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Chapter 15. 벗어나다 (1)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그녀들을 보며 최지훈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
다음날 9병동 회진 시간.
“25세 여자 환자 이수지 님, DI(Drug intoxification, 약물 중독)로 응급의학과 입원 중이며 별다른 부작용 관찰되지 않아 금일 우리 과로 전과할 예정입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최지훈의 전과 보고.
“흐음…… 이 환자가 우리 병원 간호사라고 했나요?”
“네, 과장님.”
이광섭의 표정에서 평소와는 다른 난처함이 느껴졌다.
“뭔가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주로 힘들었던 점이 뭐라고 하나요?”
“환자가 면담에 방어적인 태도로 임하고 있어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방어적인 태도 운운했지만, 결국 아는 게 없다는 이야기.
이광섭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며칠 전 원장실에 따로 불려가 원일웅과 개인 면담을 하고 온 터였다.
- 혹시라도 산재로 몰아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업무 스트레스가 우울감과 자살 시도의 주요 원인이라고 하더라도 최대한 병원 이미지에 해가 되지 않도록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상급종합병원 간호사의 업무 강도야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거기에 신규 간호사들이 입사 후 몇 년 동안 겪는 ‘태움’까지.
군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곳이 간호사 집단이었다.
‘최대한 잘 치료해야 할 텐데.’
같은 환자를 보더라도 경영자와 의사의 마인드는 다르다.
원일웅과는 다르게 이광섭에게 있어 산재 여부는 둘째 문제였다.
기분을 안정시켜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인 셈.
‘쉽지 않은 케이스로 생각되는데.’
이전 자살 시도의 과거력은 앞으로의 자살 행동을 예측하는 가장 큰 위험 인자.
특히나 인체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의료인의 경우, 자살 시도는 더욱 치명적일 수 있었다.
“치프는 담당의 배정하고, 담당의는 환자 면담한 후에 보고하도록 하세요.”
이광섭은 짧게 코멘트한 뒤 병동을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3년차 이상의 시니어 레지던트들 중 한 명이 맡아주었으면 했지만, 레지던트들의 일은 치프에게 일임하자는 주의였다.
“3년차 이상이 맡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훈이가 협진 때 면담해봤으니까…….”
이광섭의 우려를 읽기라도 한 듯 치프 김민홍이 운을 뗐다.
“이 환자, 1년차 선생님이 담당하면 어떨까?”
김민홍이 3, 4년차 레지던트들을 보며 묻는데 돌연 최지훈이 뜻밖의 의견을 냈다.
“아무래도 병원 직원인데, 1, 2년차 주기는 부담스럽지 않아?”
“내가 보기엔 최근에 연애 문제가 잘 안 풀려서 홧김에 약을 다 털어서 먹은 것 같아. 불안이 심하긴 한데 막상 자살사고가 심하지는 않더라고.”
최지훈이 별거 아니라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모든 자살 시도는 의미 있게 다뤄야 하거늘.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병원에서 오래 있을 사람들이 유리한 면도 있지. 환자는 계속 우리 병원에서 근무할 건데, 우리는 내년에 전문의 따면 나가야 할 수도 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우리 1년차들이야 워낙 잘하고 있어서 별문제 없을 것 같다.”
방금 뭘 들은 거지?
허구한 날 아랫년차 깎아내리기 바쁜 사람이 뜬금없이 1년차를 치켜세우다니.
레지던트들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이런 건 여전하네.’
의사로서 최지훈은 그리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딱 하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있었다.
까다로운 환자를 피하는 능력.
그것만큼은 회귀자도 울고 갈 정도였다.
- 그렇게 어려운 환자 아니야. 천 선생이나 황 선생이 보면 적당할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시현이나 황진호에게 두루뭉술 넘긴 환자들은 나중에 십중팔구 문제가 되곤 했다.
이수지의 경우도 마찬가지.
회귀 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과가 좋지 않은 케이스였고 나중에 산재 관련해서는 병원장의 압박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천시현 선생이 맡아보면 어때?”
그리고 이어진 뜻밖의 제안.
그런 그를 바라보며 시현이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 녀석이라면 믿고 맡겨도 되겠지.’
김민홍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 무렵의 1년차가 보기에 적절한 환자는 아니었지만, 김민홍은 의외로 반기는 눈치였다.
“네, 알겠습니다.”
최지훈이 튕긴 환자라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달리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 * *
[이수지 여 / 25세 R1 천시현 / 담당 교수 Prof. 이광섭]
“오늘부터는 제가 담당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전과 후 첫 면담.
“선, 선생님이 제 담당의라고요?”
시현의 인사에 이수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간의 치부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담당의가 되었으니 그녀로서도 편치 않을 터였다.
“사실은 별로 입원하고 싶지 않았어요. 간호부장님이 절차상 필요한 거라고 폐쇄 병동에 일주일 정도 입원하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온 것뿐이에요.”
역시나 시현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병동에 입원하신 이상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모든 면담 내용에 대해 비밀을 보장하겠습니다.”
“네…….”
그 말에 이수지는 조금 안심한 기색이었다.
‘입이 무거운 사람인 것 같은데.’
실제로 아직까지 자신이 채이진의 처방에 손을 댔다는 소문은 돌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김정현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시현이 한참 만에 운을 뗐다.
과거에 들은 소문대로라면 두 사람은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갈 정도로 진지한 사이였다.
- 오빠에게 그런 거 아니라고…… 제가 말한 게 아니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최근 응급실에서 이수지가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무리한 일을 시켰다고 화를 내야 정상일 텐데 잘 말해달라니.’
상식을 벗어난 반응. 그만큼 이수지가 정서적으로 김정현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수지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사귀고 있어요. 정현 오빠랑.”
“결혼도 생각하고 계시고요?”
“음…… 아마도요?”
아마도라니.
남 이야기하는듯한 모습. 뭔가 자신이 없어 보였다.
“채이진 선생님 일, 이수지 간호사 혼자서 한 일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건 분명 오빠가 시켜서…….”
“혹시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한 건지 알고 계십니까?”
미행하고 익명으로 문자를 보낸 것으로도 모자라 처방에 손을 대기까지.
삼아대병원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채이진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응급실에서 뭔가 트러블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리가…….’
채이진의 성격상 타과라고 해도 윗년차와 다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애인의 부탁이라고 해도 거절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환자가 죽고 사는 일이니까요.”
“…….”
“이건 정신과 의사로서가 아니라 동료 의료인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수지가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거절하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쉽지만은 않지요. 누구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니까요.”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Fear of abandonment).
시현이 생각하는, 환자가 부적절한 관계를 끊지 못하고 김정현이 시키는 대로 끌려다니는 이유였다.
“두려움…… 맞아요. 두렵죠. 오빠는 그런 사람이니까.”
이수지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쳤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 사람한테 버림받는 건 그렇게 무섭지 않아요. 정말 두려운 건…….”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대답은 시현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 * *
“저…… 실은 협박을 받고 있어요.”
“협박이요?”
“동영상이 있거든요. 저는 취해서 기억도 안 나는데…… 오빠는 제가 촬영에 동의했다고만 했어요.”
“그런 협박은 중범죄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하셨나요?”
비록 영상 유포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협박만으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한 상황.
오히려 치밀한 성격의 김정현이 그런 뻔한 수로 노골적으로 협박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당연히 지워달라고 했죠. 오빠도 그러겠다고 했고요. 그때까지는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수지는 울먹이고 있었다.
“헤어지려고 노력을 안 했던 건 아니에요. 잠깐 다른 사람을 만난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김정현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익명으로 온 메시지를 받아야 했다.
얼굴을 가려 알아볼 수 없었지만, 당사자인 그녀만은 알아볼 수 있는 사진과 영상들.
“어떻게 된 거냐고 따졌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더라고요. 신고도 해봤지만…… 성인 사이트 광고처럼 편집이 되어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만 들었어요.”
‘이수지의 성격 문제가 아니었어…….’
겉으로는 연인처럼 행동하지만, 실상 온갖 더러운 일에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얻은 셈이었다.
“벗어나고 싶어요. 너무… 너무…….”
과거의 이수지가 반복적으로 자살 시도를 했던 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며칠 뒤.
“이수지 환자는 좀 어떤가요?”
이광섭이 시현에게 물었다.
“여전히 불안 호소가 심합니다.”
“불안? 무엇에 대한 불안이지?”
“그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김정현에게 끌려다니면서까지 외부로 알리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다.
면담 내용 가운데 중요한 내용은 회진 때 담당 교수와 공유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환자가 그마저도 비밀로 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하는 경우에는 담당 교수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때가 있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보고드리겠습니다.”
이광섭의 말에 시현이 대답하는 찰나.
“혹시 환자와 사적인 관계라도 맺고 있는 건가?”
최지훈이 불쑥 끼어들었다.
“사적인 관계라는 게 무슨…….”
“최근에 ‘우연히’ 들었는데, 천 선생이 이수지 간호사를 쫓아다녀서 힘들어한다는 말이 있더라고. 뭐, 소문일 뿐이지만.”
일견 걱정스러운 표정. 하지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웃음까지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응급실에서도 환자 앞에서 김정현 선생하고 언성을 높였다지?”
‘애초에 이걸 노렸나.’
정신과 의사에게 환자, 그것도 이성인 환자와 치료실 밖에서 만나는 것은 금기에 해당했다.
극도로 힘든 상황에 환자가 치료자에게 의존하기 쉬운 상태에서 이러한 관계를 악용하는 사례들도 종종 있었기 때문.
설령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적인 접촉은 피하고 의사-환자 간의 경계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현의 경우 이수지와는 어떤 일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소문이 도는 것만으로도 손해가 컸다.
“천 선생은 면담실에서 따로 보지. 환자분도 같이.”
“네, 과장님.”
저렇게 심각한 이광섭의 표정은 처음 보았다.
그를 따라 회의실을 나서는데 수간호사가 따라와 말했다.
“과장님, 이수지 환자 보호자들이 면담 요청해왔습니다.”
“그래요? 어디 계신가요?”
이광섭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 시현은 의외의 인물들과 맞닥뜨렸다.
‘저 사람이 여긴 왜?’
걱정스러운 얼굴의 중년 부부 곁에 선 흰 가운 차림의 젊은 의사.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김정현이었다.
시현을 알아본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