탄으로 자살 시도를 하고 입원한 환자라면서요? 특별히 신경을 써도 모자랄 판에!”
원일웅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어제 분명 정신과에서도 환자 보고 갔는데…….”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합니까? VIP 병동 환자인데, 레지던트만……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1년차만 왔다 갔다면서요?”
“자살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조광필이 반문했다.
“뭐요? 그럼 타살이란 말입니까? 병원에서 살인사건이라니 가당키나 해요?”
원일웅은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교대근무로 24시간 직원들이 상주하는 곳. 그리고 원내 구석구석 설치된 CCTV들을 생각하면 범행 장소로 병원만큼 부적절한 곳도 없었다.
물론 화장실 안쪽이야 예외로 해야겠지만.
“환자가 혈혈단신에 가족도 없는 사람이라 그나마 다행인 줄 아세요. 병원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원일웅의 말에 조광필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 시간 그를 봐왔지만, 누군가의 죽음조차 경제 논리부터 들먹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론 보도는 최대한 막아볼 테니까 병동 간호사들 입단속 단단히 하세요.”
“네, 원장님.”
11병동 수간호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듣자 하니 병원 직원 하나가 약물 과량복용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다고 하던데.”
“네, 10병동 이수지 간호사입니다.”
“간호부장이 특별히 신경을 좀 써주세요. 초과근무니 태움이니 말 나오기 시작하면 그것도 골치 아프니까.”
‘병동에서 자살이라니. 유서도 없이……’
원일웅이 길길이 날뛰거나 말거나 조광필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 * *
“전과 예정이었던 환자분이 익스파이어(사망) 했습니다.”
“어쩌다가…… 혹시?”
시현의 보고를 받은 최지훈의 눈이 커졌다.
“네. 아침에 있던 사고…… 그 환자였습니다.”
“그랬구나. 안됐네…….”
충격적인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최지훈은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이었다.
협진 의뢰서에서 텍스트로만 본 환자라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반면 시현은 뇌리에는 새벽 댓바람부터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들이 떠나지 않았다.
과거에는 곽정수가 운영하던 회사의 경영권이 넘어가는 일은 있었을지언정 그 일과 관련하여 누군가 죽는 일은 없었다.
‘이예림씨는 도대체 왜…….’
그녀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하더라도 회귀 후 생긴 변화인 만큼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조광필과 최세영이 했던 경고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만약 이예림이 자살한 게 아니라면, 그 칼날이 언젠가는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두려운 마음에 온몸의 털이 곤두선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일견 별다른 동요 없이 일과를 보내는 듯했다.
위이이잉.
- 선생님 ER 인턴 설현수입니다. 노티드리겠습니다.
- 병동인데요, 환자분 퍼미션(동의서) 받아주세요.
- 시현아, 이번 춘계 학술대회에 나갈 포스터 인쇄 맡기고 받아서 챙겨줘. 중요한 거니까 인턴 시키지 말고……
- 이번 사회불안장애 집단치료 책자 인원수대로 준비하고 환자분들한테 미리 연락 돌려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들을 끄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
‘이건 다시 해도 적응이 안 되는데.’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들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SORA : ER 환자는 응급의학과 오더로 lab(혈액검사) 진행 중입니다. Cardiac enzyme(심근 효소) 결과 나올 때까지 30분가량 소요됩니다.]
[SORA : 병동 환자 MRI 촬영 내일 오후 예정되어 있습니다. 퍼미션 오늘 중으로 받아주십시오.]
그나마 SORA 덕분에 놓치는 것 없이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갖 아이템과 유능한 비서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것이 1년차 생활이었다.
‘그래도 GS(외과), CS(흉부외과)보다야 낫지…….’
외과계 레지던트들에 비하면 정신과는 양반이었다. 그들의 일정은 같은 레지던트 입장에서 보기에도 사람이 할 짓이 못됐으니까.
위이이잉.
한가할 틈을 조금도 주지 않고 또다시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 * *
내과 10병동.
“수지는 중환자실 거쳐서 정신과에 며칠 입원하기로 했어. 이번 달 근무표 다시 짜야 하니까 일정 있는 사람들 미리 이야기해.”
오후 인계시간.
10병동 수간호사가 간호사들에게 말했다.
“수지는 어쩌다 그런 걸까요? 평소에 그런 내색 전혀 없던 앤데.”
차지간호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 혹시 수지랑 문제 있었던 사람 있어?”
“아뇨. 그럴 리가요. 수지야 일도 워낙 잘하고 성격도 무난한데.”
“그럼 왜…….”
“그 만난다던 응급의학과 선생님하고 무슨 일 있나?”
한 간호사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닐 거야. 응급실에서 김정현 선생이 수지 손 잡고 펑펑 울었다던데.”
“그럼 혹시…….”
“혹시 뭐? 짚이는 데라도 있어?”
“그 일 있던 날 아침에 정신과 선생님 왔었잖아요. 혹시 그 선생님하고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닐까요?”
“아, 천시현 선생님? 그 선생님이 왜? 나빠 보이지 않던데. 밤늦게 환자 보러 와서 간식도 사다 줬잖아?”
차지간호사가 그럴 리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어휴.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죠!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해요!”
“그날 새벽에 온 것도 그렇고…… 아침에 나이트 번 퇴근할 때도 또 왔었잖아. 혹시 수지가 힘들어했던 게 그 사람 때문인가?”
“어머머!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 선생…… 아니지, 그놈이 우리 수지한테 무슨 짓을!”
시현은 어느새 10병동 간호사들 사이에서 ‘그놈’이 되어있었다.
“저, 혹시 저희과 선생님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스테이션 건너편 면담실에서 협진 환자 면담을 하고 나온 최지훈이 물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황급히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간호사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그녀들을 보며 최지훈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