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Chapter 16. PGR (2)
총 손실 500억.
나경철의 말에 회의실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 뭐? 500억? 맙소사.
- 회사 말아먹을 기세네.
- 주주들은? 이 정도면 뉴스에 나올 것 같은데?
가장 자극적인 내용을 일부러 누락 했다가 따로 발표한다.
확실히 발표자는 청중들의 이목을 끄는 법을 알고 있는듯했다.
“다음으로 입원 중 촬영한 fMRI 영상 보시겠습니다.”
- fMRI? 그거 연구용 아닌가?
- 급여 항목이 아니라 청구도 할 수 없는데 그걸 했다고?
- 우리 병원에서는 한 번도 처방해본 적이 없는데…….
이걸로 2연타.
시시한 케이스라는 반응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건강한 성인과 비교한 영상입니다. 환자의 경우 우측 배외측전두피질, 좌측 후두 피질, 우측 해마곁이랑 등 여러 부위에서 유의한 신호 차이가…….”
발표자는 이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주요 소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보듯 알코올중독 환자가 갈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측좌핵, 편도, 선조체 등 영역에서도 다른 패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기존 연구와 부합되는 소견으로…….”
이제는 레지던트들뿐 아니라 다른 교수들까지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발표를 듣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아.’
나경철의 담당 교수인 김상진은 아까부터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어때? 이게 한국대 클래스라 이거야.’
그리고 함께 좌장석에 앉아있는 진철영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칩니다. 이어서 환자가 입원 중 참여했던 도박중독 인지행동집단치료 영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과거에서도 본 적이 있던 집단치료 영상이었다.
- 저는 도박 중독자 김OO입니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 입원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게 병이라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알겠어요. 제가 얼마나…….
환자는 울먹이고 있었다.
- 뇌사진을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이건 확실히 병이 맞구나. 뇌질환이 확실하구나. 앞으로 죽는 날까지 처방받은 약 꾸준히 먹으면서 반성하고…… 가족들에게도 거짓말 않고 살겠습니다.
인상적인 소감 발표였다.
많은 도박중독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부정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비록 편집된 내용이었지만, 환자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앞으로 치료에도 성실히 임할 것으로 보였다.
- 이야 환자가 병식이 있어 보이네.
- 확실히 뇌영상으로 보여주는 게 직관적이긴 하지.
- 입원 중에 집단치료를 바로 할 수 있다니…… 삼아대는 1년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
청중들의 반응도 역시나 긍정적이었다.
‘이 정도면 치료를 잘한 것 같은데…….’
유일하게 한 사람.
시현의 표정만 좋지 않았다.
- 그 환자분 돌아가셨어요. 퇴원 후에 도박중독이 재발해서 회사도 넘어가고…….
몇 달 뒤 학회에서 이재현을 우연히 만났을 때였다.
서로 딱히 할 말이 없었던 터라 두 사람은 PGR 환자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뜻밖에도 돌아온 대답은 환자의 죽음. 사인은 자살이었다.
‘뭔가 놓치고 있어. 대체…….’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했고 진단적인 면을 보더라도 현존하는 모든 검사를 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좋지 않았다.
도박중독이야 워낙 만성 질환이고 재발도 흔하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집단치료 영상에서 보이는 환자의 모습은 결코 단기간에 재발할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SORA : 추천 아이템이 있습니다.]
‘추천 아이템?’
메시지와 함께 ‘시청타촉의 포션’이 밝게 빛났다.
‘영상을 집중해서 보라는 건가?’
발표는 끝났고 남은 건 스크린에 재생되고 있는 집단치료 영상뿐이었다.
‘좋아. 바로 사용할게.’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화아악.
알림창과 함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실제 치료 현장에 가본 적은 없지만, 환자의 작은 몸짓과 목소리의 떨림마저 생생하게 느껴졌다.
* * *
“발표 잘 들었습니다.”
준비된 영상 자료마저 끝나자 좌장석에 앉아있던 진철영이 운을 뗐다.
“저도 수십 년 동안 도박중독 환자 치료를 해왔지만 이렇게 한 환자에게 정성 들여서 다양한 검사를 한 케이스는 처음입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일단 시작은 담당 레지던트에 대한 격려였다.
“플로어에서 혹시 질문이나 코멘트 있으면 해주십시오.”
그리고 진철영은 청중들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손실 액수도 크고 환자분도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결과가 좋은 것 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환자에게 영상의학적인 소견을 제시함으로써 굉장히 직관적인 설명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한국대 병원 부럽네요.”
“명성대 유정민입니다. 굉장히 공들인 케이스이고 진단 면에서도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평소 까칠하기로 유명한 유정민 교수까지. 호평 일색이었다.
시현 또한 특별히 부족한 부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다들 좋은 말씀만 하시는 것 같네요. 분위기가 훈훈합니다. 질문은 없습니까?”
진철영 교수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세연대 정하진입니다. 향후 경과가 어떨 것으로 예상하시나요?”
한참 만에 나온 질문.
앞으로 어떻게 되겠냐고 물은 것은 진단이나 치료에 대해서는 언급할 부분이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이 또한 칭찬에 가까운 코멘트.
“비록 도박중독이 쉽지 않은 병이라고는 하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진료했고 결과도 좋으리라고 봅니다.”
나경철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충동 조절에 문제가 있으니 항정신병약물을 병행해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부분도 고려했지만 잘 맞지 않았습니다. 우선 유지 치료로는 날트렉손(Naltrexone, 항갈망제의 일종)을 투여할 계획입니다.”
도박중독 자체로는 승인된 약물이 없으니 알코올중독 치료에 쓰이는 날트렉손을 투여하겠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질문을 던진 정하진 교수 또한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항정신병약물이…… 잘 맞지 않는다?’
한편 시현은 의외의 부분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지?’
다음 순간 영상에서 보았던 환자의 손 떨림과 느릿한 발걸음이 뇌리를 스쳤다.
“자, 그럼 더 이상의 질문은 없는 것으로 알고 이번 PGR은…….”
진철영이 마무리 멘트를 던지려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질문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네요.”
진철영의 말에 청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편을 향했다.
“말씀해보세요. 천시현 선생님.”
그는 빙긋이 웃으며 시현을 바라보았다.
“증례 발표 잘 들었습니다.”
시현이 이내 손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환자분의 기저질환에 대해 문의드리고 싶습니다.”
“기저질환이라면 무슨…….”
“혹시 환자분이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을 앓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시현의 질문에 나경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
대표적인 퇴행성 뇌질환 중 하나로 뇌에서 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가 서서히 소실되면서 움직임에 장애가 발생하는 질환이다.
증상으로는 떨림과 경직이 나타나고 행동이 느려지며 자세가 불안정해진다.
병이 진행되면 인지기능에도 영향을 준다.
‘이 자식은 뭔데 시비야?’
작년까지 못 보던 얼굴인 걸 보면 타 병원 1년차가 분명했다.
교수들도 호평 일색인 가운데 고작 1년차가 자신이 준비한 증례에 태클을 걸었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네, 맞습니다. 파킨슨병으로 본원 신경과에서 약물치료 중입니다. 비교적 초기이고 증상도 심하지 않아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
일단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웅성웅성.
나경철의 태도와는 달리 청중들 가운데 몇몇은 동요하는 분위기였다.
“일부 증상이 관찰되고는 있지만, 아직 인지기능에 영향을 줄 단계는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파킨슨병이 도박중독을 유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이번에는 나경철이 시현에게 물었다.
“추가로 질문드리겠습니다. 파킨슨병에 대한 약물치료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시현이 즉답을 피하고 되물었다.
“그건…….”
순간 나경철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프라미펙솔 서방정 0.75mg 1일 1회 투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침착하게 알트탭을 눌러 병원 의무기록을 확인한 뒤 간신히 약물 이름과 용량을 대답할 수 있었다.
- 그거 도파민 아고니스트(Dopamine agonist, 도파민 수용체를 자극하는 약) 아냐?
- 맞아. 파킨슨 약인데 하지불안증후군에서도 쓰는?
- 혹시 그 약이 문제라는 거야?
아까보다 더 커진 웅성거림.
시현 쪽을 바라보는 다른 병원 레지던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거였어.’
프라미펙솔(pramipexole).
뇌 내에서 도파민처럼 작용하는 약물로 파킨슨병으로 인한 운동기능 저하를 회복시켜주는 약.
그리고 도박중독 증상은 이 약의 흔히 발생하지는 않지만 꽤나 까다로운 부작용 중 하나였다.
노인들에게 매우 흔히 처방되지만, 이 약의 숨은 부작용에 대해 아는 의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질문자분의 의도를 알 수가 없는데요? 그것과 이 환자가 무슨 상관이죠?”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경철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똑똑한데 재수 없다고? 그냥 재수가 없는 것 같은데.’
시현이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이제 막 2년차가 됐는데 모를 수도 있지.’
사실 2년차라고 해봐야 이제 갓 1년차를 벗어난 상태다.
이 시기에 도박중독 환자를 진료하고 이렇게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다만 시현의 눈높이가 높아졌을 뿐이었다.
“행위 중독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신경생물학적으로는 중피질 변연계 회로가 주로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현은 나경철을 자극하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해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회로의 주된 신경전달물질이 바로 ‘도파민’입니다. 프라미펙솔이 작용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지금 파킨슨병 치료제 때문에 도박중독 증상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여전히 나경철은 기가 찬다는 반응이었다.
“선후관계와 인과관계는 다릅니다. 인과관계를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죠.”
시현이 좌중을 둘러보며 운을 뗐다.
“하지만, 도박중독 증상이 본격적으로 악화된 시기와 약물 투여 시점이 일치하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게 1년차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긴가?’
나경철도 그의 지도교수인 김상진도 멍한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반면 좌장석에 앉아있던 진철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 부분은 제가 마무리 코멘트 하겠습니다.”
진철영의 자리에 있던 고정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