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Chapter 16. PGR (1)
9병동 스테이션.
시현은 새로 입원한 환자의 외래 기록을 확인하고 어드미션 노트(Admission note, 입원기록)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좋겠어. 더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이수지가 퇴원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채이진에게 한 일을 보면 분명 중징계감이지만, 처벌을 받는 것은 이수지이지 그가 아닐 터.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수지가 김정현이 시킨 일이라고 밝힐 가능성도 없다.
모든 혐의를 떠넘기고 쉽게 꼬리 자르기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보는 눈이 많은 응급실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뭐가 또 있는 건가?’
뭔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특히 원장단 쪽 사람들과는 얽혀서는 안 돼. 전에도 말했듯이 당분간은 레지던트로서 진료에 전념하고.
조광필 교수가 했던 말들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김정현 앞에서는 관계가 더 나빠질 것도 없으니 마음대로 해보라는 태도였지만, 병원 내에서 삼아의료원 이사회와 원장단이 갖는 권한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 흉부외과 시절부터 생각하면 정말…… 이가 갈리는 사람들이야.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줄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조광필이 본래 흉부외과 출신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나중에 응급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교수 생활도 응급의학과에서 하게 됐다는 것도.
공교롭게도 두 과 모두 만성 적자에 허덕이는 과들이니 교수 생활 내내 원장단과 사이가 좋을 리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시현은 경우가 달랐다.
‘그 사람들하고 부딪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회귀 후 예상보다 일찍 채이진과 가까워지면서 김정현과 척을 지게 된 것이 접점이라면 접점이지만.
과거 경험을 되짚어봐도 현 원장인 원일웅을 비롯한 보직교수들과 말을 섞어본 기억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동선이라고는 4년 내내 폐쇄병동, 응급실 그리고 정신과 외래가 전부였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입원 기록을 이렇게 꼼꼼하게 써? 환자 방금 입원한 거 아냐?”
시현이 쓴 차트를 본 2년차 권진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의 모든 차트’를 통해 가능한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정리한 덕분에 시현의 차트는 하나하나가 바로 케이스 발표를 해도 될 정도로 자세했다.
“이 정도면 PGR에서 발표해도 될 정돈데?”
“감사합니다.”
PGR(Psychiatric Grand Round).
정신과 연합 집담회를 뜻하는 말로, 4-5곳의 대학병원 정신과가 모여 정기적으로 증례 발표를 하는 행사였다.
여러 병원에서 참석하는 만큼 케이스의 수준도 높고 날선 공방이 오고 가는, 발표를 맡은 레지던트에게는 꽤나 부담스러운 자리다.
“참, 오늘 한국대에서 PGR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선생님들께 공지했고 6시에 모여서 출발할 예정입니다.”
외부 일정을 챙기고 의국원들에게 공지하는 것도 1년차 업무였다.
“늦으면 안 돼. 진철영 교수님이 좌장이셔. 오늘은 내가 당직이니까 진호도 꼭 챙겨서 데려가고!”
권진은은 신신당부를 한 뒤 면담을 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무슨 증례였더라?’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무난한 케이스였던 것 같다.
어쩌면 발표 내내 조느라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고.
종일 뛰어다니며 일해도 잠 잘 시간조차 부족했던 과거의 1년차라면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바깥바람이나 쐬고 와야지. 오랜만에.’
1년차에게는 흔치 않은 외출 기회.
시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병동 문을 나섰다.
이 외출이 불러올 파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 * *
한국대 병원 5동 대회의실.
‘진철영 교수님이 좌장인 걸 보면 도박중독 사례 같은데.’
PGR의 좌장은 해당 증례에 대해 가장 경험이 많은 교수가 주로 맡는다.
진철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도박중독 전문가 아니던가.
국내 최초로 도박중독 인지행동치료 프로그램을 만든 인물이었다.
‘초진을 보려면 예약 대기가 1년이 넘을 정도니…….’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해외 카지노나 사설 도박장에나 가서 하던 베팅을 이제는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24시간 할 수 있게 되었다.
종류도 다양해졌다.
전통적인 카지노부터 불법으로 운영되는 스포츠 베팅. 그리고 원리를 이해하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리는 극단적인 고위험 파생상품 투자까지.
환자는 넘쳐나는데 제대로 치료하는 병원은 드물다 보니 치료 대기가 유독 길었다.
“여기 방명록에 사인해주십시오.”
회의실 입구에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이 시현을 맞았다.
[한국대병원 정신과 이재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새것 같은 가운을 걸친 앳된 얼굴의 의사.
타 병원 레지던트긴 하지만 시현과 같은 1년차로 훗날 정신과 전문의 준비를 같이하게 될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삼아대병원 1년차 천시현입니다.”
“아, 저도 1년차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재현입니다.”
“고생…… 많으시죠?”
“네, 선생님도…….”
짧은 악수.
긴말은 안 했지만 같은 처지다 보니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오늘 증례는 뭔가요?”
“도박중독 케이스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증례 자료입니다.”
역시. 진철영을 좌장으로 초빙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발표 끝나고 퇴실하실 때 반납 부탁드립니다.”
이재현이 증례집을 건네며 말했다.
환자의 경과 기록이 담긴 자료이니만큼 수령할 때와 반납할 때 모두 서명을 받았다.
[“마누라만 빼고 다 걸었어요.” 전 재산을 탕진한 50대 도박중독 환자 case.]
‘아, 이 환자분이었구나.’
증례 제목을 보고 나니 비로소 기억이 났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여러 병원이 돌아가며 준비하는 행사인지라 한국대 병원에도 종종 오곤 했었다.
시현과 같이 전문의 시험을 준비했던 다른 병원 1년차들도 눈에 들어왔다.
“천 선생도 왔군. 잘 지내지?”
익숙한 목소리. 채종우 교수였다.
“교수님,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요즘도 열심히 하고 있다면서?”
요즘도?
마치 시현의 근황을 알고 있는듯한 말투였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이광섭 교수님이 얼마나 자랑을 하시는지. 지난번에 신약으로 치료한 환자, 외래에서 아주 경과가 좋다고 하시더라고.”
ASP-9022로 치료했던 이말순 환자 이야기였다.
“어려운 환자들도 잘 보고…… 최근에는 우울증에 자살 고위험군 환자까지 보고 있다지? 이 무렵에는 보통 스키조(조현병) 환자하고 바이폴라(조울증) 환자 위주로 보지 않나?”
‘이건 이수지 환자 이야기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내심 1년차 보라고 하기에 마음에 걸렸던 환자.
하지만 시현이 본 환자들은 언제나처럼 경과가 좋았고 다른 병원 교수들에게 칭찬할 정도로 흡족했던 모양이다.
“치프 선생님이 배정해주시는 대로 본 것뿐입니다.”
“겸손은. 그것도 어느 정도 믿을만하니까 배정하는 거지. 우리 1년차들도 천시현 선생만큼만 해주면 좋겠는데…….”
“과찬이십니다.”
“그래, 곧 발표 시작하겠군. 오늘 증례는 담당 레지던트가 신경 많이 쓴 것 같더라고. 공부 많이 하고 가게.”
채종우가 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채이진 선생이 집에는 얘기 안 했나 보군.’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면 채종우 교수는 스토킹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교수님하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야?”
채종우가 행사 진행을 위해 연단 쪽으로 가자 김석용이 물었다.
“저희 동기 내과 선생님 아버님이세요. 지난번에 같이 밥 먹은 적이 있습니다.”
“내과면…… 채이진 선생님? 둘이 친해? 혹시 사귀는 건 아니지?”
김석용이 물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본다는 느낌으로.
‘아니, 그럴 수도 있지…… 그 표정은 뭔데요?’
[SORA : 레지던트 김석용의 주된 감정은 ‘매우 놀람’입니다.]
‘…….’
시현은 재빨리 알림창을 닫아버렸다.
“아닙니다. 둘 다 1년차인데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뭐, 꼭 시간이 문제는 아닌…… 흠흠. 그래도 동기 덕분에 타 병원 교수님도 알고 좋네.”
김석용은 민망한지 연신 손부채를 부쳐댔다.
“오늘 발표하시는 분이 한국대 2년차 선생님이시네요?”
시현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어, 굉장히 똑똑한 친구긴 한데 좀 재수 없달까? 보면 알 거야.”
‘똑똑한데 재수 없는…….’
오늘의 발표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 * *
연단 옆 좌장석.
“오늘 증례는 저희 전공의가 특별히 더 열심히 준비했다고 합니다.”
[한국대병원 정신과 교수 김상진]
그가 상기된 표정으로 진철영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어떤 신경을 썼답니까?”
“입원 중에 Group CBT(집단인지행동치료) 포함해서 치료도 열심히 했지만, 연구적인 관점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죠.”
진철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뭐래도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아니던가.
그가 모르는 새로운 시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도박중독 관련 스케일(심리검사도구) 정도를 확인하고 인지행동치료를 하는 건 너무 무난하지 않습니까? 저는 좀 ‘구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게 구식이라면…… 새로운 건 뭔가요?”
충분히 기분이 상하고도 남을 말이었다.
그 ‘구식’이라는 것이 진철영이 치료 프로그램을 만든 이래 거의 표준 치료로 자리 잡은 방법이었기 때문.
“이번 케이스에서는 도박중독을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했습니다. 도파민 관련 유전자 검사부터 fMRI 촬영까지요.”
“오, fMRI까지? 기대해보지요.”
fMRI(functional MRI, 기능성 MRI).
실시간으로 활성화되는 뇌 부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검사였다.
정신과적으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검사 장비가 워낙 고가라 현재까지는 주로 연구용으로만 쓰이고 있었다.
“네, 아직 국내에 일반 임상 환자에게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병원은 없죠. 오늘 참석한 타 병원 레지던트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될 겁니다.”
마치 ‘늬 집엔 이거 없지?’라고 말하는 표정.
김상진의 목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한국대병원 2년차, 나경철입니다. 오늘 증례는 40대 후반에 갑자기 발병한 도박중독 환자입니다.”
그러는 사이, 연단에 올라선 한국대병원 레지던트가 발표를 시작했다.
도박에 몰두하는 행동.
베팅 자금을 구하기 위한 반복적인 거짓말.
일상생활에서의 뚜렷한 기능 저하까지.
비교적 늦은 나이에 갑자기 발병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보통의 도박중독 환자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 흔한 증례 같은데 왜 PGR까지 가져온 거야?
- 이거…… 케이스를 잘못 골랐네.
- 바쁜 사람들 불러놓고 왜…….
곳곳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쁜 시간에 여러 병원 의료진들을 모아놓고 발표하기에는 너무 평이한 내용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겠지.’
주변 반응을 살피던 시현이 씩 웃었다.
진짜는 지금부터였으니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환자는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총 손실은 500억 원 입니다.”
역시나 연자의 다음 말에 회의실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 이 작품은 창작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집단, 지명 사건 등은 실존하는 것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작품 내 등장하는 의학 지식은 작품에 맞추어 재구성 및 각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