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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57화 (57/195)

57화 Chapter 15. 벗어나다 (3)

30분 전.

응급의료센터 센터장실.

“무슨 일인가? 연락도 없이.”

조광필이 하던 일을 멈추고 시현을 맞았다.

“김정현 선생 관련해서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천 선생은 환자 진료에만 전념하는 게 좋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 일은 내가 처리하겠네.”

“이대로 내버려두면 위험한 환자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시현은 회귀 전 이수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건의 전말은 알 수 없지만, 분명 김정현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동안 이수지를 교묘하게 협박해왔다는 것까지.

“반사회 성향 중에서도 가학적인 면이 큰 사람입니다.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기기도 하고요.”

“정말 실수가 아니었던 건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일을…….”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라면 여기 많이 있습니다.”

“이건…….”

시현이 건넨 서류들을 확인한 조광필의 눈이 커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더 보여드릴 수 있고요.”

센터장실을 나온 시현은 김정현이 있는 처치실을 향했다.

‘은신 포션.’

[SORA : 은신 포션을 사용합니다.]

배경에 스르륵 녹아드는 느낌과 함께 그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 * *

다시 처치실.

“센터장님…….”

조광필의 등 뒤로 아까 봤던 아이와 보호자가 서 있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싸늘한 표정.

김정현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방금 이야기를 다 들은 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조광필은 아이를 처치실 의자에 앉혔다.

“상처 좀 잠시 보겠습니다.”

“아, 아야.”

조심스럽게 아이의 팔에 붙은 거즈를 뜯자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과도하게 촘촘하게 봉합. 거기에 실을 너무 세게 당겨 있어 피가 잘 통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실밥 몇 개만 제거하겠습니다. 혈액순환이 잘 돼야 상처도 빨리 나으니까요.”

“아, 네…….”

“11번 블레이드 주세요.”

조광필은 인턴이 건넨 끝이 뾰족한 메스를 들고 김정현이 봉합한 매듭을 제거해나갔다.

“저희 레지던트가 잘하려다 보니 의욕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상처 자체는 괜찮아요. 며칠 내로 가까운 병원에서 소독 받도록 하세요.”

간단한 주의사항 몇 가지를 일러준 뒤 조광필은 환자와 보호자를 처치실 밖으로 내보냈다.

“수처(Suture, 봉합술) 저렇게 하지 말라고 매번 일렀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매번 실수를…….”

“실수? 얼마 전에 신규 레지던트들한테 창상 관리 요령 티칭한 게 김정현 선생 아니던가?”

“…….”

김정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2년차답게 행동했으면 좋겠어. 요즘 사고를 많이 치는 것 같은데, 이쯤 되면 환자 고생시키는 걸 즐기는 거 아닌가? 허허허…….”

뜨끔.

웃으며 말하고는 있지만, 반사회적이고 가학적인 면이 강한 그의 입장에서는 정곡을 찔린 셈이었다.

“아닙니다. 어떻게 그럴 리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라. 확실한가?”

다음 순간, 조광필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인턴과 간호사들이 슬그머니 처치실을 빠져나갔다.

조광필과 김정현, 그리고 시현만이 남은 상황.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조광필이 탁자 위로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거 한 번 설명해보게.”

“이, 이게 왜…….”

상자를 열어본 김정현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주사액으로 가득 찬 20cc 실린지. 이수지에게 주사하려다 시현에게 들키는 바람에 빼앗긴 바로 그 주사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꺼내서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비닐로 밀봉된 상태였다.

보존에 신경을 쓴 증거봉투 마냥.

“플루마제닐(Flumazenil, 진정제 과량복용에서 해독제 역할을 하는 약물)이 아닌 건 확실하고…….”

‘이미 다 알고 있는 건가?’

김정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응급실에서 조광필이 시현을 따로 불렀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 못했다. 예의를 중시하는 그가 2년차에게 덤비는 1년차를 나무라는 것으로만 여겼을 뿐.

“그건…… KCl입니다. Hypokalemia(저칼륨혈증, 혈중 칼륨이 저하된 상태)가 있어서 교정하려고 준비했습니다.”

애써 태연한 척, 김정현이 대답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환자 칼륨 수치는 정상이었어. 거기에 KCl을 bolus(일시 주입)로 주려 했으니…… 환자가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그의 덤덤한 대답이 오히려 조광필의 심기를 건드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당시에 환자가 많이 몰려서 다른 환자분 검사 결과와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는 듯한 태도.

“여기 천시현 선생님이 말려주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선생님께도 사과드리겠습니다.”

김정현이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백한 살인 미수였지만 계속해서 단순한 실수로 몰아가고 있었다.

‘연기력 하나는 정말…….’

그 모습에 시현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떤 환자? Hypokalemia(저칼륨혈증) 환자는 내과에서 진료할 텐데. 우리 과에 그런 환자가 있었나?”

“…….”

“여기서 찾아보게.”

조광필이 김정현을 향해 서류 파일을 내밀었다.

“이건…….”

“그날 응급실에 머물렀던 환자 명단이네. 우리 과뿐 아니라 다른 과 환자까지 모두 포함된 거야.”

김정현은 한참 동안 명단을 살폈으나 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왜? 찾기 힘든가?”

“네. 며칠 지나서 기억이…….”

“그래. 힘들겠지. 그 시간에 응급실에 있던 환자들 중에 저칼륨혈증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 말에 김정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 잘못 본 걸 겁니다. 수치를 착각해서 실수할 뻔했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수지 간호사에게 줄 플루마제닐도 따로 챙겼습니다. 절대로 플루마제닐 대신 KCl을 주사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환자를 잘 못 본 것에서 숫자를 잘 못 본 것으로.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이어나갔다.

“그럼 이것도 보시죠.”

시현이 또 다른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무슨…….”

“약제과 주사제 관리대장입니다. 안타깝게도 최근 일주일 동안 응급실에서 사용된 플루마제닐은…… 없습니다.”

그것까지 확인했을 줄이야.

김정현의 얼굴이 흙빛으로 질렸다.

“2주 전 내시경실에서 사용한 게 마지막이더군요. 준비하셨다던 플루마제닐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애초에 이수지에게 제대로 된 해독제를 투여할 계획은 없었다고 보아도 좋았다.

“저를 무슨 범죄자 취급하시는군요.”

태도를 바꾼 김정현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장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 사람도 나름 로얄이었지.’

원일웅 원장의 조카라고 했던가. 인기 마이너과를 전공하지 않고 비인기과에 몸담고 있어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의 인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참, 그걸 잊고 있었군. 원장님이 자네 외삼촌이라는 거.”

조광필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자네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같잖은 협박이 통할 거 같은가?”

“그게 무슨…….”

“응급실 중환자실은 이미 원장단 눈 밖에 난 지 오래야.”

만년 적자인 데다 응급환자를 진료하는 과 특성상 끊임없이 의료 소송에 시달려야 하는 구조.

원일웅이 응급실과 중환자실 병상을 줄여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최악이라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거지.”

김정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딩동!

딩동!

딩동!

한참 동안 이어진 보상.

시현은 흐뭇하게 새로 떠오른 알림창들을 바라보았다.

* * *

일주일 뒤.

“어머, 수지 오늘부터 출근이야? 몸은 좀 어때?”

10병동 수간호사가 반가운 얼굴로 이수지를 맞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다른 선생님들이 고생 많으셨죠?”

“죄송은 무슨. 다시 보니까 좋네. 앞으로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그동안 너무 참고만 살아서 마음에 병이 난 거 아냐?”

“감사합니다. 이젠 정말 괜찮아요.”

“그래? 그러고 보니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수간호사가 이수지의 안색을 살폈다.

갓 퇴원한 사람 같지 않게 그녀의 표정은 전과 달리 한결 밝아져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좋은 일…… 네! 근심거리가 하나 사라졌어요.”

이수지는 며칠 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 * *

“벌써 내일이면 퇴원이네요.”

“그러네요. 병동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했는데…….”

퇴원을 앞둔 사람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퇴원 후 그녀를 기다리는 건 평소와 같은 3교대 근무. 그리고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하지만 벗어날 수는 없는 남친 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정현 오…… 아니, 김정현 선생님은 요즘 무슨 일 있나요? 요 며칠은 면회도 오지를 않네요. 부모님이 전화해도 안 받는다고 하던데.”

“아마 앞으로 먼저 연락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간호사님이 먼저 연락하지 않는 이상은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연락이 안 온다니?”

이수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이걸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시현이 가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남자친구가 보낸 편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무적인.

병원 로고가 새겨진 흰색 봉투였다.

“이건…….”

“남자친구분께서 퇴원 선물을 보내신 것 같네요.”

봉투에 든 내용물을 확인한 이수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각서.

두 글자로 시작하는 단출한 문서 한 장.

하지만 그 내용은 그동안 이수지를 괴롭혔던 불안을 완전히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문제의 동영상을 영구 삭제하고 향후 어떤 형태로든 유포될 경우 민형사상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것.

그동안 이수지가 했던 일들에 대해 자신의 지시였음을 인정하고 피해에 대해 배상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원치 않을 시 먼저 연락하지 않겠다는 내용까지.

“이걸 그 사람이 써줬다고요?”

그동안 자신에게 해왔던 걸 생각하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변화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살인 미수를 주장하기에는 정황증거뿐이라 처벌은 어려운 상황.

하지만 이런 문제가 이슈화되는 것만으로도 김정현에게는 손해였다.

마지못해 각서를 쓰고 이 정도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에게도 최선이었던 셈.

“워낙 약점 잡아서 쥐고 흔드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잖아요? 비슷한 감정 느껴보시라고 ‘거울 치료’를 좀 해드렸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환자를 향해 시현은 빙긋 웃어 보였다.

* * *

“좋은 일이라면…… 혹시 수지 결혼하는 거야? 그 응급의학과 선생님이랑?”

수간호사가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평소 병동에서 예쁘고 성격 좋기로 유명한 이수지가 아니던가.

최근 연애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지만,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잘 해결된 것 같았다.

“아, 김정현 선생님하고는 헤어졌어요.”

“엥? 그럼 안 좋은 일 아닌가?”

애인과 헤어지고 저리도 밝은 표정이라니. 옆에서 듣던 차지간호사도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이번에 힘들었던 건 무슨 일인데? 혼자서 앓지 말고 속시원하게 이야기나 좀 듣자.”

“그건…….”

“그 정신과 천시현 때문이지? 김정현 선생님하고 잘 만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끼어들어서 마음고생 했던 거고? 맞지? 맞지? 내가 그 녀석을 가만두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원내 소문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상상했던 시나리오를 펼쳤다.

“천시현 선생님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지만 곧바로 당황한 이수지의 표정을 확인하자 그녀의 상상이 와장창 무너졌다.

“저희는 아무 사이 아니에요. 이번에 입원했을 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 그래?”

차지간호사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찰나.

“그런데 그 선생님…… 혹시 채이진 선생님과 사귀는 사이인가요?”

이수지가 수줍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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