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63화 (63/195)

63화 Chapter 17. 방해물을 치우다 (3)

“너, 뭐 하는 놈이야?”

순식간에 정길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꾼들은 위축되기 마련.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번 일은 어찌어찌 막는다고 해도 내버려 두면 또 다른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니까.

“뭔 이상한 x끼가 담당의가 돼서. 당장 바꿔. 우리 조카 못 맡기겠으니까.”

“정신과 의사 경험이 많이 없으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이런 일로 잘못된 사기꾼들을 많이 본 사람이라고 해두죠.”

“…….”

“환자는 집에서 어떻게 지냈습니까? 병실에서는 대화가 되지 않던데요.”

정길수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시현은 화제를 돌렸다.

“자기 방에서만 살다시피 했죠. 학교도 휴학했고요.”

심한 사회적 위축.

“맞아요. 방에서 알 수 없는 그림만 그려댔어요. 혼잣말하면서요.”

그리고 환각 행동.

“최근에 질병으로 치료받았다거나 새로 시작한 약물은 없나요?”

“네. 없습니다. 병원 다니는 걸 못 봤어요.”

약물이나 기저 질환에 대한 영향 배제.

시현은 보호자들의 말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한편 틈틈이 차팅도 하며 면담을 이어 나갔다.

정길수와 보호자들의 페이스에 말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과거와는 달리 훨씬 노련한 모습이었다.

“환청과 피해망상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치료 계획은…….”

반면 그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던 정길수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돼. 뭐라도 말해서 기선을 뺏어와야…….’

이 젊은 병동 담당의가 어떻게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베테랑 사기꾼답게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결국 병동에 가둬놓고 약물로 치료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정길수가 입을 열었다.

“근본 치료는 하지 않고 그렇게 약만 써서 ‘우리’ 민숙이가 나을 수 있는 겁니까?”

유독 ‘우리’에 힘을 주면서.

“이 병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는 정길수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맞아요. 이분은 장완중 씨인데…….”

김민숙 어머니가 옆에서 거들었다.

[박경숙 여/58]

“둘 중 하나는 가명인가 보군요. 어느 쪽이든 확실히 외삼촌은 아니신 것 같고요.”

“보자 보자 하니까 뭐? 가명? 당신이 언제 나를 봤다고 사람을 사기꾼 취급을 해?”

“어휴 보다마다요. 병동에서 환자 붙들고 구타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요? 김민숙 환자한테도 똑같이 하실 건가요?”

시현의 말에 정길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걸 어떻게.’

물론 이 시점에서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억울할 법도 했지만, 자신의 수법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 아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잘 생각해 보세요. 저 모르시겠어요?”

그는 시현이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고 직감했다.

‘이 의사를… 어디서 봤더라? 이 병원은 처음인데.’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시현에 대한 기억을 전혀 떠올릴 수 없는 상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몸속에 악한 영이 들었다면서 당장 쫓아내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말하는 사이비 퇴마사가 있었습니다.”

반면 시현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면담을 이어 나갔다. 정길수를 노려보면서.

“조현병 환자들만 골라서요. 제 환자 중에도 그 말에 속아서 봉변을 당한 분이 계셨죠.”

“그 환자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김민숙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병동에서 퇴마사에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무슨 의식이라나요? 퇴원 후에는 그 사람이 운영하는 수련원으로 들어갔고요. 치료를 제대로 하려면 자기가 운영하는 수련원에 입소해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차도가 있었습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보호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안타깝게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약도 반강제로 끊게 되었고, 증상은 되려 나빠졌어요. 수련원 생활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부부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정말로 선생님 환자분 중에 그런 경우가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앞으로 김민숙 환자에게 일어날 일이라고 설명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았다.

“저분이 극구 아니라고 하시니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혹시라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무조건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길수를 바라보는 시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그렇군요.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저희 딸 잘 부탁드립니다.”

김민숙의 아버지는 시현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아버님! 잠깐만 앉아보세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의사가 저를 모함하는 겁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정길수는 어떻게든 두 사람을 붙잡아서 이야기를 해보려 했으나 김민숙의 부모는 눈을 흘기며 면담실을 나갔다.

‘됐다.’

순식간에 시현과 정길수 두 사람만이 면담실에 남게 되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저요? 저 오늘 그쪽 처음 뵙습니다만.”

정길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엥? 아까 분명히…….”

“아, 그거요?”

시현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보호자가 아닌 건 진작 알았죠. SNS 홍보를 아주 자알 하셨더군요. 초록창에 검색어 몇 개 넣어보니까 바로 나오는데요?”

그리고 면담실 PC의 모니터를 돌려 정길수에게 보여주었다.

검색어는 환청.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가 상단에 노출되어 있었다.

<퇴마 빙의 치료로 조현병을 치료한 최면 명인, 정길수>

‘웹소설 작가를 했으면 대성했겠는데.’

광고인지 판타지물인지 모를 ‘증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최근에 ‘빙의 치료’ 하셨다는 증례도 아주 흥미롭군요. 성공률 100%라니…… 이거 저라도 혹하겠어요.”

‘수련원 애들 중에 누가 이 병원에 온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사기 수법까지 훤히 알고 있는 것을 보고는 피해자의 증언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 상황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 수련원 환자들이 말해준 모양인데 분명히 경고하지. 사지 멀쩡하게 의사 노릇 하고 싶으면 더 이상 영업 방해하지 마. 명예 훼손으로 고소할 거야 내가.”

“한참 잘 못 짚은 것 같은데…… 저는 오늘 그쪽 처음 봤다니까요?”

“아니, 그럼 어떻게?”

“사기꾼들 하는 짓이야 뻔하죠. 그걸 꼭 당해봐야 압니까?”

“…….”

“참 순진한 분이시네.”

정길수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사기를 치려다 딱 걸린 것도 모자라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야! 너 뭔데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야? 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이었다.

“말은 바로 하시죠. 누가 누구한테 끼어들어요? 내가 내 환자 치료하는데 당신이 거기 끼어든 겁니다.”

“…….”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또다시 할 말을 잃은 정길수에게 시현이 쐐기를 박았다.

“정신과 들어온 지 딱 3달 됐습니다. 1년차한테도 탈탈 털리는 실력인데 말년에 고생 안 하려면 그만 은퇴하시죠.”

“너 이 X끼 뒤통수 조심해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놈 하나 보내는 건…….”

이제는 악밖에 안 남은 표정.

정길수가 이를 갈며 말하는 찰나.

똑똑.

노크와 함께 누군가 면담실로 불쑥 들어왔다.

단정하게 빗은 짧은 머리가 인상적인, 검은 정장 차림의 젊은 남성.

최근에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병동을 잘못 찾아온 것 같았다.

“누구시죠? 본관 9층은 이쪽이 아닌…….”

“천시현 선생님, 급하게 상의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전화는 왜 안 받으세요?”

“네? 그게 무슨…….”

시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 * *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야.’

처음 보는 사람이 별안간 들이닥쳐 왜 연락을 안 받느냐고 따지고 있다.

더 이상한 것은 정길수의 반응.

그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 3부 강현욱 검삽니다. 혹시 기억 안 나세요?”

‘강현욱이라면…….’

학기 초에 환자 행세를 하며 입원했던 조동규를 연행해간 검사였다. 그때 명함도 받아뒀던 것 같은데, 따로 연락할 일이 없으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검사님이셨군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간혹 보호자가 찾아오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수사기관에서 찾아오는 일은 처음이었다

“조동규 환자…… 아니 그 싸이코패스 자식 때문입니다. 연락 여러 번 드렸었는데 도무지 받질 않으셔서 부득이 찾아왔습니다.”

어쩐지 울분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다시 확인해보니 수신 차단함에 강현욱이 보낸 메시지들이 쌓여있었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던 연락이 진짜 검찰청에서 온 것일 줄이야.

“상담 중인 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이따가 다시…….”

강현욱이 면담실을 나서려다 말고 시현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정길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검, 검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한지는 모르겠고, 왜 여기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 그게…….”

사연은 모르겠지만 쩔쩔매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시현에게 뒤통수 조심하라며 큰소리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또 정신과 병동에 얼쩡거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조카가 입원을 해서 문병을…… 죄, 죄송합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정길수는 그길로 도망치듯 면담실을 빠져나갔다.

김민숙 환자의 보호자에게 연락해서 어떻게든 다시 수작을 부려볼 요량이었으나, 이제는 말끔히 접기로 했다.

‘검사가 개인적으로 찾아올 정도라니.’

자신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챈 것도 모자라 강현욱 검사와 개인적인 친분도 있다니. 더 얽혀봐야 좋을 일이 없어 보였다.

딩동!

또다시 반가운 알림음.

새로운 창들이 쏟아졌다.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예방의학 전문가 - 잠재적 악화 요인을 조기 차단하였습니다. 다수의 환자들이 영향을 받습니다.(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참교육 - 외길 30년 사기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정신적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환자가 호전되어 받는 보상과는 또 다른 뿌듯함이 있었다.

“그나저나, 병동에 들어가겠다는 거 막고 계셨던 겁니까?”

보상 내용을 모두 확인하자 강현욱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네, 환자분께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시는 분입니까?”

“네. 나름 이쪽에서는 유명한 놈이에요. 아직도 환자들 등쳐먹고 사는 게…… 옛날 버릇 못 버린 것 같습니다.”

정길수의 뒷모습을 보며 강현욱이 혀를 찼다.

“보통은 친척행세 하면서 막무가내로 들어가는데, 선생님은 감이 참 좋으신 것 같군요. 특별한 요령이라도 있습니까?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는 흥미롭다는 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조동규 씨라면 수감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회귀 전에 당해봐서 안다고 할 수도 없고.

시현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

“솔직히 지금 분위기가 많이 안 좋습니다.”

“분위기가 안 좋다는 건 무슨…….”

“이대로 가면 감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이어진 뜻밖의 말에 시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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