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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56화 (56/195)

56화 Chapter 15. 벗어나다 (2)

‘저 사람이 여긴 왜?’

시현을 알아본 김정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수지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중년인이 이강섭을 향해 다가왔다.

거무튀튀한 피부톤. 축 처진 볼살.

셔츠 주머니에는 담배가 들어있었고, 아침 시간임에도 약간의 술냄새가 나는 듯했다.

“병원에서 일을 어떻게 시켰길래 애가 저렇게 된 겁니까?”

“심려가 크셨겠습니다.”

애꿎은 분풀이였으나 이광섭은 점잖게 받아넘겼다.

“애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데 선배들이 너무 텃세를 부린 거 아닙니까? 쯧.”

이수지의 아버지가 작게 혀를 찼다.

딸의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

“일뿐만이겠습니까? 다른 스트레스가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스트레스요? 여기 이렇게 자상한 김서방…… 아니, 남자친구하고 같이 일하는데.”

그가 곁에 선 김정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튼 우리 교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 뭐냐, 진단서를 좀 잘 써주십사 해서 왔습니다.”

“진단서요? 그게 무슨…….”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우울증이 생겼다던가 몇 달 동안 유급휴가가 필요하다던가 그런 내용으로요.”

“…….”

이광섭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단서나 소견서에는 환자의 객관적인 상태만을 적는 것이 보통.

특히나 이런 식의 인과관계의 판단하는 것은 의사의 권한 밖이었다.

“제가 좀 더 잘 살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김정현이 보호자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자네가 잘못한 게 뭐 있다고! 다 병원 일이 힘든 탓이지.”

말하는 투를 보니 병원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모양새.

“뭐, 그런 부분이야 나중에 병원 측하고 상의할 내용이고…… 모쪼록 우리 딸 잘 부탁드립니다.”

“모든 환자분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우리 병원 직원이기도 하고 특별히 더 신경 쓰겠습니다.”

이광섭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아,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병동 담당의 선생을 좀 바꿀 수 있을까요?”

“담당의를요?”

뜻밖의 말에 이광섭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담당의 변경은 예민한 부분이라 상의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면에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 선생님이 ‘소문’이 안 좋다고 하더군요. 수지도 왠지 모르게 불편해하는 눈치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김정현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 * *

잠시 후 면담실.

보호자들이 돌아간 후 이광섭과 시현이 마주 앉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호자가 먼저 담당의를 바꿔 달라고 하다니.”

“어떤 상황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짚이는 곳이 있기는 하다.

채이진과 이수지, 두 사람에 대해 일을 꾸밀 때마다 시현이 가로막았던 터라 김정현 나름대로 뭔가 수를 쓴 듯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최지훈이 이수지를 1년차에게 떠넘긴 것부터가 잘못된 것 같기는 하지만.

“아까 최 선생이 말한 소문이라는 건 뭔가? 보호자도 말하던데. 혹시 환자와 사적으로…….”

“사실무근입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김정현이 일부러 퍼뜨린 건지 10병동 내부에서 나온 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나 지금이나 이수지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것이 사실.

그 부분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이광섭도 그 나름대로 고민이 되는 상황이었다.

평소 보여온 행실을 봤을 때, 시현이 환자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보호자가 요청을 했는데…….’

단순히 보호자 의견대로 담당의를 교체하면 간단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전례가 없는 일인 데다 그 자체로 뭔가 의혹을 키우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너무 다른 사람들 이야기만 많이 들은 것 같아. 정작 중요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이광섭이 이내 굳은 인상을 펴며 내선 전화기를 들었다.

- 네, 과장님.

“이수지 환자, 잠깐 면담할 수 있을까요?”

똑똑똑.

수화기를 내려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수지가 면담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시현과 이광섭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시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병동 생활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아까 부모님도 잠깐 왔다 가셨는데, 오늘 기분은 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환자는 대답하면서 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 내가 그 자식 가만두나 봐. 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폐쇄 병동에 갓 입원해서 전화도 못 쓰는 상태. 밖에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그녀로서는 알지 못했다.

다만 김정현이 시현에게 뭔가 앙갚음을 하려 한다는 정도밖에는.

“담당의 말로는 뭔가 걱정되는 게 있다고 하던데, 뭔가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인가요?”

“…….”

“입원 중일 때는 여기 천시현 선생님과 면담을 하지만 퇴원 후로는 교수 외래를 보게 될 겁니다. 마찬가지로 비밀을 보장할 거고, 병원이라 다른 직원들이 볼 수도 있으니 차트에도 남기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 그게…….”

이광섭이 거듭 안심시키듯 말했으나 이수지는 여전히 김정현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여기서 이야기한들 정신과에서 나서서 동영상을 없애줄 것도 아니고.

세상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천시현 선생님은 자초지종을 다 알고 있는 게 맞나요?”

“네. 맞아요.”

“혹시 저희 담당의가 환자분을 불편하게 해드린 면이 있던가요?”

“아뇨! 전혀요! 그런 거 아니에요.”

이수지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면담실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명확한 의사표시를 한 셈이었다.

그 모습에 이광섭이 빙긋이 미소지었다.

“사실 아까 보호자들이 담당의를 변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도 순간 고민이 되더군요.”

“담당의 선생님을 왜…….”

“뭔가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지금 보니 담당의를 바꿀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멀리 떨어져 앉을 수도 있었는데, 굳이 시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교수인 자신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정을 담당의에게는 이야기했다.

거기에 혹시 불편했던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한 반응.

환자가 담당의를 꺼린다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치료적 관계가 좋다고도 볼 수 있었다.

“천 선생은 면담에 더 집중하도록 하세요. 보호자분들에게는 내가 따로 설명할 테니까.”

이수지가 면담실에서 나가자 이광섭이 시현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위이이잉.

- 과장님, 많이 바쁘신가요? 외래에 환자 너무 밀려있는데…….

“이만 가봐야겠어. 도움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이광섭 또한 서둘러 병동을 떠났다.

보호자의 말대로 담당의를 바로 바꿨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봤다는 건…….’

최지훈이 말한 근거 없는 뜬소문보다 보호자의 판단보다 시현에 대한 신뢰가 더 크다는 뜻이었다.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으나, 당장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수지 환자 차트 띄워줘. 응급실 기록부터.’

[SORA : 의무기록을 출력합니다.]

언제나처럼 시현은 다시 차트를 열었다.

* * *

응급실 내 처치실.

“거의 다 됐다. 조금만 참아.”

벌써 다섯 번째 ‘조금만’.

수술대에 누운 아이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엄마 손을 꼭 쥐었다.

“컷! 여기 드레싱 해주세요.”

김정현이 찢어진 상처의 마지막 한 땀을 마무리하며 인턴에게 말했다.

극도로 가지런하고 촘촘하게 봉합된 상처.

얼른 보기에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처치였다.

“우리 꼬마 아가씨 다 끝났어요! 앞으로 다치지 말고!”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친절하세요? 상처도 꼼꼼하게 봐주시고.”

“아이가 워낙 아픈 것도 잘 참고 가만히 잘 있어서 쉽게 끝났습니다.”

김정현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렇게 협조가 잘 되고 ‘착한’ 환자들만 있으면 좋겠어요. 울고 떼쓰는 애들도 많은데, 그럼 저희도 힘들거든요.”

“감사합니다. 선생님한테 인사드려.”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멀어지는 환자와 보호자.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던 김정현의 표정이 이내 굳어졌다.

“촘촘한 봉합은 상처가 벌어질 확률을 줄이지만 순환장애와 허혈로 인한 조직 손상을 일으킨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몇 땀으로 고정만 해도 충분한 상처로 보이는데요.”

어느 틈에 다가온 시현이 김정현에게 말했다.

‘언제부터……?’

환자를 보느라 처치실에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글쎄 뭐랄까. 다 알지만, 상처가 벌어지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조금 더 신경 써서 여러 번 봉합했다. ‘임상적 판단’이 그렇다. 그 정도로 봐주면 안 될까?”

잠시 당황했으나 금세 웃는 낯으로 돌아온 김정현이 대답했다.

“그 ‘임상적 판단’으로 미행, 협박, 의무기록 조작도 하시는 거군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데. 정신과 선생님이 되시더니 상상력이 풍부해지기라도 한 거야?”

짐짓 모르는 척을 하며 이죽거리는 모습.

제대로 대화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미행에 협박을 하는 사람이라…… 나하곤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왜 그러는지 모르다니 아직 공부가 부족한가 보네. 그거야 당연히 재미…….”

김정현은 뭔가 해서는 안 될 말이라도 한 듯 잠시 멋쩍게 웃었다.

“재미보다는…… 그래, 희열이 낫겠어. 누군가의 선택을 제한하고 모든 걸 통제하는 거, 생각보다 즐거울 거 같지 않아?”

“즐거움 때문이라고요?”

과거에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물론 전에도 반사회적 성향이 있는 환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불면증이나 불안과 같은 스스로 불편한 증상으로 찾아온 경우였다.

더러는 감형을 목적으로 진단서를 받기 위해 병원에 오기도 했지만, 의사에게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나야 모르지. 그래도 내 뜻대로 잘 움직여질 때는 신이 나고, 쓸데없이 방해하는 놈이 있으면 기분 잡칠 것 같기는 하네.”

김정현이 손에 낀 라텍스 장갑을 벗어 폐기물 상자에 내동댕이쳤다.

“그래서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은 상태인가 보군요?”

“뭐, 꼭 그렇지도 않아. 장해물이 있으면 그 나름대로 부수는 맛이 있을 테니까. 게임도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잖아?”

“지금이라도 그만두시죠. 그 장해물이 지금 선생님 발목을 잡아서 다시는 뛰지 못하게 만들지도 모르니까요.”

“크큭. 어이가 없네? 무슨 칼을 든 것도 아니고 주사기에 든 약물일 뿐이잖아? 다른 환자에게 주려고 미리 준비했을 수도 있고. 안 그래?”

김정현이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지난번처럼 내가 죽일 뻔했다고 ‘억지’라도 쓸 건가? 괜한 모함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난 아무것도 안 했다고!”

김정현은 녹음이라도 염두에 둔 듯 결백을 주장했다.

“…….”

“그리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그걸 누가 믿겠어? 그래서 죽은 사람은 있고? 당장 조광필 교수만 해도 그렇잖아. 선생을 나무라지 나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당혹스러워하는 시현의 얼굴을 보며 김정현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다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보다는 싫다고 하는 간호사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의사 이야기를 좋아할 것 같은데. 그러다 그 간호사가 자살이라도 하면 더 열광할 테고.”

‘이래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시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였다.

“이 환자 수처 누가 했나?”

처치실 뒷문이 열리고.

성난 표정의 중년인이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센터장님…….”

조광필의 등 뒤로 아까 봤던 아이와 보호자가 서 있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싸늘한 표정.

김정현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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