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61화 (61/195)

61화 Chapter 17. 방해물을 치우다 (1)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라!”

황진호가 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응? 어, 그래…….”

“시현아, 오늘도 한 건 했다면서? 자, 내 잔도 받아.”

뒤늦게 합류한 김민홍까지 시현을 격려하며 잔을 건넸다.

시현은 재빨리 얼룩진 시스템 창을 닫아버렸다.

‘소개팅쯤이야 뭐. 자력으로도 충분해!’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오랜만에 기분 좋은 술자리가 이어졌다.

* * *

“천선생, 혹시 인디언 성인식 이야기 들어본 적 있나?”

진철영의 질문에 시현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인디언 성인식이요?”

레지던트 과정을 모두 마친 그로서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어느 인디언 부족은 성인식을 옥수수밭에서 치른다고 해. 아이들을 밭으로 데리고 가서 가장 좋은 옥수수 하나만을 따오도록 하지.”

“크고 잘 익은 옥수수 하나만 찾으면 되는 건가요?”

나 홀로 사냥에 성공하거나 절벽에서 약초를 캐오는 그런 장면들을 떠올렸으나 성인식의 내용은 의외로 평이했다.

“그래. 그런데 거기에는 두 가지 규칙이 있어. 한 번 지나간 길은 되돌아갈 수 없고, 한 번 옥수수를 고르면 더 좋은 옥수수가 나와도 바꿀 수가 없지.”

단순해 보이지만 쉽지 않은 문제였다.

가는 길에 제법 괜찮아 보이는 옥수수를 땄다가 후에 더 큰 옥수수를 발견할 수도 있고 반대로 선택을 미루고 미루다가 좋은 옥수수들을 놓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최고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특정 시점에서 고른 옥수수가 밭에서 가장 큰 옥수수가 될 확률이…….”

“사실상… 0에 가깝겠지.”

진철영 교수가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환자를 보는 것도 비슷해. 우리가 한 선택이 최고의 선택일 가능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아.”

“네,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시현이 진철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인 거야. 살면서 최고의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급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직 1년차이지 않은가?”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진철영의 격려에 마음이 급하게 훈훈해졌다.

“그래, 그리고 저기 황 선생 좀 챙겨야겠다.”

“네, 교수님.”

건너편 테이블에서 연거푸 잔을 들이키는 황진호가 눈에 들어왔다.

* * *

“이게 누구야. 내 동기 시현이 아니야!! 하하하.”

“진호 좀 취한 것 같다.”

김석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챙길게요. 진호야, 어서 가자.”

황진호를 부축해서 나오자 술기운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시현아, 나 안 취했어. 택시 타고 갈게 먼저 들어가.”

“괜찮겠어?”

“걱정하지 마! 내가 또 ‘민폐’가 되면 안 되지. 내일 보자.”

황진호는 따라가겠다는 시현을 만류하고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다.

“어? 벌써 갔어?”

뒤따라온 김석용이 물었다.

“네, 택시가 바로 와서요.”

“진호가 마음고생이 좀 있었더라고. 지난번에 응급실에서도 그렇고 자기 몫을 못 했다나?”

‘그래서 민폐라고…….’

황진호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괜히 미안했던 모양이지? 그나저나 괜찮을지 모르겠네. 술 많이 마셨는데.”

김석용의 걱정스러운 표정.

그 우려는 몇 시간 후 현실이 되었다.

* * *

딩동!

[SORA : 응급실에 새로운 환자가 도착했습니다.]

‘새로운 환자? 오늘 당직도 아닌데.’

PGR에 참석하느라 오늘 당직은 2년차 권진은이 서고 있었다.

[황진호 남/26 인턴 임승희 / R1 정병수]

‘이게 뭐야.’

응급실 재원 환자 리스트에 익숙한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병수 형이면 OS(정형외과) 인데. 차트 띄워줘.’

[SORA : 차트를 출력합니다.]

- 상기 환자는 계단에서 뛰어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어째 평소 주량보다 더 마시는 것 같더니만 계단에서 구른 모양이었다.

걱정은 되었으나 주 진료과가 신경외과가 아닌 정형외과라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한 상태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치고 뇌출혈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진도 볼게.’

[SORA : PACS(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에서 당일 촬영한 X-ray를 불러옵니다.]

엑스레이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눈에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 뚜렷한 종골(발뒤꿈치뼈) 골절이었다.

‘어휴 이건 꽤 심한데.’

위이이잉.

시현이 응급실 쪽을 향해 걷는데, 별안간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 천시현 선생님 되십니까?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처음 보는 번호. 처음 듣는 목소리.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사건 때문에 급히 연락을 드리느라. 여기는 서울중앙지검 검사…….

서울중앙지검?

일과시간도 아닌데 전화를 걸어 공공기관을 사칭한다.

매우 높은 확률로 보이스 피싱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뚝.

시현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고는 곧바로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무슨 전환데?”

“서울중앙지검이랍니다.”

“어휴, 안 그래도 바쁜데 아침부터 보이스피싱까지?”

김석용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들 환자로 심심치 않게 와. 당하고 나면 화병도 나고. 신상이 노출됐다는 생각 때문에 괜히 무서운 생각도 들고.”

“그럴 것 같습니다. 세상에 사기꾼들이 너무 많…….”

위이이잉.

그러나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다시 울리는 휴대폰.

역시나 같은 번호였다.

- 천시현 선생님, 갑자기 연락드려 당황하셨죠? 하지만 저는 진짜 서울중앙지검 검사 강현…….

뚝.

위이이잉.

- 저기요, 사람이 말을 하면 우선 좀 들어 보시……

이번에는 아예 개인 휴대폰 번호로 전화가 왔다.

뚝.

더 들어볼 것도 없이 시현은 재차 전화를 끊었다.

‘참… 열심히도 하네.’

가뜩이나 퀘스트도 실패하고 황진호도 다쳐 심기가 불편한 상황.

평소 같았으면 무슨 참신한 거짓말을 늘어놓나 들어는 봤을 텐데.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시현은 방금 걸려 온 전화번호들을 모두 수신 차단한 뒤 응급실을 향했다.

* * *

삼아대병원 응급의료센터 C라인.

당장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환자들이 침상을 배정받는 구역이었다.

[황진호 남/26 인턴 임승희 / R1 정병수]

“어, 왔어?”

황진호가 침상에 누워서 시현을 맞았다.

“골절이라는데…… 수술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황진호가 슬쩍 시현의 표정을 살폈다.

다친 것도 서러운데 동기 눈치까지 보게 되는 것이 1년차 생활이었다.

“계단 조심했어야지. 괜찮아?”

“어? 계단에서 넘어진 거 어떻게 알았어?”

황진호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모르는 게 뭐냐는 표정으로.

“방금 사진 보고 왔어. 입원해서 그동안 못 잔 잠 보충해. 일은 걱정하지 말고.”

지금의 시현이라면 1년차 2명 이상의 몫을 충분히 해내고도 남을 상태라 업무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만한 게 다행이야. 머리라도 부딪쳤으면 큰일 날 뻔했다.”

“너한테 너무 미안한데. 아오. 술이 웬수다 웬수.”

아픈 발보다 또다시 ‘민폐’가 되었다는 생각에 더 괴로운 듯했다.

과거의 시현이라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당직 갚으란 이야기 안 할 테니까 수술 잘 받고 와.”

황진호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일주일 남짓이 될 터였다.

일반 회사에서 주는 병가에 비하면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짧지만, 레지던트 업무 특성상 길게 입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디.

“이야. 정신과 1년차들 아주 훈훈하구먼.”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병수 남/29 삼아대병원 정형외과 1년차]

정병수.

동기였지만 3살 많은 형이었는데, 의대 졸업 후 공중보건의로 병역을 마치고 레지던트 수련을 시작한 때문이었다.

“진호야, 수술하고 부기만 빠지면 바로 퇴원하자.”

“네? 그게 무슨…….”

“정신과는 발목 없어도 할 수 있잖아? 하하하.”

정병수가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건넸다.

“…….”

황진호는 그게 환자에게 할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새로 오신 교수님 수술 잘하시던데. 그분 앞으로 입원 오더 내놓을게. 노트북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정병수는 실상 동기들을 잘 챙겨주는 형이었다.

“지금 내 이름으로 입원해 있는 환자들 세 분 잘 부탁해. 정말 미안하다.”

‘전에는 없던 일인데.’

미안해하는 황진호와는 다른 이유로 시현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 * *

다음 날 10 : 00 AM

“1년차 황진호 선생이 오늘 수술하니까 이번 주 신환은 2년차 선생님들이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회진이 끝나고, 김민홍이 2년차 김석용과 권진은에게 말했다.

“그럼요. 시현이 혼자서는 힘들…….”

“그게 무슨 소리야? 솔직히 술 먹고 뒹굴어서 다친 것까지 윗년차들이 커버해줘야 해?”

김석용이 대답하는데 최지훈이 불쑥 끼어들었다.

“연차별로 정해진 일이 있는 거야. 동기끼리 알아서 해야지. 정 안 되겠으면 수술하고 바로 출근하라고 하고.”

짐짓 김석용과 권진은을 위하는 듯 보였지만 당연하게도 시현에게 일을 몰아주고 싶어서였다.

“환자 평소처럼 보겠습니다. 정 힘들면 말씀드릴게요.”

당황하며 하소연하는 모습을 좀 보고 싶었는데, 시현은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겠어?”

되려 김민홍이 걱정할 정도.

“네, 문제없습니다.”

업무가 과하지 않도록 배려하려 했으나 당사자가 싫다고 하니.

달리 도울 방법이 없었다.

“최지훈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황진호 선생 담당했던 환자 인계받아서 보겠습니다. 신환도 1년차가 볼 환자라면 제가 보고요.”

‘얜 조증인가. 왜 이렇게 의욕적이야?’

사정을 알 리 없는 김민홍은 한참 다른 곳을 짚고 있었다.

“그래, 알겠다.”

김민홍이 마지못해 시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환자 보는 순서가 꼬여서는 안 되니까.’

과거에서 봤던 환자가 다른 레지던트에게 넘어가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변수가 새로 발생한다.

시현은 그런 부분들을 최대한 줄여나가기로 했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꾸준한 동료애 - 동료 레지던트에 대한 지속적인 배려로 평판이 상승합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보상도 주어졌고.

‘포션 준비해줘. ‘카이트만의 안경’도.’

[SORA : ‘회복 포션’과 ‘가속 포션’을 사용합니다.]

[SORA : ‘카이트만의 안경’ 구독권을 구매하여 바로 사용합니다.]

업무량이 두 배가 된 만큼 아이템은 필수.

시현은 곧장 환자들을 보러 나섰다.

* * *

“선생님, 신환 한 분 입원하셨어요.”

스테이션으로 나오자 이선지 간호사가 기다렸다는 듯 시현에게 말했다.

“혹시 성함이?”

“김민숙님입니다. 23세 여자 환자이고 외래에서 스키조(조현병)으로 진료 보시던 분이세요.”

“네, 알겠습니다.”

귀에 익은 이름.

시현은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면담실을 향했다.

‘오늘부터는 병동에서 살다시피 해야겠어.’

김민숙.

그녀는 과거의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서도 어려운 케이스 다섯을 꼽으라면 꼭 들어갈 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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